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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했던 지난 3월 18일, 취재팀은 릴레이 인터뷰의 두번째 취재를 위해 중앙선을 타고 양정역으로 향했다. 역사를 빠져나오자 제일 먼저 맑은 공기와 탁트인 자연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목적지인 인농센터(서울시립 망우청소년수련관)는 역에서 아주 가까웠다. 건물 앞에는 장승을 모티브로 한 안내판이 보였고, 건물 곳곳에서 자연과 인공의 어우러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각종 건물 및 시설의 이름을 순우리말로 표시해 놓은 이정표가 인상적이었다. 건물의 한쪽에서는 아주머니들이 에어로빅에 열중하고 계셨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 율동을 배우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관장실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관장실도 '상머슴방'이라는 재미있는 말로 불리고 있었다. 양해관 선생님은 다소 긴장한(?) 취재팀을 평화와 온기로 가득한 모습, 밝은 표정과 따뜻한 웃음으로 맞아주셨다.
문. 안녕하세요 선생님. 먼저 북대 원우분들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답. 예. 망우청소년수련관 관장을 맡고 있는 석사 8기 양해관입니다. 반갑습니다.
문. 릴레이 인터뷰의 두 번째 인터뷰이가 되셨습니다. 윤기종 선생님께서 적극 추천해 주셨구요.
답. 예. 알고 있어요. 저도 생각해놓은 다음 사람이 있습니다.(웃음)
문. 윤기종 선생님과는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답. 아주 특이한 케이스이죠.‘475’라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인터넷 친구에요. 당시 대북사업을 하셨던 분이었고... 그 사이트를 통해 만나서 북대 이야기를 나눴죠. 윤기종 선생님께서 북대 면접 때 내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다들 궁금해 했어요. 고향도 다르고 한데... 그래서 475, 인터넷 사이트에서 만났다고 하니까, 50살 넘은 사람 둘이 사이트에서 만나서 동문까지 되었다고 학교 교수님들도 많이 웃으셨죠.(웃음)
문. 그럼 선생님은 어떻게 북대에 오시게 되었나요?
답. 제가 원불교 교무입니다. 교무는 불교의 스님, 기독교의 목사와 같은 개념입니다. 제 원불교 관련 후배들과, 남북관계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이곳을 알게 됐고, 공부를 해보고픈 생각이 들어 지원을 했지요. 그때는 학교를 전주에서 다녔어요.
문. 와, 대단하시네요. 당시는 전주에서 일을 하셨던 건가요?
답. 예. 원불교 일이죠. 원광대학교 한방병원이 전주에 있는데, 그곳에 교무로 있을 때죠. 고속버스타고 북대까지 와서, 수업 받고 3교시까지도 하고,(웃음) 그러다 밤늦게 심야버스 타고 내려가고 했지요.
문. 북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수업이 있으신가요?
답. 뭐, 역시 3교시죠.(웃음)
문. 술도 좋아하신 것 같습니다.
답. 글쎄요, 저는 그냥 이슬만 먹고 삽니다.
문. 지금 말씀하신 이슬이 녹색 병은 아니겠죠?(웃음)
답. 맞아요.(웃음) 제가 술은 제법 하는 편이죠. 좋아하고...
문. 이곳(망우청소년수련관) 관장님으로 계신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이것은 시립 망우청소년수련관인데요, 원불교 청소년 법인 단체가 있어요. 삼동청소년회라고... 아, 제가 북대 다니기 전에, 그러니까 원불교 다음에 유아교육을 좀 했어요. 특이하죠?
문. 예. 처음엔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답. 유아교육 관련 공부를 하고, 청소년지도자격증을 땄죠. 교무로 있다가 그러던 차에 수탁이 들어와서, 맡게 되었죠.
문. 삼동이란 무엇인가요?
답. 말 그대로 ‘同’ 3개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와 사상은 하나(同源道理)이며,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생명의 근본이 한 기운으로(同氣連繫) 된 것이며, 이 세상을 은혜롭게 만드는 한가지 일이므로(同拓事業) 모든 종교도 곧 하나다. 쉽게 이야기하면 복 짓고 살자는 것이죠. 사랑하며 은혜롭게 살자는 것이고... 이런 것들은 종교를 초월해서 다 똑같은 것이라는 거죠. 불교로 이야기하면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네가 있다. 이런 것이고요. 좀 어려운 이야기이긴 합니다. 허허...
문. 저는 이곳 수련관에 붙어있는 ‘인농센터’라는 말이 인상에 남습니다. 참 말이 좋은 것 같은데, 설명 부탁드립니다.
답. 원불교에서는 제일 어른을 종법사님이라 불러요. 교황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그분께서 사람농사를 잘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세상의 모든 농사 중 가장 중요한 농사라고 하셨는데, 그분의 뜻에 근거해서 학교도 세우고, 유치원도 세우고 했지요. 아이들 마음을 흔히 天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사람농사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시로부터 수탁을 받았을 때, 이곳 이름이 ‘망우청소년수련관’이니까, 시에서 조금 안어울린다고 했죠. 망우리하면 공동묘지가 제일 먼저 생각나니까(웃음) 그러면 별칭을 쓰게 해주십시오. 해서 ‘인농’센터가 된 것이죠.
문. 사실 인농 뒤에 붙은 ‘센터’라는 말이 살짝 언밸런스하기도 합니다만...(웃음)
답. 왜 그러냐 하면, ‘하자 센터’라는 곳이 있어요. 많이들 알죠? 그래서 그 연장선상에서 붙인 거죠.
문. ‘상머슴’(관장을 의미함)도 선생님께서 붙이신 건가요?
답. 우리가 수련과 열고 직원 뽑아서 제일 처음 한 일이, 조사를 통해 프로그램을 구상한 것이구요. 또 그와 관련해서 사람 농사 프로그램이니까, 우리 말로 건물들 시설 이름을 붙이자고 했죠. 이곳 상머슴방에 올라올 때 무엇을 타고 오셨나요?
문. 계단으로 왔습니다.
답. 그렇군요. 여기선 엘레베이터를 두레박이라고 불러요.
문. 아, 다른 것도 그런 식이군요.
답. 예, 헬스는 튼튼 마당, 체육관도 한자니까, 뜀터...그럼 수영장은?
문. 물놀이...? 잘 감이 안오네요
답. 큰둠벙이에요. 허허. 이런 이름들을 처음 방문하신 분들도 곧 재밌어 하세요.
문.선생님께서는 아까 유아 교육을 공부했다고 하셨는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답. 우선 저는 유아 교육을 접하면서, 내 아들의 성장기를 4년 동안 연재한 적도 있어요. 책도 냈고...
문. 아드님을 키우시면서 겪으신 일들을 책으로도 내신 것이로군요.
답. 예. 그렇지요. 유아교육을 배운 사람으로서, 직접 내 아이를 키우고 배우는 것이 그 어떤 교육보다 가장 배움이 컸지요.
문. 피아제도 그렇게 연구를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답. 예. 그랬죠. 피아제처럼, 저도 제 아이에게 참 배운게 많아요.
문. 이곳 수련관은 언제부터 맡게 되셨나요?
답. 이제 5년째가 되었네요.
문. 시에서 지원을 많이 해주나요?
답. 그렇진 않고요. 이곳에서 수영장하고 헬스, 에어로빅 같은 프로그램을 많이 운영하는데, 거기서 번 돈을 주로 청소년들한테 쓰죠.
문. 여기서 주로 어떤 프로그램이 있는지 알려주세요.
답. 일일이 나열할 수가 없죠. 200개 정도 되니까요.
문. 그럼 조금 특색 있는 부분이라던지 하는 점을 말씀해 주세요.
답. 작년에 노동부로부터 우리가 펀드를 받아서 하는 일이 있어요. 학교밖 청소년들, 예를 들어 ‘뉴스타트’ 같은 거죠. 그 일을 수련관 중에 우리가 처음으로 했어요. 청소년들과 관련해서 지금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가장 큰 이슈 중 하나가 취업 문제에요. 학교밖 청소년들이 아무래도 이런 일탈 등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취업문제가 시급해요. 이걸 우리가 맡은 거죠. 이 프로그램이 평가도 매우 좋았고, 저희들의 보람도 컸죠. 처음엔 좌절감에 눈도 못 마주치고 하던 애들이, 와서 자기가 나아갈 방향을 잡고, 다시금 의지를 갖는 모습을 보고 정말 보람있게 생각했어요. 이 일은 노동부에서도 성공사례로 꼽혀서 작년에 50명 했던 것을 올해는 80명으로 늘렸어요. 우선 진로 탐색을 하고, 두 번째는 그 분야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고, 마지막으로 취업을 알아봅니다. 이러한 3단계를 거치는 일인데, 정말 뜻깊은 일이었죠. 인생의 새출발이잖아요. 새출발을 하려면 새 마음이 나야 하는데, 그 프로그램에서 그걸 많이 도와준 것 같아 뿌듯해요.
문. 일찍이 유아교육도 하셨고, 청소년 관련업도 하셨는데, 북대에서는 북한학을 전공하셨잖아요. 이것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일과 관련이 있어서 시작하신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으셨나요?
답.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원불교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네요. 원불교는 95년밖에 안된 신생 종교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어떤 일을 하면 다 창조에요(웃음). 그래서 유아교육 분야가 중요하다고 하는 법문이 나왔을 때, 이쪽 관련 일을 해야겠다 싶어 유아교육 공부를 했던 것이구요. 일제시대에는 개성 등 북한에도 원불교 교단이 있었어요. 아까 말한 대로 인류는 다 한가지인데, 동서와 남북으로 다 한가족인데 우리는 갈라져 있잖아요. 그래서 통일 사업을 우리가 앞장서서 해야 되겠다고 해서 다시 관련된 법문이 나왔죠. 그 법문의 요지가, 이제 반공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이었어요. 반공이 결국 승공으로 변하고 멸공으로까지 가지 않았어요? 이래선 안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다음에 나온 법문이 ‘화공(和共)’입니다. 공산 국가와도 ‘和’해야 한다. 그리고 결국 ‘구공(求共)’까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삼동과도 연관되는 것이죠. 그런데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해서 우선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죠.
그렇게 들어간 북대에서는, 공부도 공부지만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탈북자분들께 북한이 남한보다 나은 점을 많이 여쭤보곤 했어요. 상대적으로 남한은 북한에 비해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지 않아요? 이렇듯 서로 알아가고 반성하는 것들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문. 원불교 교무로서, 북한과 관련된 일도 하시는지요.
답. 원불교가 이번에 100주년을 5년 앞두고 있습니다. 이번에 남북교류, 지원사업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름이 ‘모려회(慕麗: 고려를 그리워함)’입니다. 처음 만들 때에 제가 부회장을 했고요.
문. 다른 활동 이야기도 부탁드립니다.
답. 나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요? (웃음)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께서 서거하셨을 때, 각 종교별로 의식진행을 했잖아요. 내가 거기서 의식진행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한번 나가니까, 온갖 군데에서 전화가 다 오더라고요. 초등학교 동창부터 시작해서...(웃음)
문. 일반 남한 청소년 프로그램하고, 탈북 청소년 프로그램하고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답.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습니다. 원래 우리가 하고 있던 프로그램을 탈북 청소년들한테 적용시켰을 뿐이에요. 그런데 탈북청소년들에게 접촉할 때, 원불교라고 하니까 연계를 잘 안하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한겨레 학교를 갔죠. 거기서 연극 동아리를 꾸려서, 공연도 하고 그랬죠. 그런데 이 탈북 청소년들하고 남한 청소년들하고 붙여놓으니까, 금세 하나가 되더라고요. 역시 아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라요. 내가 지금 아직 석사논문을 못쓰고 있는데(웃음), 주제가 남북 전래놀이에요. 전래놀이면 분단 이전이니까 남북이 같았을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조사연구를 해보려 했는데, 가능하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못쓰고 있는데, 남북경제교류뿐만 아니라 남북 청소년들이 많이 만나서 고유 전래놀이 등을 하면서 놀면, 그걸 보는 어른들도 예전 생각을 하고 그럴 것 같아요. 그렇게 동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하게도 이우영 교수님께서 예전에 북한 갔다 오시다가 전래놀이 책을 한 권 사주시기도 했습니다. 봤더니, 북은 제기차기가 굉장히 발달이 되어 있어요. 정말 다양하고 난이도 있는 제기차기를 하더라구요.(웃음)
문. 그럼 선생님께서는 남북을 포함해서, 앞으로 우리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답. 애들한테 가르칠 것은 없다고 봐요. 어른들을 가르쳐야지...(웃음) 이 땅에는 아직도 색깔론 이런 것들이 통하잖아요? 참 오래도 갑니다. 그런 것들이...
문. 그러면 지금의 어른들은 어렸을 때 무엇을 잘못했길래 계속 그럴까요? (웃음)
답. 교육을 잘못 받은 거죠.(웃음)
문.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남북 화합에 장애가 되는 주된 요인들은 무엇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답. 우리가 그들에게 접근을 못하는 것은 문제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있다고 봐요. 상호주의 이야기를 하는데, 상호주의는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진정성이 있어야 되는데, 알게 모르게 두뇌 속에 있는 의식들이 사람을 대하는 데에 큰 장애가 되는 것 같아요.
문. 지금은 북한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은 따로 이곳에 없나요?
답. 예. 없지요. 대신 다문화 프로그램으로 있지요.
문. 요새 다문화 연구가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논쟁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문화론에 근거해서, 예컨대 이주 노동자들이나 탈북자들을 동급으로 놓고 연구를 한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는 모두가 한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사해동포 사상이죠. 우리는 모두 우주의 하나의 큰 모태를 타고난 것이죠. 그래서 다 한가족입니다. 피부색깔, 종 이런 것들 상관없이 다 같은 형제의식을 가지고 접근을 해야지, 비교연구를 한다던지 하는 것에 일단 저는 부정적입니다. 남과 북의 틀을 넘어서, 더 크게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아울러 또 제가 정말 이해 못하는 것이 있어요. 북이 왜 주적인가요? 편협한 생각이죠. 가까운 형제끼리... 국가보안법이니, 이적행위니 하는 것들은 정말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봐요. 아무리 봐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만 같아요. 철학이 있는 정치를 해야 하는데, 안타깝죠. 큰 상처 때문에 분단이 고착화되고 있으니까요. 우리 마음 속에도 의식화라는 휴전선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농사를 열심히 지어서 품종개량을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웃음)
문. 어렸을 적부터 원불교 교무가 꿈이셨던 건가요?
답. 예. 그런데 저는 기독교의 모태신앙 같은 거에요. 원불교가 지금 95년이 되었는데, 아버지가 6.25 때 원불교 교전 때문에 살아나셨어요. 교전은 기독교의 성경 같은 것입니다. 전쟁 때 인민군들이 내려와서, 부역자들 처형을 많이 했어요. 당시 전사자보다 처형자가 더 많았다고들 하잖아요? 그때가 1951년인데, 아버님께서 원불교 신앙을 가지고 계셨고, 끌려가실 때에 염송집이라 해서 작은 기도문 같은 것을 지니고 계셨대요. 그런데 인민군들이 그 책을 보더니, 자기들끼리 쑥덕쑥덕하더래요. 그러더니만, ‘이런 책 보는 사람이 나쁜 짓은 안했셌구만.’ 해서 혼자 풀려나셨대요. 나머지는 더 처형당했는데... 그 이후로 아버님께서, 원불교 때문에 새 생을 얻었다고 하셔서, 살림을 정리해서 원불교 신자 양성 기숙사에 가서 학생들 밥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 제가 태어났어요. 저뿐만 아니라, 제 형님도 원불교 때문에 너희가 태어났으니, 너희는 다 출가해라, 교무 되라 하셨죠. 내가 7남매 중 넷째인데, 그렇게 결국 교무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한참 일하다가, 유아교육도 공부하고, 또북한대학원대학교까지 오게 된 것이죠.
문. 스님이나 목사님처럼, 말씀을 전하는 일들은 많이 하셨나요?
답. 많이 했죠. 교당에서... 서울에만 80개 정도 되는 교당이 있습니다..
문. 생각해보니, 제가 다니던 대학교의 역 앞에도 원불교 교당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답. 예. 우리 아들도 지금 그 학교를 다닌답니다.(웃음)
문. 주로 언제 예배를 보나요?
답. 일요일날 주로 보고요...창원 같은 곳은 월요일날 저녁 법회를 합니다. 구별로 조금씩 다릅니다.
문.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인데요, 탈북자들의 탈북 이후부터 정착과정에 있어서 기독교가 상당 부분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에 따른 부작용도 생겨나는 것 같은데요, 이런 부분은 혹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 부작용은 어디에나 있어요. 원불교도 예외는 아니겠죠. 100% 완벽한 일은 없습니다. 일을 진행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그러한 부분이 생겨날 수 있는데, 채워나가야지요. 원광대학교의 경우, 그곳은 기독교 동아리가 원불교 동아리의 10배는 됩니다.(웃음) 우리는 아까 말한 삼동처럼, 종교 자체의 구분은 없어요.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수행이 못 미치는 것이지, 성현들의 가르침은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원불교도 4대 종교에 포함되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견제가 들어옵니다(웃음). 아무튼 성현의 가르침은 다 같아요. 하지만 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실수도 나오고 미비한 점도 나오는 것이겠죠. 기독교의 경우, 아무래도 기독교가 많은 사업을 하니까, 그중에 부정적인 사례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겠죠. 큰 틀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문. 우문에 현답을 주신 것 같습니다.(웃음)
답. 아, 그리고 원불교는 조물주를 따로 상정하지 않습니다. 너의 조물주는 너다, 나의 조물주는 나다. 그리고 책임도 나에게 있다... 이런 것이죠. 저는 나약한 인간들이 원망할 대상을 찾으려고, 유일신을 만들어 내었다고 생각해요.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이 잇잖아요? 그런데 제가 볼 땐, 하늘은 무심해야 해요. 그래야 공평합니다. 미운 놈 따로 예쁜 놈 따로있으면, 그건 하느님이 아니죠. 무심이 원래의 모양이라고 봅니다.
문. 하늘은 무심하셔야 하는군요(웃음)
답. 그렇죠. 그래야 공평하죠. 죄 지은 사람한테 죄 주고, 복 짓는 사람에게 복 주고... 그래야 무소불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지요. 그러려면 무심하셔야 해요. 종교가 역기능도 많이 있잖아요? 그것은 성현들의 가르침의 본위가 왜곡될 때에 그러한 역기능이 생겨나는 것이거든요. 십자군도 그렇고... 어느 곳이고, 어느 때고, 성현의 말씀에 가까워진 분들은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십니다. 지금 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성현이 문제가 아니라, 그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신도들의 잘못이죠. 세상에 사이비종교는 없습니다. 사이비신자가 있을 뿐이죠.
문. 아까 잠깐 언급하신, 다음 인터뷰이는 어떤 분이신지요?
답. 대전에 계시는 정완숙 선생님이에요, 석사 7기입니다. 내가 8기잖아요. 부회장을 했는데, 이분은 7기 부회장입니다. 내가 전주에서 다닐 때인데, 정완숙 부회장하고 나하고 같이 오티 갔을 적에 부부관계냐고 했지요. 왜그러냐 하면 둘다 부회장이니까 부-부관계지요(웃음). 지금도 통일포럼 관련해서 계속 열심히 활동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메일이 계속 와요.(웃음)
문. 대전이면...에고, 큰일났습니다. 릴레이 인터뷰의 첫 위기입니다.(웃음)
답. 서울 사는 사람이 대전 정도는 갈 수 있어요...(웃음) 서울도 가끔 오시니까, 연락을 해보세요. 통일 포럼 진행하고 있으니까, 그분 하시는 일을 소개하면 후배들한테 정말 좋을 겁니다.
문. 함께 전하실 질문은 무엇인가요?
답. 북한대학원대학교 출신 중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세요(웃음)
문. 정말 좋은 질문인 것 같습니다.(웃음)
답. 그럼 다음 사람도 자연스럽게 추천이 되겠죠.
문. 앞으로 하고 싶으신 일이 있으시다면요?
답. 퇴임하고 싶어요(웃음)
문. 퇴임하면 아무 일도 안하실 건가요?(웃음)
답. 퇴임하면, 유아교육 관련 일을 더 하고 싶습니다.
문.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닌가요?
답. 손이 많이 가니까 재밌죠. 아이들에게 가장 안전한 놀이터가 어른 몸이거든요. 흔히 유야교육을 잘하는 민족으로 유태인을 꼽는데, 나는 한국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면 곤지곤지, 잼잼, 도리도리 이런거 하잖아요? 이런 것들이 유아 발달 단계에 딱 맞춘 프로그램입니다. 유아 아래를 영아라고 하잖아요. 떡애기...한국은 이런 영아 교육 프로그램까지 세세하게 다 있어요.
문. 떡애기요?
답. 예. 떡애기라 합니다. 전라도 방언이에요. 0세에서 1,5세까지의 영아를 그렇게 불러요. 떡처럼 엎어져 있는...(웃음)
문. 아, 재밌는 말이네요.
답. 그렇죠. 우리 나라는 이런 영아 프로그램도 상세하게 다 있단 말입니다. 다른 나라에는 이런 게 없어요. 우리가 이런 부분은 아주 잘 되어 있지요.
문. 아까 잠깐 언급이 되었던 것 같은데요, 윤기종 선생님의 질문이 북한 청소년의 미래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조금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답. 다시 통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네요. 날 새기 전에 가장 깜깜하다고 하잖아요? 음의 시대에서 양의 시대로 가기 직전의 깜깜함, 답답함... 저는 지금이 이런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어느날 자고 일어나면 통일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큰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의 어둠은 잠깐일 겁니다. 정치든 종교든, 결국 두루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 아니에요?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 사람이 희망이죠. 특히 청소년들은 가장 소중한 존재이고, 내일의 희망입니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그렇다고 쉬지도 말고, 차근차근 연계하면 그날은 온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문. 또 하나의 공식 질문입니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북한대학원대학교 원우분들께 하시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가요?
답. 열심히들 하시길 바래요.(웃음) 통일과 관련된 마인드를 가지는 후배님들이 계속 나오는 것만 봐도 희망이라고 봅니다. 북한학과 많이 늘어나지 않았나요?
문. 없어지고 있습니다...(웃음)
답. 그런가요? (웃음) 아까 말한 대로, 잠시 잠깐일 거에요. 늘 통일을 위해서 힘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꽃샘추위 뒤에는 봄이 올겁니다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춘하추동이니까요.
문. 이제 저희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의 꿈이나 소망을 말씀해 주세요.
답. 제 소망은, 내 생애에 통일이 되어서, 금강산도 육로로 가보고 싶네요...아까도 말했지만 언제나 깜깜해지면 그것 때문에 밝아지는 부분이 있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이명박 정부도 나름 역할을 하는 것이겠죠.(웃음) 원불교의 원기 100년이 딱 제 환갑 때에요. 5년 넘었는데, 가서 환갑잔치 하면 좋겠네요.(웃음)
문. 오늘 이곳 수련관도 구경시켜 주시고, 좋은 말씀도 많이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선생님 하시는 일들 다 잘되길 기원하겠습니다.
답. 예. 저도 즐거웠어요. 이 릴레이 인터뷰가 북대인의 소중한 의사소통의 매개가 되었으면 합니다. 후배님들도 오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취재가 끝난 뒤, 양해관 선생님께서는 취재팀에게 점심과 커피를 대접해 주시면서 다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인터뷰에서 늘 강조하셨듯이, 선생님께서는 지금의 어둠이 지나가면 곧 해가 뜰 것이라는 희망을 일관되게 말씀하셨다. 그 희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자, 또한 사람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앞당겨질수도 있는 것이기에 더욱 매력적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되듯이, 여럿이 같이 품는 희망 역시 언젠가는 거대한 역사로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대와 희망을 깊이 간직한 채, 취재팀은 다시 북대로 향했다.
취재일자: 2010년 3월 18일
취재: 석사 11기 박지영, 석사 12기 손정아, 석사 12기 권영승
정리: 석사 12기 권영승
첫댓글 그바보님의 신념과 열정 그리고 인간에 대한 헌신이 녹아 있는 인터뷰 기사입니다.... 북한대학원 홈페이지와 뉴스레터에 실려 있어서 퍼왔습니다..... 그바보님 같은 분 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와 이곳에서 이렇게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먼푸른별님을 비롯 우리 카페의 정신적 기둥이십니다.
이 카페에 와서 원불교의 대북 지원사업, 그리고 이미 잘 알려진 성공회의 민주화 과정의 역할 등
재 조명을 하면서 많이 깨닫습니다.
제가 우리 카페에 들어와서 출세했다는 생각이 듭니다.누가 까불면 너 기윤님 알어? 아님 너 그바보님 알어 그렇게 말할려구요^^파란님한테도 전화해서 나한테 고맙다고 하라고 인사받아야지^^
'쇳물농사' 그만 짓고 '사람농사' 짓는데 가서 교육좀 받아야 것네 그바보님 저좀 사람 좀 맹기러 줘유^^
이미 파워풀한 金成人이심시로^^
사진 이뿌게 나오셨습네다 ~ ㅎ 으쓱!
난... 왜 ... 실물보다 사진이 훨씬 못 나오는지 몰라?
훌륭하십니다..사람이 희망인 세상이 되려면 사람 농사를 잘 짓는게 우선일 겝니다...안그렇습니까???
멋있습니다!!
인물도 훤~ 하니 훈남이십니다!! ^^
좋은 일을 많이 하시네요 . 우리말로 표현 못할 것이 없군요.
그바보님, 사람농사에 대가이신것 같은데,, 먼저 로윈님 사람 맹길어 주는것 보고나서 저도 맡기도록 하겟슴다.^^
길기에 나중에 보려고 남겨놓았다가 오늘 정독했습니다.
자연스런운 미소가 좋았구요. 진심이 담긴 인터뷰라서 마음에 남습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그바보님만 같으면 얼마나 좋으리오..
차분히 기다리다보면 통일도 되고 밝은 날도 오리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