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의 체험을 묘사하기보다 어떻게 정신세계가 사람안에 들어있는 정신기관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지 입증하고자 했다(루돌프 슈타이너 자서전, 2018, 191)."
필자가 슈타이너를 공부하게 된 계기는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을, 아이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와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한 질문때문이었다. 현재까지 슈타이너를 공부한 결과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다른데 있다고 생각된다. 15세기 이전에는 인간의 본성을 육체, 영혼, 정신이라는 생각을 암묵적으로 하였다. 이런 바탕에서 15세기 이후 인류는 인간의 본성에서 정신을 뺐다. 육체, 영혼, 혹은 육체, 정신으로 영혼과 정신을 모호하게 합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서 정신이 사라지자 정신의 기능도, 역할도 사라지게 되었다. 예컨대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과 교육의 덕목, 근면, 성실, 사랑, 인내 등은 모두 정신이다. 이런 덕목이 인간에게서 사라진 것이다.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제는 학교에서도 정신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는다. 정신은 다만 지식으로 부유할 뿐이다. 물론 이 상황이 인간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 자아의식이 발달하기 위한 반드시 필요한 순서일 수도 있다. 15세기 이전 인간의 의식은 지금과 같은 깨어있는 의식이 아니라, 꿈꾸는 의식, 마치 꿈을 꾸듯이 흐릿한 의식상태였다. 이러한 의식은 개별 자아의식이 아니고 집단의식이다. 여기에서 현재 인간 개개인의 의식, 개개인의 자아의식으로 발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정신'을 발달시키는 것이 인간 의식의 진화라고 슈타이너는 주장한다. 이 말은 현재의 개별 자아의식에서 정신, 성실 등등의 의식이 발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현재 자신의 의식을 발달시켜야 한다. 이러한 개별 자아의식을 어떻게 발달시키는가가 질문이다. 이것을 생각하게 된 겻 역시 필자가 경험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러 합창단에서 노래를 배웠다. 그리하여 다양한 지휘자 선생님을 만났다. 이번에 만난 지휘자선생님은 굉장히 재미가 있다. 지휘를 하실때면 음악에 몰입, 온 몸으로 지휘를 하신다. 물론 지휘자 선생님이 음악의 정서를 파악했기 때문인데, 이렇게 온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누구나 갖지 못하는 지휘자 선생님만의 재능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말하는 재능은 배워서 얻는 재능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지휘자 선생님의 이런 재능이 왜 더(?) 발달하지 않았을까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지휘자 선생님이 열심히 가르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필자가 보기에 지휘자 선생님은 가르치는데 열정이 없다. 선생님이 열정이 없을 경우, 언뜻 생각하면 학생들이 손해를 볼 것같지만 그렇지 않다. 가르치는 선생님의 능력이 늘지 않는다. 가르치는 그 상황이 가르치는 사람믜 정신기관을 발달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지휘자 선생님은 가르치는데 열정을 내지 않을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짐작하기에 지휘자 선생님이 음악을 배울 때도 열정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가지 핑게를 댔을 것이고, 그 핑게는 늘 다양하게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추워서, 또 어제 피곤해서, 또 지금 배가 고파서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때 그 이유를 충족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나오는 그 핑게를 충족시키기는 거의 어렵다. 여기에서 정신이 등장한다. 만약 이런 자신의 상황을 파악했다면, 정신의 진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정신이 보이지 않으므로 그 상황에서 그렇게 씨이클을 돈 것이다. 이것이 그 자리에서 뱅뱅 맴을 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현재 자신의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신의 상황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위 문장을 쓴 이유이다. 필자 역시 이제까지 필자의 체험을 묘사하는데 초점을 마추었다면, 이제는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정신기관을 통해 드러나는 그 모습에 초점을 마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이렇게 자신의 정신기관의 상태대로 따라가지만, 만약 자신의 정신기관이 드러내는 그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달라진다. 물론 인류가 정신을 배제했기 때문에 더 어려울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에서 정신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이다. 그래서 언제나 스스로 자신의 정신을 파악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신기관이 드러내는 그 상황을 살펴보자. 일단 그러한 핑게는 아스트랄체의 상태이지만, 아스트랄체가 그러한 상태가 된 이유이다. 인간의 자아는 잠을 깸과 동시에 상속에 들어간다. 상속에 들어간 자아는 자신이 생각(사고)하는 대로 받아 들인다. 예컨대 사실은 나를 위하는 일인데도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힘들고 귀찮다는 생각을 하면, 상속에 들어간 자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기는 해야하는데, 하기는 싫고 핑게를 대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기는 해야 한다는 생각'은 본래의 자아가 한다. 무의식에서 이런 생각이 올라오지만,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이런 생각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통상은 그냥 무시한다, 그래서 '이렇게 해주면 하겠다'라고 그래서 핑게를 대는 것이다. 이때 그 생각의 고리를 끊어 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핑게를 대는 경우는 주위의 양육자가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또는 간섭을 해서 통상 일어난다고 보면 맞다. 그러면 아이는 양육자에게 응석을 부리게 되고, 양육자에게 기대므로 스스로 자립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때 양육자가 모범을 보이거나 단호하게 지켜보아야 아이가 그런 핑게를 대지 않는다. 이것이 법륜스님이 하신 말씀, 아이는 그저 옆에서 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간섭을 하면 아이가 상속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립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아이를 지켜보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요컨대 이렇게 아이가 핑게를 대는 것은 아이의 성향이 그럴수도 있고, 주위의 상황을 아이가 모방했을 수도 있다. 아마 두 가지가 다 포함될 것이다. 결과는 아이의 아스트랄체에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계속 핑게를 대는 상황이 이어질 것이고, 이는 아이의 에테르체에 습관으로 각인이 된다. 에테르체의 습관은 육체를 그렇게 움직이고, 육체가 그렇게 오래 움직이면, 육체에 병이 들게 되는 것이 통상이다.
정신 과학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아스트랄체에 그런 성향이 자리잡으면 ,그렇게 핑게를 댈 때마다 에테르체에 습관으로 고정되고, 이것이 뇌에 인지되어서 육체가 그렇게 변한다는 것이다. 짐작하기에 그런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런 성향을 바꾸지 못한 것이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의지를 냈더라면 자신의 습관을 바꿀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런 부분을 개선할 계기를 무수히 만난다. '왜 그럴까'. '아! 내가 핑게를 대는구나라고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바꾸지 못했을까'. 그 이유 역시 필자가 경험했다. 먼저 말하면 자신을 보지 않고 상대를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많은 경우 상대방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한다. 아마도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간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필자의 업이다. 다음이 이에 관한 필자의 경험이다. 필자가 핸드폰 번호를 인터넷으로 변경을 했다. 그런데 개통이 안되어서 핸드폰 대리점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판매원으로 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현재 요금에서 만원을 더 낮추어주는 핸드폰으로 교체를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꾸었는데 집에 와서 핸드폰을 조금 사용해 보니 화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아팠고, 또 소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도 귀도 아팠다. 그래서 다음 날 핸드폰을 취소하고 예전 핸드폰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하니 안된다고 하기에, 필자가 핸드폰 개통의 문제점을 들었다.
첫째 계약서를 쓰지 않고 확인서에만 싸인을 했고 또 판매자가 한 거짓말을 에로 들었다. 핸드폰이 저가핸드폰으로 나왔는데 이를 말하지 않았고, 또 출시연도도 속였다. 하지만 철회되지 않아서 핸드폰 가격을 모두 물어주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가 이를 학습비로 생각하고 핸드폰요금을 깍아주는 카드를 발급받고자 핸드폰 가게를 다시 방문하였다. 그런데 거기에서 판매자가, 필자가 민원을 제기헸다고 몰아부치는 것이었다. 필자는 억울해서 다시 114에 민원을 제기했고 답변을 받았는데 114 민원 담당자도 판매자의 문제를 오히려 덮어주는 서로 서로 카르텔을 형성하고 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불현듯 깨달았다. 그렇게 서로 서로 카르텔을 형성해서 민원인보다는 판매자의 입장을 대변해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되었다고 좋아하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자신의 정신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상대를 보면은 자신의 문제점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상대를 자신의 의도대로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문제를 보지 못하므로 자신의 문제를 더 키우게 되는 결과가 된다. 자신을 안 보고 상대를 보므로 자신의 정신에 관해서는 탐구를 하지 못하기 떄문이다. 큰 눈으로 보면은 이것의 문제가 오히려 더 크다. 지휘자 선생님을 봐도 알 수가 있다. 지휘자 선생님도 상대를 보고 핑게를 대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문제를 보지 못했다. 이때 핑게를 대는 자신을 보았다면 고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당시는 판매자 포함,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의 정신이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업, 습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만약 자신을 봤다면 '아! 내가 핑게를 대는구나'하고 파악한다. '모든 것이 내 탓이오'하라는 말이, 내 탓이오하면, 내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라는 말이다. 물론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것 역시도 자신을 보아야만 파악하는 것이다. '상대로 부터 어려움을 겪는구나'라고 생각하면 그 이유도 역시 파악해야 한다. 필자 역시 상대를 보지 않고 나를 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정신기관이 하는 일이다. 인간에게는 이런 상황을 인지할 수있는 정신기관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정신기관을 발달시켜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지구에 온 이유가 아닐까도 생각한다.
만약 지휘자 선생님이 핑게를 대는 자신을 보았다면 자신의 정신을 지금보다는 더 발달시켰을 것이다. 요컨대 핑게를 대지 않았다면, 자신이 가진 재능을 훨씬 더 발달시켰다. 마찬가지로 판매자도 자신을 보았다면 자신이 하는 일(삶)에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이것이 자신에게 훨씬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사항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더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