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에서 단숨에 국상에 임명된 인물은 누구일까?
을파소
고구려 9대 고국천왕은 놀랍게도 농부였던 을파소를 하루아침에 고구려 최고의 벼슬인 국상의 직위에 임명한다. 국가 체계가 확고하며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고구려에서 이와 같은 파격적인 인재 등용은 놀라운 일이다. 을파소가 국상으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국천왕이 왕비족 출신부족인 연나부의 반란을 진압한 뒤,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를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고국천왕의 고민
고국천왕의 아버지 신대왕은 연나부 명림답부가 7대 차대왕을 몰아내고 추대한 임금이었다. 따라서 신대왕 재위기간 동안 명림답부를 중심으로 한 연나부의 권력이 커져갔다. 따라서 고구천왕의 부인도 연나부 출신 우씨였다. 오늘날의 장관직인 중외대부 관직을 차지한 연나부의 패자 즉 부족장인 어비류와 평자라는 관직을 가진 좌가려는 왕후의 친척으로 큰 권력을 가졌다. 그들의 자식들 또한 권력을 믿고 교만하여 남의 자녀와 밭과 집을 함부로 빼앗는 만행을 저질렀다.
고국천왕은 이들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으므로, 그들을 벌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좌가려 등은 연나부에 속한 4개의 부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도리어 수도를 공격해왔다. 서기 191년 왕은 수도에 있는 군사들을 동원해 겨우 이들을 제압했다.
이때 고국천왕은 연나부의 권력 독점을 막고, 새로운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절감했다. 그래서 연나부를 제외한 4개 부족에게 현명한 인물을 추천하라고 명을 내렸다. 처음 신하들이 추천한 인물은 안유였다. 그런데 안유는 자신에게 높은 관직을 맡아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자신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을파소를 천거했다.
농민에서 단숨에 국상이 된 을파소
고국천왕은 오직 안유의 말을 믿고 을파소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한낮 농부였던 을파소에게 중외대부라는 높은 관직을 주었다. 하지만 을파소는 진정 정치를 바로잡자면 중외대부라는 직책으로는 불가함을 알고 스스로 물러나고자 했다. 고국천왕은 이 관직을 거절하는 을파소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를 고구려 최고 관직인 국상에 임명해 마음껏 정치를 하게 해주었다.
신하들은 을파소를 비난하고, 그의 명에 따르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믿고, 신하들에게 을파소를 따르라고 다시금 명을 내렸다. 고국천왕의 굳건한 믿음을 바탕으로 을파소는 교육제도의 개편, 부정부패 방지, 인재 선발 활성화, 진대법을 비롯한 경제정책 개혁 등을 통해 정치를 바로잡아 고구려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특히 진대법은 가난한 백성들이 봄철 춘궁기에 굶주리는 것을 막고자, 나라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돌려받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농민들에게 절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이후 여러 나라에서 이 제도를 본받기도 했다. 을파소는 고구려의 국상으로 좋은 정치를 베풀다가 207년에 죽었다.
뛰어난 인재를 알아보고 그를 끝까지 믿어준 고국천왕, 자신보다 능력 있는 인재에게 스스로 양보한 안유, 그리고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가 오자 최선을 다해 많은 업적을 남긴 을파소. 이들이 있었기에 고구려는 더욱 큰 나라로 발전할 수가 있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