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왕실과 거듭해서 혼인을 하던 왕비족은?
연나부
고대의 결혼, 특히 왕실의 결혼은 오늘날의 결혼의 의미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초기 고구려는 5부족이 연합한 나라였다. 그런데 왕실인 계루부 다음가는 강한 부족은 왕비를 계속 배출하여 계루부와 함께 정치를 이끌어 갔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서 5부족 가운데 왕실과 왕비족 2부와 다른 부 사이에 힘의 차별화가 커져갔다.
고구려의 왕비족
고구려 초기에 왕비족은 비류나부였다. 비류국 송양왕은 2대 유리명왕과 3대 대무신왕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그의 비류나부는 왕실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다. 하지만 비류나부는 왕비족의 지위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고 이후 고구려의 가장 두드러진 왕비족은 연나부였다.
연나부 출신 명림답부는 7대 차대왕이 비류나부, 환나부, 관나부의 지지를 받아 정치를 하는 것에 반감을 갖고, 그를 몰아내고 신대왕을 왕으로 모신다. 신대왕은 당연히 명림답부를 최고 관직인 국상에 임명하고 그가 속한 연나부를 정치적 동반자로 삼는다. 이때부터 연나부는 계루부와 함께 고구려를 좌우하는 가장 강한 세력이 되었다. 왕실은 연나부의 협조를 얻어야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왕실은 연나부에서 왕비를 택해 결속을 다졌다.
9대 고국천왕과 10대 산상왕의 왕후는 연나부 우씨였다. 12대 중천왕의 부인은 연나부출신 연씨였고, 13대 서천왕의 부인도 우씨였다. 11대 동천왕의 왕후도 연나부 출신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는 명림답부 외에도 명림어수 등이 신하들 가운데 최고 직위인 국상을 맡았다. 8대 신대왕뿐만 아니라 10대 산상왕은 연나부의 도움을 왕이 된 바 있다. 따라서 연나부 부족장인 대가는 고추가의 칭호를 더해 고추대가로 불리며 다른 부족장과는 차별화 되었고, 그 힘이 왕실에 버금갔다.
왕비족의 의의
신라도 김씨가 왕, 박씨가 왕비를 계속 배출한 시기도 있었다. 요나라의 경우도 왕실은 야율씨, 왕비는 대대로 소씨에서 나왔다. 이 처럼 특정한 부족이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왕실과 함께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왕실이 강해지거나, 다른 부족이 차츰 강해지게 되면 특정한 부족이 왕비를 독점하여 배출할 수 없게 된다.
2∼3세기에 등장하는 왕비족인 연나부의 존재는 고구려 정치발전의 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초기에 5부족 연합체 출발해 차츰 왕실과 왕비족이 권력을 장악하였다가, 14대 봉상왕과 15대 미천왕의 시기를 거치면서 왕비족이 약해지고 왕실의 권한이 강해진다. 왕실이 강해진 바탕위에 17대 소수림왕이 율령을 반포하여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가 완성하게 된다. 고구려 왕비족의 존재는 고구려 정치 변화의 한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 번이나 왕후가 되었던 우씨 왕후
우씨가 2대에 걸쳐 왕후가 된 사건은 고구려 역사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본래 9대 고국천왕의 왕후였던 그녀가 10대 산상왕의 왕후로 다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2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당시 고구려의 정치적 상황이다.
우씨는 명림답부를 배출한 연나부의 귀족 우소의 딸이다. 그녀는 왕실에 버금가는 강력한 연나부의 힘을 바탕으로 왕후가 되어 권력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친척들인 좌가려와 어비류 등이 왕후의 권력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 이 사건 이후 그녀는 힘을 잃어버리고, 궁궐에서 조용히 살아야 했다.
그런데 고국천왕이 갑작스럽게 죽었다. 우씨 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따라서 다음 왕위는 왕의 동생인 발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발기는 고구려 5부 가운데 하나인 소노부(비류나부)와 가까운 사이였다. 따라서 발기가 왕이 되면, 우씨 왕후와 그녀의 연나부는 더욱 힘을 잃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이때 우씨 왕후는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라고 명령하고, 그날 밤 몰래 발기의 집을 찾아갔다. 발기가 왕이 되도록 도울 터이니, 자신과 연나부를 잘 부탁한다는 협상을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발기는 아직 고국천왕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고, 자신이 곧 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왕후를 차갑게 대하고 말았다. 우씨 왕후는 다시 발기의 동생인 연우를 찾아갔다. 연우는 왕후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고,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연우의 집에서 하루 밤을 머문 그녀는 다음날 아침 연우와 함께 궁궐로 돌아와 고국천왕의 죽음의 알림과 동시에, 왕의 유언이라며 연우를 다음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발기는 우씨 왕후가 연우가 짜고 자신에게 돌아올 왕위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비류나부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연나부와 함께 연우가 왕성을 지키자, 발기는 더욱 분노하여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씨에게 군사를 빌려 수도를 향해 쳐들어왔다. 하지만 백성들은 적의 군사까지 빌려온 발기를 외면했고, 결국 발기는 싸움에 패하여 죽고 말았다.
형사취수제
연우는 자신을 산상왕으로 만들어준 우씨 왕후와 결혼하여 그녀를 왕후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씨 왕후는 본래 산상왕의 큰 형수였다. 만약 조선시대라면 결코 우씨왕후와 산상왕은 결혼할 수가 없다. 하지만 고구려는 형사취수제라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2대에 걸쳐 왕후가 될 수 있는 2번째 이유였다. 형사취수제란 형이 죽으면 형수를 시동생이 아내로 맞이하는 것으로, 흉노와 부여에도 있었던 풍습이다. 전쟁이 많은 사회에서 남자가 죽어 살기가 어려워진 여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존재했던 이 풍습이 고구려에서도 있었기 때문에, 우씨왕후가 시동생인 산상왕과 다시 결혼하여 2대에 걸쳐 왕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빠른 판단과 결단으로, 연나부는 고구려의 왕비족의 지위를 계속 누릴 수 있었다. 그녀는 연나부의 부족장이었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당찬 여성이었다.
tip 고구려 시대 여성들의 지위는 어떠했을까?
고구려 시대에는 여성인 유화부인이 부여신으로 섬겨지기도 했다. 유화부인은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와 마찬가지로, 고생을 하면서도 아들 추모에게 지혜를 전해주어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 큰 힘이 된 사람이다. 태조대왕의 어머니인 부여태후는 모본왕을 몰아내는 쿠데타의 주역으로, 남편을 제치고 아들을 대신해 수렴첨정을 하면서 실질적인 여왕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평강공주는 부친의 명을 어기고 자신의 의지에 의해 온달을 남편으로 선택하였고, 우씨왕후 역시 스스로 남편을 골라 2대에 걸쳐 왕후가 되었다. 부여태후와 우씨왕후와는 부족장이기도 했다.
장천1호분 벽화에는 여성들이 수레를 타고 외출을 나와서 남자와 자유롭게 만나고 연애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고구려 후기에는 여성들이 남자와 만나 자유롭게 결혼을 할 수도 있었다. 또한 여성들도 남성과 똑같이 재산을 갖고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와 달리 여성들은 축제에 나가 밤을 새워 남성들과 함께 춤추고 술 마시며 즐길 수가 있었다.
고구려와 같은 전쟁이 많은 사회에서 젊은 남성들의 사망률이 높다. 따라서 가정을 지키고, 자식을 교육하고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여성들은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성들은 어려서는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왕실과 귀족의 여자들은 가정교사를 두고 각종 생활의 지혜와 함께 여러 분야의 학문을 배웠다. 여성들은 15세면 성인으로 대접받았는데, 이때부터 ‘정녀’라고 불린다. 정녀는 국가에 세금도 내고, 노동력도 제공해야 했다. 봉상왕은 15세 이상의 남녀로 하여금 궁궐을 쌓는 일에 동원하기도 했다. 여성들은 밭농사 등과 함께, 길쌈을 짜며 남성 못지않은 경제활동을 해야 했다.
식생활과 관련하여 부엌에서 불을 지피고, 그릇을 정리하고, 음식을 조리하여 나르는 일을 물론, 물 긷는 일은 대부분 여성의 몫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된장 간장을 준비하고, 술 등 저장 식품을 만들고, 빨래를 하는 등 여성들은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60세가 되어야만, 겨우 세금과 노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오래 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구려에도 일부다처제가 존재했고, 남성이 여성보다 더 우대받는 사회였다. 그렇지만 남녀 차별이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남녀 차별은 우리 전통 사고방식이 아니다. 여성의 생식 능력은 존중받았고, 여성은 때로는 신으로도 섬겨졌다. 많은 전쟁은 여자들로 하여금 강한 생존력을 갖게 하였다. 삼국시대는 각국이 서로 발전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던 상황인 만큼, 여성의 힘이 필요했으므로 여성을 굳이 차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에서 여성의 역할이 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