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전체의 도덕적 질은 의식되지 않은 상태로 체험됩니다. 그리고 그 체험으로 부터 일종의 정신적-영혼적 본질이 형성되는데 이 본질은 지상에 사는 동안 그 사람의 존재 가운데 의식되지 않은 영역에서 자라납니다(철학 우주론 종교, 2018, 110)."
필자는 살면서 항상 궁금했던 것이, 필자 포함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 전혀 표시가 나지 않는 이유, 그 까닭이었다. 겉으로 표시가 전혀 나지 않는 이유가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물론 그렇게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자신도 모르고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알면서도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둘 다 포함해서 만약 자신이 거짓말을 할 경우 자신은 알 것이고, 또 상대방도 시간이 흐르면 파악을 한다. 그렇지만 두 경우 모두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뭘까? 이것이 질문이다.
먼저 말하면 위 문장, '사람 전체의 도덕적 질은 의식되지 않은 상태로 체험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도덕적 질은 의식되지 않고 체험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체험을 파악(성찰)하지 않으면 자신의 도덕적 질 역시 발달시키기 어렵다. 요컨대 나는 나의 도덕적 질을 의식하지 못하므로, 내가 거짓말을 하는 수준인지, 상대방을 나의 이익에 부합되게 하는 정도인지를 파악하지 못한다. 결과 나는 나의 도덕적 질에 따라서 행동을 할 것이고,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도덕적 질에 따라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체험할 때 자신의 도덕적 질을 파악해야 다시 반성을 해서 자신의 도덕적 질을 높여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자신의 체험을 파악할려면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지 말고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통상은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이롭게 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집중하기는 어려울 것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도덕적인 체험으로 형성된 도덕적 질이 나의 영혼의 본질이다. 나의 영혼의 본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려면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서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체험되는 것이 나의 정신의 본성이고 정신의 속성 또한 이렇게 체험되어서 형성되므로 자신을 성찰하는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체험되는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영혼의 본질이 인간의 영혼이 활동을 하는 바탕이다. 이를 정신과학의 구성요소로 말하면 아스트랄체이다. 아스트랄체는 이렇게 체험을 통하여 인간의 정신기관을 발달시킨다. 예컨대 체험하는 것,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고, 말하고, 또 꽃을 위해서 행동하는 그 체험이 아스트랄체인 것이다.
다음은 아스트랄체가 인간의 정신기관을 발달시키는 상황, 과정이다. 인간의 정신과학적 요소는 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자아이다. 에테르체는 인간이 생명을 영위하도록 해주고, 이러한 생명 과정에서 남은 에테르체가 인간이 얻는 -사고를 통한- 지혜의 근원지이다. 이런 지혜를 인간이 에테르체를 통하여 직접 얻는 것이 아니라,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얻는다.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영혼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그 과정이 지혜를 얻는 과정이다. 영혼 작업은 느끼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서 인간이 에테르체의 지헤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요컨대 에테르체의 기류에 자아가 합류하면 에테르체가 거울로 비춘 상을 자아는 만난다. 그 상에, 아스트랄체의 정서를 통해서 영혼의 작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 과정이 지혜를 얻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아스트랄체의 상황, 나의 아스트랄체가 정신의 속성에 맞는 그 정도에 따라서 에테르체의 정보를 가져온다고 생각하면 맞다. 정신의 속성의 가장 근본인 '모든 존재가 나와 같은 존재이다'에서 어느 정도 부합하느냐가 관건이고, 이것이 곧 나의 영혼의 본질인 것이다. 영혼은 내가 활동하는 모든 상황에서 그 일을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의 본질이 어느 수준인가. 즉 나의 아스트랄체의 수준에 따라서 나의 삶이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다.
다음은 여담으로 정신기관의 발달로, 물질을 통해서 정신을 파악하는 예이다. 필자는 문화센터에서 라인댄스를 배우는데, 아직 초보이다. 그런데 라인댄스를 하는 중간에 한 곡이 끝나면 회원들이 가끔 박수를 치는 경우가 있다. 곡에 몰입해서 저절로 박수를 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자주 치게 되면 긴장이 풀어져서 힘이 빠지게 된다. 요즘같이 더운 날 힘이 빠지면 더 지치는데, 여기서 문제는 회원들이 지치므로 강사선생님 힘이 더 든다는 것이다. 강사선생님이 힘을 내서 뛰어야 회원들이 그나마 뛰기 때문이다. 강사 선생님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필자가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구체적인 상황이다. 박수를 치는 첫 날에는 다 같이 웃었지만,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누군가 계속 박수를 치자 필자는 슬며시 짜증이 났다. 물론 수강생들은 계속 웃었다. 이 더운 날 박수를 치면 힘이 더 빠지는 것을 모르는지 짜증이 난 것이다. 그래서 그 수강생에게 수업이 끝난 후에 수업 중간에 '박수를 치지 말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그 수강생이 '수업 중에 예전에도 박수를 쳤다'고 하였다. 그러면 '수업이 끝나고 박수를 치라'고 필자가 또 말을 했다. 하지만 그 수강생은 필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얼굴에 짜증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박수를 치면 긴장이 풀어지고 힘이 빠져서 더 지치는 줄을 모르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해줘도 그 수강생은 모를 듯 하여서 해 줘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지혜가 있어야 삶을 살아가는데 용기, 의지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기관이 발달해서 얻는 지식, 지혜이다.
여기에서 아스트랄체의 중요함, 두 번째가 이어졌다. 나의 아스트랄체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아스트랄페는 어떤 상황인가, 살펴보니 용기가 없고 현 상황의 타성에 젖어 머물고 있었다. 참 한심하였다. 그래서 의지를 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렇게 아스트랄체의 상황을 파악하면 현 상황을 변화시킬 수가 있다. 대부분 자신의 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므로 현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뭔가 그 정신을 꺠우는 존재(?)가 필요하다. 먼저 말하면 선생님의 권위이다. 여기에서 선생님을 모든 존재라고 해도 된다, 그럴려면 모든 존재를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 전제가 되어야 한다.
다음은 선생님이 용기, 의지를 깨우는 존재인 이유이다. 용기, 의지는 정신인데, 본래 내게 있지만 정신의 속성에 맞아야 비로소 발현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렇게 말을 한 근본적인 동기는 강사선생님의 힘든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난 후 강사선생님의 옷이 땀에 흠뻑 젖은 것을 본 것이다. 이런 강사선생님을 보았다고 해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데에 핵심이 있다. 강사 선생님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한 데에서 용기, 의지가 발현된 것이다. 물론 드러난 정도는 씨앗이어서 그 씨앗을 물을 주어서 키워야 한다. 하지만 씨앗이 발현되지 않으면 자라지도 못하는 것이다. 요컨대 강사 선생님을 나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씨앗이 발현되었다. 이것이 정신의 근본 전제인 '모든 존재는 나와 같다'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정신은 그 속성에 맞아야 정신이 전달되고 전달도 받는다.
특히 인간의 발달단계에서 초등 시기 교육은 특히 더 그렇고, 다른 경우에도 같다. 이것이 선생님의 역할이다. 즉 아이들이 선생님의 권위를 존중해야 자신에게 있는 정신, 씨앗을 얻는다. 따라서 선생님의 권위가 선생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씨앗을 받았지만, 이 씨앗은 스스로 자신이 키워야 한다. 이것도 자신이 노력을 해야 하지만, 선생님을 존경해야 노력을 하는 에너지를 얻는다. 물론 초등시기가 지난 성인인 경우, 21세 이후는 자아가 탄생했기 때문에 스스로 자아를 통해서 노력을 할 수는 있다.
여기에서 자아가 노력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질문'이다. 즉 '왜 그럴까'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현실 삶에서 상속에 내재한 자아 아닌 본래자아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있다. 내가 굉장히 궁금해서 '왜 그럴까'하고 물으면 상속에 내재한 자아에게 전달될까? 본래자아에게 전달될까? 여기에서 상속에 내재한 자아는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볼 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정말 궁금해서 물으면 본래자아에게 전달된다. 문제는 그렇게 '내가 궁금한가'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간절하게 물어라'하는 것이다. 되풀이 하지만 정신이 어려운 것은 이와 같이 드러나지 않고 체험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질문을 해야 자아가 대답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대상을 이해하고 그에 몰입해 있는 한 자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아는 오직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을 때에만 모습을 드러냅니다(인간, 혼, 영에 관한 지혜, 2023, 138)." 슈타이너가 말한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을 때에만 자아가 전면에 드러난다. 그래서 '왜 그럴까'하면은 자아가 그 답을 들려주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좋은 생각이 필요하다면,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하되 다음 날 하루밤을 자고 이튿날 그 문제를 다시 보라고 하는 이유이다. 그러면 자아의 대답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결론은 정신의 속성이 의식되지 않고 체험되기 떄문에 우리가 자신의 정신을 파악하지 못한다. 나아가 정신의 질, 도덕적 질을 발달시키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자신의 정신은 언제나 존재해서 나를 이끌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정신의 속성을 파악해서 자신의 정신을 발달시켜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