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25) 동행, 바람에 깎여 얻게 된 깊이 - ① 결혼이란 게 다 그렇습니다/ 시인, 한양대 교수 정재찬
동행, 바람에 깎여 얻게 된 깊이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beamysmag/ 사랑이란
① 결혼이란 게 다 그렇습니다
20세기 지성계의 대표로 꼽히는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시몬 보부아르와 계약결혼을 합니다.
세 살 차이의 두 사람은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수자격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에 만나
각기 수석과 차석으로 합격을 했죠.
사르트르가 그녀에게 제안한 계약결혼 조건은 아주 간단합니다.
첫째,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지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허락한다.
둘째,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다.
셋째, 서로에게 경제적으로 독립한다.
간단하긴 한데, 지키기가 영 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위기도 수차례 있었습니다.
사르트르는 여성편력이 심했고, 보부아르도 다른 이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이들은 50년이 넘도록 계약을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일부일처제의 제약에 매이지 않으면서 자유롭고 평등한 부부관계를 추구한 이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나자,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 내 인생 최고의 성공은 사르트르를 만난 것이다. 그는 나와 닮았고 나보다 완전하다.”
이런 계약결혼에 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선뜻 아무나 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는 다들 동의할 것입니다.
비독점 다자 연애 계약을 결혼이라 할 수 있을까.
거기에다 두 사람의 계약에는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전제와 합의가 깔려 있습니다.
이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다음 시를 읽는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부부란 여름날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은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 보는 사이이다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문정희, 〈부부〉, 《다산의 처녀》(민음사, 2010)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둘째 치고,
여러분조차 “나는 이렇게 살지는 말아야지 했던 것들만 어쩜 이렇게 집약해놓았을까?” 하는
표정을 지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나 저희 선배 세대들도 젊을 때는 딱 그랬단 말입니다.
저희도 나름대로는 낭만적이고 지성적이고 세련된 결혼 생활을 꿈꾸는 앳된 신혼부부로 출발한 사람들이랍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제는 비록 배꼽을 내미는 정도는 아니지만,
연애할 때만큼 사랑스럽지 않다는 데에는 동의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기준에서 보면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사랑이 무화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화가 된 것이 아니라 풍화(風化)된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겪어오며 새긴 암각화(巖刻畵)인 겁니다.
겉으로 화려하게 도드라지지 못하고 그저 안으로 안으로만 새긴 암각화에 불과하지만,
그러기에 손에 쥔 것도 별로 없어 내세울 것도 없어 보이지만,
바람에 깎여 얻게 된 사랑의 깊이 덕택에 풀꽃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 채 서로를 애틋하고
애잔하게 바라볼 수는 있게 된 겁니다.
살다 보면 나한테 남은 게 뭐가 있나 싶다가도,
상대방을 돌아보면 저 사람도 남은 것 하나 없어 보여 그만 쓸쓸히 손을 쥐었다 펴보는 것.
“내가 어쩌다 저 사람하고 살았지?”가 아니라, “저 사람 어쩌다가 나랑 살았지?” 하며 고맙고 미안해지는 것,
그게 오래된 부부의 사랑법인 것이지요.
그러기에 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어린 새끼들’ 때문이라고 자식 핑계를 대지만,
이를 두고 굳이 또 우리가 애 낳으려고 결혼하느냐며 나무라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봄철의 꽃더러 가을에 열매 맺으려고 요다지도 예쁘게 치장했느냐고 나무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살다보면 가끔은, 솔직히, 내가 왜 저 사람하고 결혼했지 하며 후회를 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면서 슬쩍 다른 사람도 상상해보거나, 아니면 혼자 사는 인생도 그려보곤 하겠지요.
그런데요, 자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자식을 상상해보거나, 자식 없이 사는 인생이 그려지지는 않는답니다.
그러기에 부부끼리 “어휴, 저 자식 때문에 산다” 하는 말을 신세 한탄이나 비난이 아니라,
서로 듣기 좋은 지청구로 구사하게도 되는 것이지요.
부부의 애정이란 그렇게 풍화되어 가며 유장해집니다.
어린 새끼들을 바라보며 무언가에 묶여 있음이 참 좋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쇠사슬일지, 거미줄일지 모르지만 “이 나이 들어서 누군가와 묶여 있다는 것,
그건 꽤 괜찮은 관계야”라고 이 시는 말하고 있습니다.
비독점 다자연애와 무자식의 자유보다 이 쇠사슬이나 거미줄 같은 구속이 낫다고 말입니다.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정재찬, 인플루엔셜, 2020)’에서 옮겨 적음. (2022. 5.13.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25) 동행, 바람에 깎여 얻게 된 깊이 - ① 결혼이란 게 다 그렇습니다/ 시인, 한양대 교수 정재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