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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문학 계보
70일간 유럽여행을 마치고, 후회되는 점들이 많았다. 그 후회되는 것 중하나가 ‘좀 더 유럽에 대하여 잘 알고 가서면 좋았을 것’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유럽여행을 정리도 하고, 또한 유럽을 여행하시는 분들에게 손쉽게 유럽을 알아볼 수 있도록 유럽에 관한 기본이 되는 정보를 정리해 보기로 하였다.
여러 생각 중에 내가 알았으며 좋았을 것 같은 것을 항목으로 정했다. 이것이 “유럽의 자연·역사·문화- 건축·미술·음악·문학 그리고 실제 유럽을 여행 할 때의 이동수단(비행기, 열차, 배, 렌트카)과 숙소, 입장(료) 예약 등의 유럽 여행정보”에 대한 것이다.
-유럽 문학 계보 편의 목차-
(1) 르네상스(14~16세기)
① 단테(1265~1321, 이탈리아) ② 보카치오(1313~1375, 이탈리아)
③ 몽테뉴(1533~1592, 프랑스) ④ 토마스 모어(1478~1535, 영국)
⑤ 셰익스피어(1564~1616, 영국) ⑥ 밀튼(1609~1674, 영국)
⑦ 세르반테스(1547~1616, 스페인)
(2) 고전주의(17세기)
① 코르네유 (1606-1684: 프랑스) ② 괴테 (1749~1832: 독일)
(3) 낭만주의(18~19초)
① 슈레겔 형제 (1772~1829: 독일) ② 노발리스(1772~1801: 독일)
③ 위고(1802~1885: 프랑스) ④ 바이런 (1788~1824: 영국)
⑤ 존 키츠 (1795~1821: 영국) ⑥ 안데르센 (1805~1875: 덴마크)
(4) 사실주의(19세기)
① 발자크(1799~1850: 프랑스) ② 플로베르 (1821~1880: 프랑스)
③ 푸시킨 (1799~1837: 러시아)
(5) 자연주의(19세기 말)
① 졸라 (1840~1902: 프랑스) ② 모파상 (1850~1893: 프랑스)
③ 도스토옙스키 (1821~1881: 러시아)
(6) 상징주의(19세기 말~20세기 초)
① 보들레르 (1821~1867, 프랑스) ② 앙드레 지드(1869~1951: 프랑스)
(7) 신낭만주의(20세기 초)
① 호프만스탈 (1874~1929: 오스트리아) ② 릴케 (1875~1926: 오스트리아)
(8) 표현주의(20세기 초반 이후)
① 엘리엇 (1888~1965: 미국계 영국 시인)
② 조이스 (1882~1941: 아일랜드의 더블린)
(9) 실존주의(20세기 중반 이후)
① 하이데거 (1889~1976: 독일) ② 키에르케고어 (1813~1855: 덴마크)
③ 카를 야스퍼스 (1883~1969: 독일) ④ 장폴 사르트 (1905~1980: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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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오덴세 안데르센 하우스 옆 연극 공연 무대
덴마크 코펜하겐 시청사앞 동화의 아버지 안데르센 동상
(1) 르네상스 시대 (14~16세기)
스페인 마드리드 스페인 광장- 세르반테스와 돈기호테 상
14~16세기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의 대변혁을 말한다. 당시 중세에서 근대로 바뀌려는 시대로서 봉건제도와 기독교의 지배에 대하여 자유와 인간성을 구하려는 정신적 운동이다. 그리스·로마의 고대를 부흥시키려는 형태로 일러난 것이다.
르네상스 문학의 대표작가
① 단테 (1265~1321: 이탈리아)
단테는 1265년 이탈리아의 중부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르네상스의 도래를 알린 인물이며, 중세적, 그리스트교의 지평을 벗어나지는 못한 마지막 증인이다.
그는 세계 4대 시성의 한 사람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신곡>이라는 장시이다. 그는 9세 때에 베아트리체라는 아름다운 소녀를 사랑하였으며, 소녀가 죽은 후에도 그를 잊지 못하다가 그의 작품 <신곡>에서 살아나게 했다.
<신곡>은 단테가 베르질리우스에 이끌리어 지옥에 가고, 다음은 지옥보다는 고통이 덜한 연옥을 지나, 끝으로 베아트리체에게 안내되어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이다. 크리스트교의 깊은 신앙이 나타나 있고, 그 생생한 묘사가 근세 문학을 낳게 하였다. 그래서 단테를 ‘르네상스 문학의 선구자’라고 한다.
② 보카치오 (1313~1375: 이탈리아)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표현한 근대인이다. 근대소설인 <데카메론>은 사회상과 교회 성직자의 위선을 그대로 고발했다.
그는 단테, 페트라르카와 함께 14세기의 이탈리아 최고의 문학가라 불린다. 유명한 <데카메론>이 씌어진 것은 1350년경이다. 이것은 10명의 남녀가 모여 하루에 한 차례씩 10일 동안에 100가지 이야기를 한 것을 모은 형식으로 씌어졌다. 이 작품으로 그는 세계 소설의 어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③ 미셀 에켐 드 몽테뉴 (1533~1592: 프랑스)
그는 프랑스 철학자, 사상가, 수필가이다. 몽테뉴라는 마을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한 후, 보르도 법원에서 법관을 지냈다. 그 후 1571년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1580년 유명한<수상록>을 완성시켰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거짓 없는 모습을 그렸다. 그와 같은 인간의 연구가이며, 관찰가를 프랑스 문학사에서는 모럴리스트(인간 연구가)라 부르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모럴리스트 문학의 토대를 쌓았을 뿐만 아니라 수필 문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④ 토마스 모어 (1478~1535: 영국)
성 토마스 모어는 잉글랜드 왕가의 법률가, 저술가, 사상가, 정치가이자 로마 가톡릭 교회의 성인이다. 유토피아: u(no)+topia(place)는 한마디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의미이다. 그는 산업혁명이 태동하는 시점에 영국에서 일어난 변화, 특히 인클로저 운동으로 수많은 농민들이 쫓겨나 빈민으로 몰락하는 상황을 보면서 영국사회를 비판하기 위해서<유토피아>를 썼다. 유토피아는 그의 상상력을 통하여 만들어진 이상적인 국가를 상정한 것이다.
⑤ 셰익스피어 (1564~1616: 영국)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극작가이며 시인이다. 그는 16세기 후반의 전환기 시대의 인물이다. 즉 봉건체제에서 근대국가 체제로의 전이되며,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와 유럽 열강으로 편입되고, 상업주의 부상되며, 다양한 문화산업의 번성 등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사회변동 양상을 선구자적으로 재현한 점이다. 그의 명작들은 이러한 시대 배경으로 씌어졌다.
그의 창작활동은 1590년부터 1611년까지로 국한되며, 대개 4시를 나뉜다.
1기는 1590~1595년에 이르는 습작 수련의 시기로 옛 작가의 모방과 자신의 것을 찾기 위한 모색의 과정이다. 걸작 <로미오와 줄리에트>가 1기의 작품으로서, 서정과 낭만성이 신인만 갖는 청신함과 함께 곁들여져 있다.
2기는 1600년 까지다. 인간적 관찰의 눈이 뚜렷해지고 기법이 숙련되어 당시의 극단에서 뛰어난 존재가 되었다. 이 시기의 그의 희극은 낭만적 희극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한여름 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은 이 때의 작품으로, 화려한 낭만이 따뜻한 해학에 감싸여 아름다운 언어로써 독특한 세계를 형성한다. 또한, 이 시기에 사극의 걸작이 나와 <리처어드 2세> <헨리 4세> 등이 있으며, 특히 <줄리어스 시이저>는 로마 사극의 첫 작품으로써 비극의 색채가 짙다.
3기는 이른바 비극의 시대로 1601~1660년에 이르며, <햄릿> <리어 왕> <오델로> <맥베드>의 4대 비극이 발표되었다. 그 몸서리칠 정도로 심각함과 비극으로써의 장대함은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다. 이 시기에 씌어진 희극조차도 끝은 행복한 결과로 맺어졌으니, 매우 음울하여 앞의 시기의 작품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마지막 4기는 1610년을 전후한 짧은 기간에 발표한 작품들은 <겨울밤의 이야기> <푹풍> 등으로, 원래 비극이어야 할 이야기가 그의 체험과 화해의 심정으로 말미암아 행복한 결과로 맺어졌으므로 보통 로맨스라 불린다. <푹풍>은 마지막으로 창작 활동을 마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은퇴 생활을 하다가 1616년 4월 23일에 일생을 마쳤다.
비평가 카알라일은 “영국 식민지 인디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할 정도를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었다. 엘리자베드 여왕 시대의 문학을 영도한 최고의 문인이다.
⑥ 존 밀튼 (1609~1674: 영국)
밀튼의 서사시 실낙원은 17세기 정신세계를 집약한 근세 문화의 정화이며, 기독교 성격의 서사시이다. 43세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실락원, 1667년 출간>은 그 무렵의 작품이다. 이 작품의 내용은 뱀으로 변장한 사탄의 유혹에 의해 타락한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다. 즉 신에게 거역하다가 지옥에 떨어진 악마가 신에게 보복하려고, 에덴동산에 들어가 인간이 죄를 짓기 만들었으나, 신은 예수 크리스트를 보내어 인간의 죄를 보상하게 한다는 줄거리다.
이와 같이 실낙원은 인간의 원죄를 주제로 하면서 청교도 정신에 입각하여 근대 문화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었다. 영국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로 꼽히는 명작으로 손꼽힌다. 그 뒤 밀튼은 인간의 마음속에 낙원이 회복되는 과정을 묘사한 서사시<복낙원>을 출간하여 <실낙원>과 짝을 맞추었다.
실낙원이 에덴에서 쫓겨남으로서 불행한 결말로 끝나는 비극이라면, 복낙원은 예수가 사탄을 물리침으로써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희극이다. 복낙원은 유혹하는 사탄과 이를 물리치는 예수의 격렬한 논쟁을 통하여, 메시아의 등장과 낙원의 회복을 알리는 지적 서사로 이루어진 이 작품을 통해 밀턴은 결국 구원의 길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음을 시사하고 있다.
⑦ 세르반테스 (1547~1616: 스페인)
<돈키호테>는 중세 후기 봉건제도의 몰락과 기사의 위선을 풍자한 작품이다. <돈키호테>는 1부(1605)과 2부(1615)로 되어 있는데, 2부가 완성되었을 때 세계적인 대작가로 인정받았다.
돈키호테는 근대소설의 시발점이다. 왜냐면 돈키호테가 나오기 전의 문학은 주인공이 하나같이 왕이나 귀족이였다. 돈키호테에는 659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창녀, 깡패, 도독놈, 죄수, 사기꾼, 마술사 등이 등장하고 있다. 왕과 귀족의 전유물인 소설이 범위를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넓힌 결과가 되었다. 소설의 형태를 대화체로 바꾼 것도 획기적인 면이다.
(2) 고전주의 (17세기)
독일 프랑크푸르트 카이저의 괴테동상
고전주의는 르네상스 이후 17~18세기에 프랑스에서 생겨난 문예사조이다. 16세기 이후 프랑스에서는 종교개혁과 함께 봉건적 지배 질서가 해체되고 전통적 가치관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사회를 극도로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점차 ‘질서’를 열망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고전주의’다.
고전주의는 이러한 사회적 영향 아래 일반적, 보편주의의 문학을 추구하면서 가장 큰 특징은 ‘이성’이다. 모든 문학작품은 감정적이거나 개성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고전주의의 기본 바탕이다. 따라서 문학에서 묘사하고 있는 세계도 진실하고 선해야하며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롭고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조화와 완성과 통제와 형식이 특징이다.
시대적으로는 영국의 엘리자베스조,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대,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 시대가 전성기였다. 대표적인 작가는 영국의 셰익스피어, 프랑스의 꼬르네이유, 도이치의 괴테 등이다.
고전주의 문학의 대표작가
① 피에르 코르네유 (1606-1684: 프랑스)
라신 ․ 몰리에르르와 함께 프랑스 고전파 3대 극작가의 한 사람으로, 고전 비극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의 4대 비극작품은 <오라스, 1640>,<시나, 1640>,<포리왹트, 1642> <르 시드, 1636>이다. 그 중 “르 시드”는 프랑스 고전비극의 걸작으로 꼽히다. 1636년 “르 시드”의 공연을 계기로 유명해졌다. <르 시드>는 에스파니아의 전설적인 영웅의 의무감과 사랑과의 싸움을 그린 것이다.
즉 ‘르시드’는 사랑과 명예의 갈등을 그린 운문극이다. 이 작품이 고전 비극의 개념을 결정지을 정도의 작품이 된 이유는 앞으로의 연극 방향이 보여줄 요소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의지만이 자기 운명을 결정한다는 비극적 영웅의 철칙을 보여준다. ‘르 시드’는 인간의 넋 속에서 일어나는 정념과 의지와의 투쟁을 다루는데, 여기에 비극의 본질이 들어가 있다.
코르네르유의 극중인 물들은 영웅주의적 인간관을 보여준다. 평균적 인간들의 자연적인 욕구, 즉 생존자체 또는 행복에 대한 욕구를 희생시켜 명예, 영광 등 더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였다. 고대인이 숙명이라고 생각한 큰 불행의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인간의 내부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②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749~1832: 독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하우스 (괴테가 태어나고 살았던 집)
독일의 작가이자 극작가, 연극감독, 철학자, 과학자 시인이며, 한때에는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이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했다. 지금도 그 곳에는 괴테하우스로 보존 되어있다. 아버지는 법률가로 엄격한 성격이었으며, 시장(市長)의 딸인 어머니는 명랑한 성격이다.
1765년에 라이프치히대학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내다가, 1768년 각혈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생활을 하였다. 샤를 로테와의 비련(悲戀)을 겪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4>을 썼는데, 이 작품으로 일약 문단에서 이름을 떨쳤다. 이 작품은 삽시간에 전 세계를 자극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의 체험을 고백하는 작가로, 자기가 직접 겪은 것이 아니면 한 줄도 쓰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의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과 여인들이 그의 모든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
만년의 문학작품으로서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1829>와 <파우스트>의 완성이 최고봉을 이룬다. 전자는 당시의 시대와 사회를 묘사한 걸작이라 할 수 있으며, 후자는 한 인간의 생애가 전 인류의 역사에 뒤지지 않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엄한 드라마이다.
<파우스트>는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831년에야 완성된 생애의 대작이며, 세계문학 최대걸작의 하나이다. “파우스트: Faust”는 2부로 이루어진 희곡이다. 1부에서는 게르만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하여 파우스트 박사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 여러 가지 일들을 겪는 과정들이 들어 있고 2부에서는 서구문명 전통의 그리스적인 요소들을 이용하여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폭넓게 탐구하였다.
프랑크푸르트의 괴테하우스에 가면 3층에는 그가 태어난 곳, 4층은 괴테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집필된 곳이다. 그리고 괴테 갤러리 Room5에 가면 괴테가 사모했던 샤를 로테의 초상화가 전시되어있다. 그의 유해는 바이마르 대공가(大公家)의 묘지에 대공 및 실러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보다 많은 빛을...”이었다고 한다.
(3) 낭만주의 (18~19초)
덴마크 코펜하겐 인어공주 동상(안데르센 대표작 인어공주)
18~19세기 초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유럽 전체를 휠쓸인 사조이다. 고전주의에 대신하여 일어난 낭만주의는 개성을 존중하여 자유분망을 추구하고, 자연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형식타파를 주장하였다. 감정의 청신, 자유분망한 주관, 미묘한 정서, 끝없는 공상 등이 특징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능과 감정을 강조하고, 개별 민족의 과거와 전통을 중시, 이전의 합리적 이성의 가치를 강조하며, 개인의 의지와 정열을 경시하던 계몽주의와 고전주의에 반감으로 발현되었다. 작가로는 독일의 슈레겔 형제, 노발리스, 프랑스의 위고 영국의 바이론, 키츠, 러시아의 푸스킨 이다.
19세기 후반에 처음의 이념에서 벗어나 순전히 현실도피, 허무한 공상, 과거에의 추억 등에 떨어졌다. 그 반동으로 자연주의 사조를 낳게 되었다. 17세기 고전주의 문학은 귀족문학이라 한다면, 낭만주의는 시민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작가
① 슈레겔 형제 (1772~1829: 독일)
슈레겔 형제란 ‘카를 빌헬름 프리드리히 슈레겔, 1772~1829: 독일’과 친형 ‘아우구스트 빌헬름 슈레겔’을 말한다. 이들은 초기 낭만주의의 주요 인물이다.
18세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유행하는 기존의 가치관에 반발하면서 이성적, 감정적 경험에 만족할 만한 것에 근거하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성적, 감정적 경험의 일반적 공통 특징은 "자연으로 돌아가자 Return to Nature"였다. 이성주의자들은 자연을 이성의 궁극적 근원으로 존중한 데 비해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을 경계가 없고 거칠며 항상 변하는 것으로 숭배했다. 이들 모두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행위하는 한, 악은 사라질 것으로 믿었으며 욕구에 자유를 부여했다.
② 노발리스(1772~1801: 독일)
독일 시인으로 초기 낭만주의에 속한다. 귀족 집안에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나 병약하였다. 어머니에게서 경건한 신앙을 물려받은 섬세한 소질의 소유자였다. 1790년, 예나 대학에서 배웠으며 그 다음해에 슈레겔과 교류했다. 23세 때, 소피 폰 퀸이라는 13세의 소녀와 사귀어 약혼하였으나 그녀는 15세에 사망하였다. 노발리스의 몽상적인 시재(詩才)는 이 사랑과 죽음의 체험으로 심화되고, 그 소녀를 그리는 비통한 마음이 그의 일기와, 죽음과 밤을 찬미하고 영혼의 세계와 교감을 읊은〈밤의 찬가, 1797〉에 잘 나타나 있다. 6편으로 되어 있는 이 찬가는 소피와의 사별의 비통과 영원성의 확신, 재회의 희망을 서술하고 있다.
노발리스의 서정시에는 사랑하는 소피와의 체험이 그 근저에 깔려 있어 마술적인 관념의 세계를 계시하는 어구들은 깊고 암울한 환상과 신비한 죽음에의 동경으로 차 있다. 예술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이 융합된, 보다 높은 세계를 지향하는 노발리스의 시는 낭만주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파란 꽃〉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소설 그의 대표작 “하인리히 폰 오프테르딩겐”이 탄생하였다. 그 소재는 중세의 기사 시인이다. 1800년 가을부터 병이 악화되어 그 다음해 29세의 젊은 나이로 영면하였다.
③ 빅토르 마리 위고(1802~1885: 프랑스)
그는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이다. 1802년 2월 26일 프랑스의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의 여인이었다. 열 살 때 코르디에 기숙학교에 입학한 이래, 독서와 시 창작에 매료되었던 위고는 이듬해 그의 일기에 “나는 샤토브리앙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 라고 기록해 두면서, 불과 열한 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문호가 될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것이다.
이런 그에게 운명의 분수령이 된 것은 스무 살이 되던 1822년, 그의 첫 시집인 <송가>를 발간했을 때다. 위고는 여러 잡지에 문학평론을 싣기도 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간의 문학 논쟁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낭만주의 문학 이념의 초석을 다졌다. 2년 뒤 위고는 마침내 희곡 <크롬웰>의 서문 발표를 통해 고전주의 문학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서면서 낭만주의 작가들의 수령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20세에 처녀시집 <오드와 잡영집, 1822>을 간행하였다. 초기의 작품에는 왕당파적·가톨릭적인 색채가 농후하나 그 후 점차 자유주의 경향이 현저하게 되었다. 프랑스 문학사는 물론, 유럽 문학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대표작은 뮤지컬과 디즈니 애니메이션 등으로 널리 알려진 파리의 노트르담(일명 노틀담의 꼽추)이다. “노틀담의 꼽추”는 15세기를 무대로 한 소설로 약한 자에 대한 동정이 어려 있다. 이러한 문학 활동으로 스물세 살의 위고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작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최고의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는다.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 당시 반대파로 활동하여 국외로 추방되어 19년간 망명생활을 한 적이 있다. 이 망명생활은 결실이 풍부한 시기가 되었다. 소설 <레 미제라블, 1862>, <바다의 노동자, 1866>등 위고에 있어서 걸작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나왔다.
1870년 보불전쟁에 의한 나폴레옹 3세의 몰락과 함께 위고는 공화주의 옹호자로서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로 돌아왔다. 1876년과 1882년에는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루어 졌고, 시신은 프랑스 국립묘지인 팡테옹 지하 묘실에 루소, 볼테르 등과 함께 안치되어있다.
④ 바이런 (1788~1824: 영국)
아버지 존 바이런은 잘 생긴 귀족이었지만 방탕한 생활로 많은 빚을 지고 1791년 객사했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 어머니가 그를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으로 데려가, 1801년 해로 스쿨에 입학할 때까지 스코틀랜드에서 살았다. 안짱다리에 선천적으로 오른발을 절었다고 하는데 때문에 어린 시절 많은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각같이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 후에는 우울한을 달래기 위해 기괴한 퇴폐 생활로 보내다가, 에스파니아, 포르투갈, 그리스를 여행하며 시정을 얻고, 1811년에 귀국하였다. 1812년, 여행의 기록인 <차일드 하롤드의 순례> 1부, 2부를 출판하여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이름를 떨쳤다. 3부는 영국을 떠나 스위스에 이주한 1816년에 펴냈다.
이 시의 표현 특징은 솔직하고 대담한 언어를 구사한다. 숨 막히는 자연 풍경을 통해 자연으로 도피하려는 해럴드의 욕망 기저에 있는, 삶의 진부함과 복잡함을 강력한 언어로 표현했다. 바이런의 시선은 인간과 그를 둘러싼 사회다. 청춘의 정열,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 삶의 고뇌와 비애, 동경과 긍지, 희망과 절망에 대해 솔직하고 과감하게 토로한다.
그가 생각하는 시인이란 사랑은 물론 개인, 사회, 국가의 모든 문제를 있는 그대로 비판하고 책임감 있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유럽 사회의 제도와 활동, 가치, 사랑, 결혼, 심지어는 낭만주의 문학의 이상까지도 위선이라고 지적한다. 어쩌다 이런 냉소의 태도는 타고난 다리 장애, 불우한 가정환경, 뛰어난 외모로 인한 무절제한 여성 편력에서 오는 우울함이다. 이런 분위기는 “바이런적 영웅(Byronic hero)”이라는 독창적인 인물을 낳는다. 바이런적 영웅은 그의 시에 종종 나타나는 인물형이다. 차일드 해럴드와 돈 주안이 대표적이다. 우울하고 정열적이며 통렬하게 참회하면서도 후회 없이 죄를 저지르는 반인반신(半人半神)적인 주인공이다. 이들의 끝없이 저항하는 자세야 말로 바이런의 낭만성을 대변한다.
‘돈 주안’은 바이런의 죽음으로 미완으로 남은 16편의 서사 풍자시 ‘돈 주안’의 주인공이다. 에스파냐의 전설적인 인물 돈 후안이 모델이다.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폭로하고, 인간이 만들어 낸 온갖 도덕률을 모두 위선이라고 매도한다. 유럽 통치자들의 졸렬한 독재를 야유한다.
1823년 영국 국회의 승인을 받아 투르크에 대항하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며, 이듬해 열병에 걸린 후 현지 의사의 잘못된 처방으로 병이 더 심해져 결국 사망하였다. 사망 후 유해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하고자 했으나 사원에서 거부했고, 때문에 할 수 없이 바이런 집안의 납골당에 안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이런이 영국 낭만 시에 끼친 영향이 워낙 지대했기에, 1969년 바이런의 시가 조각된 기념비가 사원 내에 건립되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그를 투르크에 맞서 싸운 영국의 헌신적인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다고 한다.
⑤ 존 키츠 (1795~1821: 영국)
가장 나중에 태어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다. 1818년 장시 <엔디미 온>으로 데뷔하여, 아름다운 묘사와 이상미를 추구하였다. 셸리, 바이런과 함께 18세기 영국 낭만주의 전성기의 3대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하지만 2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생애 동안에 그의 시는 비평가들에게 높게 평가받지 못했지만, 그의 평판에 대한 영향력은 점점 커져서, 사후 많은 후대의 시인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테니슨과 오웬이 있다.
건강 악화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요양을 하면서, 로마의 스페인 광장 근처에 머물렀다. 1819년 ‘성 아그네스의 저녁’ ‘가을에’ ‘무정한 미인’ ‘라미아’ 등 대표적인 그의 송시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그는 건강의 악화로 패니 브론과의 결혼을 포기해야 했다. 실의에 빠진 존 키츠는 친구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1821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 로마의 묘지에 안치된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묘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름을 가진자 여기 잠들다" 라고 새겨져 있다.
⑥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1805~1875: 덴마크)
덴마크 오덴세 안데르센 하우스 공연장
안데르센은 덴마크의 오덴세에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 안데르센은 루터교회에서 세례 받을 때, 대부모(代父母)가 붙여준 이름이다. 안데르센의 집안은 할머니가 병원에서 청소부로 일할 정도로 가난하여, 안데르센의 성장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독실한 루터교회 신자인 어머니는 안데르센에게 기독교 신앙을 심어주었고, 아버지는 인형극과 독서를 통해 어린 그에게 상상력과 교양을 심어주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가장의 자리가 비게 되자 안데르센 소년은 어린나이에 공장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빨래를 대신해주는 일을 했다.
1819년에는 연극배우의 꿈을 품고 코펜하겐으로 갔으나, 탁한 목소리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서 국어 실력에 문제가 있어, 연극 배우의 꿈을 접어야 했다. 다행히 작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본 후원자에 의해 공부를 시작하여, 1828년 코펜하겐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몇 편의 희곡, 소설을 쓰면서 작가로서의 재능을 드러낸 안데르센은 <즉흥시인, 1834>으로 문학계의 호평을 받았다. 1835년부터 본격적인 동화 저작에 들어갔는데, 어른들도 읽을 정도로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그의 시와 이야기 등 15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여러 나라 어린이들을 기쁘게 했다. 그가 쓴 작품은 여러 영화, 연극, 발레, 애니메이션이 탄생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안데르센 문학은 안데르센이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이라는 것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성냥팔이 소녀>는 가난하게 자라서 구걸까지 해야 했던 안데르센의 어머니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또한 <눈의 여왕>은 어렸을 때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아버지가, 서리가 내리던 밤에 신경쇠약으로 죽자, 고아가 되었고 이를 '눈의 여왕'이 데려가는 것으로 생각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소재가 되었으며, <미운오리새끼>는 안데르센이 작가로 데뷔한 후에도, 그의 출신 때문에 홀대를 받은 상처가 문학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1855년, 자서전 <내 생애의 이야기>를 저술하였다. 이 작품은 특히 낭만주의를 기초로 하였는데, 동화 문학에 있어서는 그림 형제의 동화가 민화적 소박성을 지닌데 비하여, 예술적인 동화로서 정서적․감상적인 것을 썼다.
1872년까지 발표한 총 160여 편의 동화 작품은 모두 유명해져서 안데르센의 그림이 들어간 우표 발행이라는 영광을 누렸다. 62세 때 그는 고향 오덴세의 명예시민으로 받들어졌으며, 그가 1875년 7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 장례식에 덴마크 국왕과 왕비가 참석하였다. ‘근대 동화의 아버지’로 존경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그림 없는 그림책> <인어공주> <벌거벗은 임금님> <미운 오리새끼> <성냥팔이 소녀> 등이 있다.
(4) 사실주의 (19세기)
현실사회를 있는 그대로 묘사, 낭만주의의 비현실적인 경향에 대한 반성적인 실천으로 발현되었다. 현실주의 또는 리얼리즘이라고 한다. 객관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다소나마 충실하게 표현하려는 예술적인 경향이다. 그 후 비판적 리얼리즘은 서구에서는 자연주의로 바뀌고, 러시아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대체되었다. 사실주의는 현실의 본질을 표현하는데 있다.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가
①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 프랑스)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발자크는 쉰한 살이란 길지 않은 생애 동안 100여 편의 장편소설과 여러 편의 단편소설, 여섯 편의 희곡과 수많은 콩트를 써낸 정력적인 작가이다. 1799년 프랑스 르와르 강이 흐려는 루와르 지방 투르에서 태어난 발자크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했다. 자기보다 서른두 살이나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한 발자크의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알뜰한 애정이 없었다. 이러한 냉정한 모성은 발자크 소설의 주요한 모티브가 된다.
발자크는 본명으로 작품을 발표하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1830년 무렵부터 마지막 소설 <가난한 친척>을 발표한 1848년까지 20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100여 편의 소설을 남길 수 있었다. 프랑스 낭만주의가 꽃을 피운 시대에 사실주의의 문을 연 발자크는 1841년 그동안 자신이 써낸 모든 작품과 앞으로 써낼 작품의 목록을 가지고 <인간희극>이란 총서를 기획한다.
〈인간희극 La comédie humaine〉에서 프랑스 사회 전체를 백과사전처럼 자세히 묘사하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의 선구자로서 지적된다.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를 지닌 하나의 완전한 건축물을 꿈꾸었던 그는 뷔퐁의 박물학의 영향을 받아 여러 종의 동물들로 분화된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각자가 속한 활동 영역에 따라 여러 가지 전형적인 인간이 존재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등장인물만 2천여 명이 넘는 <인간희극>은 대혁명 직후부터 1848년 2월 혁명 직전까지 프랑스 사회의 파노라마를 정치, 경제, 사회적 영역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내밀한 사적 영역까지 넘나들면서, 또한 파리뿐만 아니라 지방과 시골까지 아우르면서 어느 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자 한 발자크적 야심의 산물이다. 비록 계획했던 작품들로 온전히 채워지진 못했지만 <인간희극>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역작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는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빚에 쫓기는 형편과는 별개로 스스로 ‘문학의 나폴레옹’이 되고자 했던 발자크는 글을 쓰기 위해 하루에 40잔 가까이 커피를 마신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런 극단적인 과도함은 그에게 돌이키기 힘든 심장질환을 안겨준다. 익명의 여성독자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된 한스카 부인을 향한 발자크의 한결같은 사랑은 그녀의 남편이 사망한 뒤에도 8년이나 기다린 끝에 가까스로 결실을 맺는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녀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는 단순한 사랑의 증표를 넘어 발자크 문학세계의 세세한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한스카 부인은 발자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발자크는 그녀와 결혼한 지 불과 5개월 만인 1850년 8월 18일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② 귀스타브 플로베르 (1821~1880: 프랑스)
플로베르는 1821년, 의사의 아들로 루앙에서 출생하였다. 10세쯤 되어서부터 소설·희곡 등을 쓰기 시작했으며, 파리 대학에 다니던 중 간질과 비슷한 증상의 발작을 한 후로 문학에 힘을 쏟았다. 1856년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 《보봐리 부인》은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프랑스 최고의 작가라는 칭찬을 받게 하였다. 그의 문학은 자유로운 공간과 자연의 감정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기분을 다분히 지니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사실주의 문학을 세워, 자연주의 문학의 길을 열었다. 의사인 아버지에게서 과학 정신을 이어받아, 사물의 올바른 모습을 묘사하려 하였다. 그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주의 정신을 대변하는 것이다.
③ 푸시킨 (1799~1837: 러시아)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에티오피아인 ‘아비시니아’ 흑인 귀족이었다. 그는 모계로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은 아브람 페드로비치 간니발 장군의 손녀였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푸시킨은 자신의 몸속에 에티오피아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유모로 부터 러시아어 읽기와 쓰기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담과 민요를 들었다. 또한 그는 유모를 통해서 러시아 민중의 삶에 대해 깊이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어렸을 때 유모 아리나가 들려준 러시아의 옛날이야기 및 설화가 그를 대시인으로 성공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가정교사로부터 배운 외국어 가운데 프랑스어에 가장 뛰어나 10세경에 이미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1831년 미모로 소문난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하였다. 나탈리야는 그보다 13년 연하의 여성으로 첫 남편과 사별한 상태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집을 마련하고 정착했다.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고 표트르 대제 치세의 역사를 쓰도록 위촉받았다. 1834년 황제의 시종보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그의 실력 보다는 부분적으로는 나탈리야가 궁정행사에 참석하기를 바란 황제의 속셈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이 기간 중 그의 아내 나탈리야와 황제 표트르 간의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1837년 그의 반역정신을 적대시하는 귀족들이 나탈리야가 부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날조된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푸시킨은 나탈리야가 바람을 피운다고 지목한 프랑스인 귀족과 부득이 결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비운의 죽음을 당했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는 1820년 완성한 최초의 장시 <루슬란과 루드밀라>를 발표하여 일약 유명 해졌다.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로서 문학의 온갖 장르에 걸쳐 그 재능을 발휘했다. 과거 100년간 러시아 시 분야에서 그의 간결하고 평이 명료한 시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시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산문에 있어서도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그에 의해 구축되었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사실주의자로 불리며, 러시아 문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렸고, 러시아의 문어를 확립하였다. 푸시킨은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위대한 국민 시인’ 등으로 불린다.
(5) 자연주의 (19세기말)
19세기 말에 낭만주의의 반동으로 일어난 문예사조이다. 자연과학의 발전을 배경으로 인간사회의 숨김없는 진실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려는 것이며, 그 특징이 객관적, 현실적, 사실적이기 때문에 자기주장을 잊어버리고 어디까지든지 진실을 묘사한 결과 우상이 파괴되고 현실의 암흑면이 폭로되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사조는 한편 근대적 산문문학을 발전시키는데 밑받침이 되었다. 그 출발은 1870년 프랑스의 졸라의 제창으로 시작하여 모파상, 러시아의 도스토에프스키 등 많은 작가를 내었다. 우리나라에는 1924년경 자연주의 문학이 무르익은 시기로 염상섭, 김동인, 현진건 등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작가
① 에밀 프랑수아 졸라 (1840~1902: 프랑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다. 파리에서 출생했으며, 처음에는 법률학에 뜻을 두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공부를 그만두고 출판사에 입사한 후 소설을 썼다. 1867년 첫 작품 <테레즈 라캥>으로 자연주의 작가로 인정을 받았다.
소설가도 단순한 관찰과 기록 자체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생리학의 성과를 다룸으로써 결론적으로 인간을 분석, 묘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작품에 제대로 적용한 것이 <루우공마카르 총서> 전 20권이다. 이것은 한가족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많은 사람들이, 유전이나 사회환경에 지배당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그 속에는 “나나” “목로주점” “대지” 등의 걸작이 들어 있다. 저서로 <자연주의 소설가><실험 소설론> 등이 있다. 1902년 방에 피워둔 난로 가스에 중독되어 사망했는데, 타살 의혹도 있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나는 졸라를 향한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고 극찬했다.
② 기 드 모파상 (1850~1893: 프랑스)
프랑스 자연주의의 대표 작가이다. 모파상은 노르망디의 미로메닐 출생이다. 아버지 귀스타브 드 모파상은 로렌 지방 가문 출신인데 18세기부터 노르망디 지방에 정착했다. 모파상의 부모는 계속되는 불화로 인해 1860년 헤어졌고, 모파상은 어머니, 동생과 함께 노르망디의 에트르타에서 자란다. 1868년 루앙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자주 플로베르의 집을 방문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플로베르는 모파상을 졸라, 위스망스, 도데 등 당대의 위대한 문인들에게 소개한다. 1869년부터 파리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1870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군에 지원·입대하였다. 전쟁 후에 심한 염전사상(厭戰思想)에 사로잡혔는데, 이것이 문학 지망의 결의를 굳히는 동기가 되었다.
1872년 아버지의 도움으로 해군성, 문부성에 취직, 생계를 유지하면서 어머니의 어릴 때부터의 친구인 귀스타브 프로베르에게서 직접 문학지도를 받았다. 1874년 프로베르의 소개로 에밀 졸라를 알게 되었고, 또 파리 교외에 있는 졸라의 저택에 자주 모여 문학을 논하던 당시의 젊은 문학가들과도 사귀었다.
모파상은 여기에 <비계 덩어리>를 실어 날카로운 인간관찰과 짜임새 등에서 어느 작품보다도 뛰어나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으며, 문단 데뷔를 확고히 하였다. 이 소설은 선량한 한 여자가 걸어가는 환멸의 일생을 염세주의적 필치로 그려 낸 작품으로서 그의 명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함께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이 낳은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모파상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단편에 나타나는 외설적인 묘사가 지나치게 자연주의적 경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톨스토이도 이 작품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모파상은 이미 27세경부터 신경질환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증세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불과 10년간의 문단생활에서 단편소설 약 300편, 기행문 3권, 시집 1권, 희곡 몇 편, 그리고 <죽음처럼 강하다, 1889년> <우리들의 마음, 1890년> <여자의 일생, 1883>등의 장편 소설과 <진주 목거리>등 단편을 썼다.
다작으로 인한 피로와 복잡한 여자관계로 지병인 신경질환이 더욱 악화되어 1892년 1월 2일 니스에서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파리 교외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정신 발작을 일으켜 이듬해 7월 6일 43세의 나이로 삶을 마쳤다. <비계 덩어리>를 발표하여 문단에 혜성같이 나타난 모파상의 작품은 되도록 주관을 배격하여 사실 그대로의 인생 모습을 허식 없이 간결한 문체를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었다.
③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1821~1881: 러시아)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 마린스키 자선 병원 의사인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와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사이에서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15살 때까지 생가에서 지냈다. 아버지 쪽이 귀족가문 출신이었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의사의 신분은 중인 계급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었으며 매우 엄격하고 거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자식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어머니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격으로 자녀들에게 천사 같은 존재였다.
1839년 6월 6일,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가 영지의 농노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는 도스토옙스키의 어머니가 죽은 후 영지로 내려가 생활했는데, 농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던 것이 죽음의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형제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 시기에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괴롭힌 간질 발작이 처음 나타났다고 한다.
1846년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로 비평가 벨린스키로부터 '제2의 고골리'라는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였다. 데뷔 전에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직접 작품을 건네받아 읽었던 네크라소프는 감동을 받은 나머지 밤중에 그의 집을 찾아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시베리아 유배 시절에 악화된 지병인 간질과 취미로 즐기던 도박 등이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작품 속에 중요한 요소들로 간질과 도박 등이 자주 등장한다. 도박은 그의 인생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고, 빚을 갚기 위해 출판사와 무리한 계약을 하여 마감에 쫓기는 나날을 보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죄와 벌>, <도박꾼> 등은 불러주는 대로 받아적는 구술필기의 형태로 작성되었다. 속기사였던 안나 스니트키나는 훗날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1866년 걸작 <죄와 벌>을 완성하였다.
1880년 그의 최후의 걸작인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탈고하였다. 그 즈음에는 이미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눈이 어두워져 있었고 도스토옙스키가 침대 누워 구술한 것을 아내 안나가 속기하여 작품을 완성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881년 1월 28일에 폐동맥 파열로 인하여 가족의 간호를 뒤로하고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임종 직전 아내에게 시베리아 형무소에 있었던 시절 지니고 있었던 성경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고 같은 날 밤 11시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죽었다. 유해는 같은 달 31일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사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 가운데 한 명으로 불리며 20세기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신흥 자본주의 압박 밑에서 신음하는 소시민층의 대변자인 동시에 열렬한 슬라브주의자였다. 그의 작품은 비단 문학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종교·사회 문제 등 각 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는 <죄와 벌, 1866년>, <카라마조프의 형제, 1879년~80년> 등이 있다. 진보적 사회 운동을 하다가 탄압받은 경험이 그의 문학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 (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당시 퍼지고 있던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식층의 폭력적인 혁명을 부정하고, 기독교, 특히 정교회 교리에 바탕을 둔 기독교 사상을 담고 있다. 그의 기독교 사상은 기독교의 교리와 사상을 변증하는 호교론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을 행한 기독교의 폭력을 비판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소시민층의 대변자인 동시에 열렬한 슬라브주의자이다.
(6) 상징주의 (19세기 말~20세기 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의 경향이다. 자연주의나 고답파의 시에 반대하여 일어난 경향이다. 주관을 강조하고, 감각이나 마음 그리고 느낌을 상징화하여 표현하는 것을 강조했다. 상징주의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 출발한다. 근대성을 보인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시집에서 보들레르는 자본주의의 온갖 죄악과 타락과 폭력을 연관시켜 제시하였다. 그리고 상징주의는 미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앙드레 지이드 <좁은문>등의 소설도 이 상징주의의 영향으로 생긴 것이다.
좁은 문에서 지이드는 인간은 종교적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지고하다고 믿는 이상을 각직 할 수 있으나, 그 이상에 너무 집착할 때는 행복은 커녕 불행과 비참을 차초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세속적 사실을 보여준다. 주인공 알리사는 하나님의 사랑도 제롬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무의미한 것임을 안다, 이 싸움에서 결국 정신적인 피로 끝에 그녀를 구속하고, 욕망을 자기희생의 실천으로 극복하려한 나머지 일체를 상실하고 만다.
상징주의 문학의 대표작가
①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1821~1867, 프랑스)
상징주의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 출발한다. 근대성을 보인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시집에서 인간의 어두운 면과 악한 면을 날카로운 눈으로 파헤쳐 노래하였고, 더렵고 보기 싫은 것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아내었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의 온갖 죄악과 타락과 폭력을 연관시켜 제시하였다. 이러한 것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충격적 선언을 담고 있는 이 시집은 근대 문명의 정화인 도시의 인공적 삶을 재현하여 인간의 약점과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 즉 도시는 죽음으로 제시되며 그 속에서 현실의 삶이 무기력과 쇠락의 분위기에 빠져있음이 환기되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산문적 형태를 시험하기도 하며 언어의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한 여러 실험을 하고 있다. 이 시집의 '상응'은 천상계와 지상계, 그리고 인간의 감각들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고 그것은 상징을 해독할 수 있는 시인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상징주의의 핵심적 교의가 담겨 있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② 앙드레 지드(1869~1951: 프랑스)
프랑스의 소설가·비평가이다. 법학 교수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나 규칙적인 학교 교육을 싫어하여 중퇴하고, 19세부터 창작을 시작하여 1891년 처녀작인 <앙드레 왈테르의 수기>를 발표하였다. 주요 작품은 1909년에 발표한 <좁은 문>, <이자벨>, <교황청의 지하도> 등이 있으며, 1927년에 발표한 <콩고 기행>은 비평가로서의 그를 높이 인정할 수 있는 작품이며, 소련을 여행한 후 소련의 현황에 대한 그의 실망을 솔직히 기록하여 쓴 <소련 기행>은 좌파 언론계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이 쇼펜하우어·데카르트·니체 등의 철학서와 문학서를 읽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영향을 받았다. 194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프랑스 문학사상 거의 유일하게 개신교 신자, 그것도 종교개혁자 장 깔뱅의 사상에 근거하여 금욕과 절제를 주장한 청교도였던 앙드레 지드에게서 정신과 육체, 이성과 본능, 선과 악 등으로 세계를 이분하는 기독교이원론은 첨예한 갈등의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이분법적 사고에 내재되어 있는 정신과 이성을 우위에 두는 가치관이 문제가 되었다.
지드는 이러한 가치관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도덕의무가 육체와 본능을 가진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점과 아울러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고 도덕적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자신의 가장 큰 고통의 근원을 오히려 긴 원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지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희열을 향유하며 삶을 충만하게 살도록 허락했다고 믿는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을 억압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부과한 도덕과 윤리라는 것이다.
(7) 신낭만주의 (20세기 초)
20세기 초두에 독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문학사상이다. 그 개념이 복잡다기하나 대체로 자연주의의 정반대의 입장이다. 눈앞의 현실을 멸시하고 사물의 배후에 숨은 생명이나 신비를 믿으면서도 현실에서 완전히 도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꿈과 정서를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과거의 낭만주의의 모방이 아니고 프랑스 상징주의에 가깝다. 이윽고 이 반동으로 표현주의가 싹트게 되었다. 대표적인 문학가는 게오르게, 호프만스탈, 릴케 등이다.
신낭망주의 문학의 대표작가
① 후고 폰 호프만스탈 (1874~1929: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의 시인 및 극작가이다. 빈에서 출생했다. 17살 때 <어제>를 발표하고 계속하여 서정시와 극을 발표하였는데, 특히 <바보와 죽음>은 유명하다. 당시는 자연주의 시대의 절정기였는데도, 그는 개인주의적, 귀족주의적, 유미주의적인 서정극을 발표하였다. 특히 오페라 대본 <장미 기사>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곡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예술은 발전을 거듭했고 초기작품들을 특징짓는 섬세한 우아함과 초월적인 미적 감각은 계속 유지되었다.
②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1926: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작가이다. 20세기 최고의 독일어권 시인 중 한 명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이 시대의 순수한 영혼의 부르짖음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헤미아 왕국의 프라하에서 출생하여 고독한 소년 시절을 보낸 후 1886년부터 1891년까지 육군 유년 학교에서 군인 교육을 받았으나 중퇴하였다. 프라하·뮌헨·베를린 등의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일찍부터 꿈과 동경이 넘치는 섬세한 서정시를 썼다.
릴케는 수많은 사람들과 편지로 교류를 하였다. 당시 삶과 예술, 고독, 사랑 등의 문제로 고뇌하던 젊은 청년 프란츠 카푸스에게 보낸 열통의 편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독일은 물론 미국에서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릴케 자신 스스로 “예술가에게는 깊은 외로움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듯이 릴케의 작품에는 고독을 노래한 시가 많다. 릴케의 시는 우리나라 근대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윤동주, 김춘수, 김현승 등에 영향을 주었다. 윤동주는 순수한 동심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릴케 시를 수용하였고, 김춘수는 사물에 내재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실존적 탐구로 릴케과 같은 맥락에 놓인다. 김현승은 인간의 본질적인 고독에 대한 경건한 성찰의 측면에서 릴케의 영향을 받았다. 릴케는 스위스 라롱에 묻쳤다.
(8) 표현주의 (20세기 초반이후)
주관적 경향을 특히 강조하여 기괴한 말과 감탄적 부호 등을 많이 썼다. 정상적인 표현방법을 무시하는 문학유파의 하나로써 영국의 엘리어트나 죠이스 등이 이에 속한다.
표현주의 문학의 대표작가
① 토머스 스턴스 엘리어드 ( T.S. Eliot: 1888~1965: 미국계 영국 시인)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후에 영국에 귀화했다. 극작가로서 활약하기 전에는 시〈황무지〉로 영미시계(英美詩界)에 큰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또한 비평가로서도 뛰어나 일약 유명해졌다. 그가 종교극, 또는 희극 등의 형식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은 항상 인간의 구제에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며 <성당의 살인><칵테일 파티>등은 특히 뛰어난 작품이다.
<황무지>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시로, 모두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죽은 자의 매장>, 2부는 <체스 놀이>, 3부는 <불의 설교>, 4부는 <수사>, 5부는 <천둥이 한 말> 로 되어있다. 이 작품은 정신적 메마름, 인간의 일상적 행위에 가치를 주는 믿음의 부재, 생산이 없는 성(性), 그리고 재생이 거부된 죽음에 대한 시이다.
제1부는 <죽은 자의 매장>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시의 글이 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1917년 시집 <프루프록 및 그 밖의 관찰>, 1922년 시 <황무지>를 발표하여 젊은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초기의 시는 영국 형이상학 시와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 문명의 퇴폐성을 그리고 있다. 1927년 영국에 귀화하여 유니테리언에서 성공회로 개종하였다. 그는 스스로 문학은 고전주의, 정치는 왕당파, 종교는 앵글로 가톨릭 노선의 성공회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말기의 작품은 차츰 종교적인 경향이 짙어졌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② 제임스 어거스틴 앨로이셔스 조이스 (1882~1941: 아일랜드의 더블린)
아일랜드의 더블린 출신의 소설가, 시인, 극작가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1882년 더블린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라스가(Rathgar)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스태니스라우스 조이스와 어머니 매리 제인 머래이 사이에서 첫 번째 아들로 태어나다. 아버지는 정치에 관심이 높았으나 직업적으로 거의 사회 밑바닥을 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매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제임스를 포함하여 10명의 자녀들을 낳아 가톨릭 신앙에 따라 키우고자 노력하였다.
제임스는 아일랜드의 예수회가 운영하는 클론고즈 우드 콜리지와 벨비디어 콜리지에 다녔는데 예수회 신부들의 교육은 몹시 엄격하고 절대적 복종과 규율을 강조했다. 이러한 교육 하에 제임스는 신부들의 부당성과 잔인성을 알게 되고 가톨릭 종교에서 멀어지고 그의 작품 속에 비판적으로 묘사하게 된다.
유명한 소설은 <율리시즈, 1922>와 매우 논쟁적인 후속작 <피네간의 경야, 1939> 단편인 <더블린 사람들, 1914>, 반자전적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 1916> 등이 있다. 성인이 되어서 대부분의 삶을 아일랜드 밖에서 보냈지만, 그의 정신적 가상적 세계는 그의 고향인 더블린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더블린은 그의 소설의 주제와 설정의 많은 부분을 제공해 주었다. 그의 독특한 표현 형식과 소설 수법은 소설의 새 분야를 개척하여,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소설 수법의 선구자가 되었다.
(9) 실존주의 (20세기 중반 이후)
하이데거, 키에르케고오르, 야스퍼스 등의 실존철학을 토대로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에서 일어나 각국에 퍼진 문예상의 한 경향이다. 그 중심에는 사르트르가 있다. 그는 이성이나 의지 등을 신뢰하지 않고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을 기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은 외계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이지만 보는 것과 보여 지는 것과의 관계로서 자아와 타인의 세계가 성립된다고 보는 것이다.
대체로 실존주의 사상은 대전 후의 사회적 불안에서 생긴 것으로 문학작품에서도 절망적인 허무를 그린 것이 많으나 앞으로 어떻게 허무에서 빠져 나갈 것인가가 큰 과제였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가
① 마르틴 하이데거 (1889~1976: 독일)
하이데거가 태어난 독일의 메스키르히는 마을 주민들이 모두 가톨릭 신자였고 매우 보수적이었다. 독일 남부의 반유대주의정서는 이곳에도 스며들어 있었고 하이데거 사유의 보수성도 이 마을의 보수성과 연관이 있다. 하이데거는 이곳 성마르틴 성당의 종을 치던 아이였다. 그는 메스키르히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903년 인문계 중등학교인 김나지움에 입학한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1916년까지 지급된 장학금은 그가 장차 가톨릭 사제가 된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1909년 김나지움을 졸업한 하이데거는 예수회에 들어가지만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예수회 신부가 되기에는 몸이 약하다는 이유였다. 하이데거는 대신 일반 신부가 되기 위해 1909년 바덴주 프라이부르크대학 신학부에 입학했다. 1911년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철학으로 진로를 바꾼다.
흔히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정작 하이데거 자신은 그러한 칭호를 거부하였다. 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 1928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를 지냈다. 독일의 히틀러 집권시기에는 나치 독일을 공공연히 지지하는 발언을 자주 해 한나 아렌트 등과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 패전 후 독일 비(非)나치스화 청문회에서 그의 정부였던 유태인 한나 아렌트의 증언 등으로 처벌을 피했고 이후 5년 동안 학문 활동을 금지 당했다.
그는 리케르트의 가치 철학과 아리스토델레스의 존재론 등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철학 체계를 개척하였다. 그의 철학 사상은 주관과 객관의 대립 이전에 존재를 기초로 하였고, 그 존재란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하는 현재의 존재를 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철학자와 과학자가 더 기본적이고 이론에 앞서는 존재를 무시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론을 보편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잘못 되었으며, 우리가 존재와 인간 존재를 그릇되게 인정하였다. 이러한 뿌리 깊은 몰이해를 피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철학의 역사를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서 철학적인 질문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② 쇠얀 오뷔에 키에르케고어 (1813~1855: 덴마크)
19세기 덴마크 철학자, 신학자이다.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키르케고르는 사실상 실존주의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쇼펜하우어를 매우 만나고 싶어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쇼펜하우어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관념론과 당시 덴마크 루터교회의 무의미한 형식주의에 반대하였다. 그의 작품 중 많은 수가 신앙의 본질, 기독교 교회의 제도, 기독교 윤리와 신학, 그리고 삶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개인이 직면하게 되는 감정과 감각 같은 종교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때문에 키르케고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에 속하는 사르트르나 니체와 달리 ‘기독교 실존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키르케고르는 독자에게 의미를 찾아야 하는 과제를 남겼다. 그것은 “과제란 어려워야만 하고, 오직 어려움만이 고상한 마음에 영감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그는 근대 개인주의의 기원을 이룩한 사상가로서, 그 자신은 크리스트교 신자였으나, 인간 본래의 자각적 사명에 의해 크리스트를 비판했다. 누구에게나 해로움이 없는 참된 생활의 수립을 역설한 그의 사상은 니체, 입센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근대 사상의 선구자로 또 실존주의 철학의 시조로도 알려져 있다.
③ 카를 야스퍼스 (1883~1969: 독일)
하이데거와 함께 독일 실존철학을 창시했다. 칸트, 니체, 키에르케고르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 문명에 의해 잃어버린 인간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특징이다.
올덴부르크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법학을 배웠으나 의학으로 옮겼다가 정신분석학, 심리학을 거쳐서 철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1913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심리학 교수 자격을 획득하고 1921년에 철학 정교수가 되었으나 나치에 의해 1938년에 교수직에서 추방되었고 1945년 이후 복직되어 대학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1948년에는 스위스의 바젤 대학으로 옮겨갔고, 1961년 정년퇴직을 한 후에도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병사했다.
<정신병리학 총론, 1913>에서는 딜타이에 의해 발전된 '이해'의 개념을 정신 병리학에 도입하여, 정신생활에 있어서 내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과 단순한 과학적 인과율에 의해 해명되어야 할 것을 날카롭게 구별하였다.
<세계관의 심리학, 1919>은 인간이 죽음에 직면한 상황을 비교 고찰 방법으로 분석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미 ‘한계상황(限界狀況)’의 사상이 싹터서 발전을 보이고 있다. 죽음, 고뇌, 우연, 죄책(罪責), 투쟁 등 인간이 회피할 수 없는, 거꾸로 이것에 의해서 자기의 실존 앞에 마주 서게 되는 궁극적 상황이 해명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근대 실존철학의 최초의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 논리학, 1947> 제1권이 나왔으며 자연과학적 인식과는 확실히 구별되고 또한 그의 실존철학에 이미 나타나 있는 철학의 독자적 논리를 추구하였다.
<위대한 철학자들, 1957> 철학을 서양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동양을 포함시킨 점에서 그의 이른바 ‘세계철학’의 의도에 있어서도, 또한 철학사 연구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저작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서구세계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히고 있다.
④ 장폴 사르트르 (1905~1980: 프랑스)
1938년 소설 <구토>를 발표하여 실존주의의 문학을 창시하였다. 1964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하였다. 1905년 해군 장교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15개월 만에 아버지는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후유증인 열병으로 사망하고, 10살이 될 때까지 외가에서 엄격한 외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처 슬하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후일 사르트르는 자서전에서, 선천적 근시와 사시(斜視) 그리고 외가 집의 낯설음 등으로 이 시절에 겪은 심리적 부담에 대해 밝히고 있다. 한편 외할아버지의 깊은 교양은 사르트르의 학문적 탐구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고등사범학교에는 불합격되었다가 이듬해인 1924년 고등사범학교에 수석 입학한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 사회학,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레몽 아롱과 메를로 퐁티 등과 교제하였으며, 1927년에는 니장과 함께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교정하기도 했다. 1928년에 아그레가시온(1급 교원 자격) 철학시험에 낙제하였는데, 사르트르의 지인들은 모두 이에 놀랐지만 이듬해 다시 응시하여 1929년 수석으로 합격했다. 같은 시험의 차석은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시몬 드 보부아르였으며, 이를 계기로 사르트르의 집을 방문한 그녀에게 사르트르는 1929년 계약 결혼을 제안하게 된다.
사범학교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뒤, 1931년 그는 파리와 파리 근교의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 파리로 돌아와 다시 교직 생활을 하면서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1936년 단편 <벽>을 완성했고 소설 <구토, 1938>를 출판함으로써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다. 그리고 <존재와 무, 1943>를 내놓아 철학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또 1945년 미국의 초청을 받아 각지에서 강연을 하였다. 1950년대 프랑스 공산당의 노동력과 용기에 감동해 <현대>지에 프랑스 공산당에 동조하는 글을 썼으나 이로 인해 많은 동료들이 떠났다. 1960년대에는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을 실천하였다.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올랐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삶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의 질문에 ‘그 토록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던 자신의 모습이 나에게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실로 자신이 누구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낯선 모습에 비로소 직면 한다. 그러자 “로캉텡” <구토>의 주인공은 속이 뒤집히면서 모든 것이 허공 속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느낌, 즉 구토증을 느끼게 된다.
사르트르 문학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라 할 <구토>의 테마는 크게 세 가지이다. 즉, 존재란 무엇이냐에 대한 성찰이며, 존재의 진상을 모르는 속한(俗漢)들에 대한 고발이며, 마지막으로 그 진실을 아는 인간의 구원에 관한 가능성이다.
삶은 ‘시지프의 형벌’인가?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까? 사르트르는 ‘구토’에서 삶은 무의미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존재론에서 ‘존재하지 않은 것 차체가 존재한다는’ ‘유와 무’의 의미가 같다는 것인까?
“로캉텡”은 존재의 본래 모습은 아무런 뜻도 이유도 없이 내던져져 있는 상태임을, 즉 존재의 우연성, 무상성, 비정당성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성과 무상성은 단순히 허무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나 세계가 이유 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실존이다.
'구토'란 바로 이렇게 추악하게 널려져 있는 모든 이유 없는 존재들 앞에서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메스꺼움이다. 사물과의 만남 속에서 존재의 의미가 흔들릴 때 ‘로캉탱’이 느끼는 관념적인 증세인 것이다. 이처럼 사르트르는 참다운 고뇌를 겪으면서 운명과 대결하는 대신에 안이하게 기성의 편견과 관습의 굴레에 매여 살면서 자기 존재를 정당한 것으로 믿고 있는 속한들의 자기기만 행위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캉탱’은 진실로 구원의 길은 없느냐는 질문에 마주치게 된다. 사르트르는 행동과 실천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1968년 5월의 68운동에서 사르트르는 청년들을 향해 정치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하였고, 그를 체포할 것을 권하는 참모들에게, 당시 드골 대통령이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넣을 수는 없다"며 사르트르의 체포를 말렸다는 일화가 있다. 한편 한국의 시인 김지하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선동죄 혐의로 체포되고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을 때, 김지하의 시「오적(五賊)」의 번역본을 받아 읽어보고는 곧바로 석방 호소문에 서명을 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문학 저술을 계속해 1971년 플로베르 평전 <집안의 천치> 1,2권을 출판하였으나 1973년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문학 저술을 중단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안네 프랑크집과 안네 프랑크 동상- '안네의 일기'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하우스 가는 길 표시판
덴마크 오덴세 안데르센 하우스옆 공연장
덴마크 코펜하겐 인어공주 동상-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