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27) 동행, 바람에 깎여 얻게 된 깊이 - ③ 뜨거운 얼음처럼/ 시인, 한양대 교수 정재찬
동행, 바람에 깎여 얻게 된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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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뜨거운 얼음처럼
자, 그러면 나와 유전자도 같지 않은 남편과 아내로 불리는 사람들이 서로의 자기 반영과
자기 복제를 위해 사랑을 나누어 어여쁜 청거북을 낳았은즉,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유전자도 다르고 이해관계도 없이 지내오던,
태어나서 일면식도 없던 그런 사이가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밀접하게 한 몸을 만들 때,
그 일치감이 주던 놀랍고 기적적인 전율은 그 후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제 정직하게 욕망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알랭 드 보통의 책 제목대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해봅시다.
그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은 무의식적 욕망이라고 답을 내립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빨리 빠집니다.
그것은 아마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즉 사랑하는 사람의 출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하는 무의식적인 요구가 먼저 있고
그 요구가 그 사람을 해결책으로 발명한 결과일지 모른다는 겁니다.
사랑에 대한 욕망이 사랑할 사람의 특징을 이리저리 먼저 빚어내고서는,
그가 출현하자 그를 중심으로 그 형상이 구체화되고 운명적인 사랑인 양 빠져들게 된 것이 아닐까.
이 설명대로라면 우리 눈을 덮은 콩깍지가 벗겨진 이후 비로소 사랑하는 이의 진실 앞에
실망하게 되는 일이 조금은 설명될 것 같습니다.
내가 꿈꿔온, 실재하지 않은 이상형을 투사한 결과이니 말이지요.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은 보답받을 수 없기 때문에 욕망이 더 커진다는,
아주 우울하게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전통들이 있다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런 관점들에 따르면 사랑은 방향일 뿐 공간은 아니다. (중략) 몽테뉴는 말했다.
“사랑에는 우리를 피해서 달아나는 것을 미친 듯이 쫓아가는 욕망밖에 없다.”
아나톨 프랑스 역시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은 관례적이지 않다”는 말로 같은 입장을 보여주었다.
스탕달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드니 드 루주몽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가장 넘기 힘든 장애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이 정열을 강하게 불태우는 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욕망을 정의상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으로 한정시켰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청미래, 2007) 중에서
저 주체들은 사랑을 욕망으로,
욕망을 소유와 등치시키는 어리석은, 혹은 어쩔 수 없는 어린아이나 짐승들 같습니다.
그들에게 욕망은 유예되고 연기될수록 강렬해집니다.
“키스해도 될까요?”라는 말에 “아니오”라는 답보다는 “다음에요”라는 말에 온몸을 바칠 각오를 합니다.
그 ‘다음’, 또 그 ‘다음’을 향해 충실히 달려가는 겁니다.
그것이 알랭 드 보통이 말한 ‘사랑은 방향일 뿐’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사랑해서, 욕망해서,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에는 ‘다음’이 없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불타던 뜨거운 욕망이, 사랑이라고 생각한 그것이 그만 식어버리고 사라져버린 것 같아지는 겁니다.
성취된 욕망은 이미 욕망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마치 북극의 정점에 온 듯 더 이상 나아갈 방향도 없이 멈춰버린 듯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갑자기 친밀해지는 이 기적은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 시작되는 경우 대체로 더욱 촉진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친숙해질수록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권태가 생겨나며 최초로 흥분의 잔재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그들은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문예출판사, 2019) 중에서
다행입니다. 미쳐버린 상태에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것이니까요.
영화 제목처럼 ‘연애의 온도’가 몇 도이든, 결혼의 온도보다는 확실히 높지 않을까요?
결혼하면 다들 사랑이 식는다고들 하니까 말이죠.
하지만 무조건 온도가 높은 게 정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39℃에서 36.5℃가 된 것은 참 다행이지 않습니까. 열병이 나은 것이니까요.
열병이 가시지 못하면 욕망은 금기를 향하게 될 뿐입니다.
결혼은 공존입니다.
오랫동안 한집에서, 한 이불에서, 같은 탕 안에서 함께 지내는 겁니다.
같은 체온끼리는 서로 온도를 느낄 수 없고, 뜨거운 탕도 오래 있다 보면 못 느끼는 법.
우리는 뜨거운 탕에 앉아 오히려 ‘시원하다’고 합니다.
얼음의 온도
허연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일. 얼어붙거나 불에 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
잴 필요도 없이 얼음은 늘 차갑습니다.
더 차가워도 차갑고 덜 차가워도 차갑습니다. 그것이 얼음의 본질이니까요.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천년을 거듭해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법구경(法句經)》에도 이런 말이 있죠.
“어리석은 자는 한 평생 다하도록 현명한 이를 가까이 섬겨도 참다운 법을 깨닫지 못한다.
국자가 국 맛을 모르듯이.” 혀는 국 맛을 알지만 국자는 국 맛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국자 신세는 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식은 게 아니라 바르게 된 것이고, 변해서가 아니라 변치 않아서 익숙해진 것이고,
그 덕에 우리는 동상도, 화상도 입지 않고 평생을 동거하며 공존해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그저 오래 같이 지내다보니까 익숙해지는 권태처럼 오해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몰입하는 일’이라고. 행복한 결혼 생활의 비결은 대장장이처럼,
장인의 책무처럼, 정성을 다하며 몰입하는 일을 거듭할 때만이 얻을 수 있는 비급(祕笈)인 것입니다.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정재찬, 인플루엔셜, 2020)’에서 옮겨 적음. (2022. 5.15.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27) 동행, 바람에 깎여 얻게 된 깊이 - ③ 뜨거운 얼음처럼/ 시인, 한양대 교수 정재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