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겨울 시계
구두 한 켤레의 시
겨울 시집
그리운 남쪽
깡통
얼음 풀린 봄 강물-섬진마을에서
땅끝에 와서
성묘
겨울기행
묵언 1
묵언 2
귀촉도-금산에서
권력
새
서울 세노야
산에 꽃피면
받들어 꽃
새벽을 위하여
참 맑은 물살
동해-서태지에게
돌점 치는 여자
천일이 지나면
우이도 편지
추억
또 다른 사랑
따뜻한 편지
마음
강
모래톱 이야기 - 화개에서
첫눈 오는 날
배꽃
기다림
은행나무
절망을 위하여
가거도 편지
그리움에게
봄
바람소리
바람이 좋은 저녁
나무
새벽편지
소나기
밤 편지
사평역에서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들국화
제비꽃 사설
희망을 위하여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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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잡풀로 서걱거릴 너희를 버히겠다
한 놈 두 놈 새로 태어날 네놈까지
울지 마라 아버지는 백정이 아니었다
비껴서서,
바늘이 없는 길을 골라서서
아버지는 너희들이 편한 풀로
한세상 흔들리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
아버지는 백정이 아니었다 도망자였다
보안경을 쓰고 섬광과 함께
치지직 너희 질긴 뿌리를 지지겠다
한세상 서러운 잡풀로 흔들릴
피내림의 단호한 종지부를 찍겠다
그러나 믿어다오 아버지는 도망자가 아니었다
그리운 이 땅의 풀씨만한 새벽에도 희망을 새기는
아버지의 슬픔은 종지부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너희 형제 얼굴이 아니었다
들지 않는 낫날로 모진 너희를 버히면서
아버지의 아픔은 잡풀인 아버지의
부끄러운 한세상 흔들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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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시계
지나가는
비님
혹 들어오실까
창문 열었네
두 손 내밀어
가만히 보듬는
원죄의 서늘한 목소리
비님은
들어오시지 않고
헐벗은 나무 몇 그루
산그림자 속으로 걸어가네
새봄의 이파리만큼 많은 인생의 나날들
하루쯤 쉬어 엄격한 겨울의 시계가 파손되지 않는다면
그대여, 그대 발자국 찍힌 지상의 모든 안쓰러운 추억마다
성냥개비 끝 매달린 머루알만한 그리움의 불꽃들 새겨 두고 가시게나
가난한 사람들이 호호 입김을 불며
난로가 꺼진 눈보라 속으로 정처 없이 나아갈 때
그들 영혼의 텃밭 한 귀에 추운 매화꽃 한 송이 피어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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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한 켤레의 시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쑬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점 꾸려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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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시집
밤늦게
시집을 읽습니다
요즘 읽은 시집 중에
마음에 남는 시집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새벽 두 시
새벽 세 시
마지막 새벽 별
스러질때까지
시집을 읽습니다
그렇게 밤을 새운 아침
문득 창 앞에 서면
세상이 온통 은빛의 축제입니다
산에
들에
강에
흰옷 입은 母國語들
천천히 춤추며 내려옵니다
세상에 쓸만한 시집
따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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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남쪽
그곳은 어디인가
바라보면 산모퉁이
눈물처럼 진달래꽃 피어나던 곳은
우리가 매듭 굵은 손을 모아
여어이 여어이 부르면
여어이 여어이 눈물 섞인 구름으로
피맺힌 울음들이 되살아나는 그곳은
돌아보면 날 저물어 어둠이 깊어
홀로 누워 슬픔이 되는 그리운 땅에
오늘은 누가 정 깊은
저 뜨거운 목마름을 던지는지
아느냐 젊은 시인이여
눈뜨고 훤히 보이는 백일의
이땅의 어디에도
가을바람 불면 가을바람 소리로
봄바람 일면 푸른 봄바람 소리로
강냉이 풋고추
눈 속의 겨울 애벌레와도 같은
죽지 않는 이 땅의 서러운 힘들이
저 숨죽인 그리움의 밀물소리로
우리 쓰러진 가슴 위에 피어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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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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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풀린 봄 강물-섬진마을에서
당신이
물안개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냥
밥 짓는 연기가 좋다고
대답했지요
당신이
산당화꽃이 곱다고 얘기했을 때
나는 수선화꽃이 그립다고
딴말했지요
당신이
얼음 풀린 봄 강물
보고 싶다 말했을 때는
산그늘 쭉 돌아앉아
오리숲 밖 개똥지빠귀 울음소리나
들으라지 했지요
얼음 풀린 봄 강물
마실 나가고 싶었지마는
얼음 풀린 봄 강물
청매화향 물살 따라 푸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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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에 와서
황사바람 이는 땅끝에 와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보다 먼저
한 송이 꽃을 바치고 싶었다
반편인 내가 반편인 너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히죽 웃으면서
묵묵히 쏟아지는 모래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너는 결국 아무런 말도 없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바위 앞에서
남은 북쪽 땅끝을 보여주겠다고 외치고 싶었다
해안선을 따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아우성 소리 끊임없이 일어서고
엉겨 붙은 돌따개비 끝없는 주검 앞에서
사랑보다도 실존보다도 던져 오는
뜨거운 껴안음 하나를 묵도하고 싶었다
더 지껄여 무엇하리 부끄러운 반편의 봄
구두 벗고 물살에 서 있으니
두 눈에 푸르른 강물 고여 온다
언제 다시 이 바다에서 우리 참됨을 얘기하리
언제 다시 이 땅끝에서 우리 껴 안아 함께 노래하리
뒹굴다가 뒹굴다가 다투어 피어나는 불빛 진달래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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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
무릎을 꿇어라
이 못난 후레자식
핏대를 세우며 삿대질을 하며
아버지는 거친 억새풀로 일어나
억새풀 아래 무릅 꿇은 잡풀보다
허름한 자식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들아 니 애비 못나 설운 마음
지천으로 패랭이꽃으로 빈 들판에 널렸는데
너 이제 한주먹의 허름한 눈물로
불쌍한 애비 앞에 무릎 꿇었느냐
생각해라 잘살기 위해서라면
사군자에 곁들인 채색화도 잘 팔리고
미국땅 삼류 음대 옆문으로 빠져나와
떡잎 그른 조선 호박잎들 바이올린 레슨 벌 만하고
잘살 일 하나로 죽어가는 그 길이 가깝다면
너를 보는 애비 두 눈에 피눈물이 맺히리라
아들아, 별이 뜨는 가을밤을 너는
걸었느냐 여름의 진창 섞인 어둠 속을
헤매었느냐 눈을 감아라
겨울은 오고 홀로라도 네가 걸어야 할 길은 멀다
겨울은 오고 네가 맞을 눈송이는 아직 포근하다
돌아가거라 네 가슴에 남은 그리움이
내 가슴의 그리움과 함께 지천으로 피는 날
허름한 내 무덤 쓰러진 억새풀 위에도
뜨거운 이 세상의 송이눈이 흩날리리라.
詩集, 사평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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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기행
춥고 서먹한 겨울이었다.
정미소 추녀 끝에 햇살을 쪼아대던
참새떼도 보기 힘들게 되었다
나무들의 언 손이 들녘의 한기를 부비는 식전
사격장을 향하는 우리들의 머리 위로
죽은 새들의 울음만 송이송이 흩어졌다
겨울 문틈으로 고드름만 간간이 떨어질 뿐
온수 한잔 어디서 마실 틈이 없었다
고향에서는 편지가 끊긴 지 오래였다
쇠죽 끓이는 가마 곁에서
산유화가 제일 좋다던 조카
공민학교 이학년에 편입한 그 녀석은
헌 시집처럼 눈물이 잦곤 했다
끝까지 시 공부를 할래 물으면
늘 부끄럽고 겸연쩍어하던 녀석
그 녀석도 이젠 다 커
읍내 박씨네 자전차포 점원이 되었다
춥고 서먹한 겨울이었다
사젹장을 향하는 우리들의 머리 위로
죽은 새들의 울음만 송이송이 흩어졌다.
詩集, 사평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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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언 1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새로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러한 때
나는 패배자가 된
고독의 옆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승리자가 된 고독의
빛나는 웃음도 볼 수 없습니다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서러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 빛나는 탄생의 신비 앞에서
한 햇빛이
다른 햇빛을 돌로 쳐 죽이는
끔찍한 모습을 만나기도 합니다.
詩集,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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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언 2
-소금밭에서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새로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러한 때
나는 패배자가 된
고독의 옆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승리자가 된 고독의
빛나는 웃음도 볼 수 없습니다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서러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 빛나는 탄생의 신비 앞에서
한 햇빛이
다른 햇빛을 돌로 쳐 죽이는
끔찍한 모습을 만나기도 합니다
~~~~~~~~~~~~~~~~~~~~~~~~~~~~~~~~~~~~~~~~~~~~~
귀촉도-금산에서
금산 농협 철선 타고 금진 포구 닿았습니다
대목 장꾼들 작은 갯마을로 사라진 뒤 날은 저물고
얼굴 까만 텃새 한 마리 집들의 봉창마다
저녁 햇살 한 토막 꽂았습니다 그리운 날은 멀고
보릿국 냄새에 길들여진 초저녁 별들이
사발 하나식 들고 긴 휘파람 불었습니다
면소의 중국음식점에서 자장면 한 그릇 훌훌 마시고
여인숙 찬 방에 허리 구부리면 어디선가
낯익은 고통의 울음소리 긴 밤 새웁니다.
詩集, 참 맑은 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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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력
옛날에는
호박꽃도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했던 친구가
패랭이꽃이나 민들레꽃도
진짜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했던 친구가
갑자기 장미나 백합을 들먹이며
나머지 꽃들은 뽑아
없애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워커와 방패에 기름을 먹이며
자신이 끌려갔던 닭장차와
오랫동안 증오했던
최루탄발사기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아 참 단맛이구나
아 참 꿀맛이구나
적어도 5년은 그렇게
입맛을 쩝쩝일 것이었습니다.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詩集, 참 맑은 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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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서태지에게
꿈을 위해선
사랑을 버려도 좋지
보리순 파랗게 돋은
갓 스무살
그냥 보고만 있어도
싱싱해지는 거친 파도들이지
반역을 위해선
이세상 제일 치밀한 함정도
두려워하지 않지
그래
두려움은 세상의 끝이지
보이지 않는 안개의 속살보다는
보다 명징한 삶의 목소리를 원하지
꿈을 위해선
청춘을 불태워도 좋지
그래
꿈을 위해서
청춘을 불태웠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지
보리순 파랗게 돋은
갓 스무살
우리에겐 반역의 꿈이 있지
우리에겐 불타는 청춘의
칼날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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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점 치는 여자
그 여자와 나는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만났습니다
이스크쿨이라는 이름의 호수가
천산의 맑은 눈망울을 떨구고 있는 땅
그 여자가 돌 몇 개를 굴려
내 인생의 앞날을 읽어주었습니다
나 두 귀 쫑긋거리며
또르르 또르르 물방울처럼 굴러 나가는
내 인생의 마른 풀숲 하나 보았습니다
어디선가 썩어 문드러질 육신
죽어 지옥을 방황한 영혼
그 여자의 점괘들이
비비새의 울음소리가 되어
저물녁 사과나무 가지에 걸렸습니다
그날 밤 이스크쿨 호수의 수면 위에
육탈이 덜 된 한 사내의 뼈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바람도 되지 못하고
꽃도 되지 못하고
더더욱 새는 꿈꾸지 못한
한 사내의 이름이 작은 물살 되어
천산의 기슭까지 천천히 밀려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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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이 지나면
오늘 내가 한 편의 시를 쓰고
내일 두 편 모레 세 편 쓴다면
천 일 후엔 천 편의 시를 쓸 수 있을까
그때 나는 말하리라
이 아름다운 땅에 태어나
시간이 흐른다고 써야 할 시들을 쓰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사람들 또한 시간이 흐른다고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잖겠는가
써야 할 시들은 많은데
바람들은 맑은 햇살을 뿌리며
응달의 강기슭을 돌아가는데
울먹인 가슴 녹이며
이제는 고요하게 지켜보아야 할
두려움 모를 그리움만 들판 가득 쌓였는데
천 일이 지나면 혹시 몰라
이 아름다운 나라에 태어나
내가 하루 천 편의 시를 쓰지 못해 쓰러질 때
그때 말 못할 그리움은 밀려와서
내 대신 쓰지 못한 그리움의 시들
가을바람으로나 흔들려
내 사랑하는 사람들 귓속에
불어넣어주고 있을지.
詩集 사평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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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도 편지
어무니 가을이 왔는디요
뒤란 치자꽃초롱 흔드는 바람 실할텐디요
바다에는 젖새우들 찔룩찔룩 뛰놀기 시작했구면요
낼 모레면 추석인디요
그물코에 수북한 달빛 환장하게 고와서요
헛심 쪼깨 못 쓰고 고만 바다에 빠졌구만요
허리 구부러진 젖새우들 동무 삼아
여섯 물 달빛 속 개구락지헤엄 치는디
오메 이렇게 좋은 세상 있다는 거 첨 알았구만요
어무니 시방도 면소 순사 자전거 앞에 서면
고금쟁이 걸음처럼 가슴이 폴짝 뛰는가요
출장 나온 수협 아재 붙들고
아직도 공판장 벽보판에 내 사진
붙었냐고 해으름까지 우는가요
어무니 추석이 낼 모렌디요
숯막골 다랑치논 산두빛 익어 고울텐디요
호박잎 싼 뜨신 밥 한 그릇 차마 그리운디요
언젠가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 일뿐으로
가막소에 가고 지명수배를 받던 세상
부끄러워 할 날 올 것이구만요
어무니 낼 모레면 추석인디요
반월과 구로동 나간 동생들 다 돌아올텐디요
봉당 흙마루 걸터앉아 송편도 빚고 옛이야기 빚노라면
달빛은 하마 어무니 무릎 위에 수북수북 쌓일텐디요.
詩集 참 맑은 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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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어릴 적엔 사랑이 가득한 들판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밀려오
는 따뜻한 바람과 햇살 그 속에서 당신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
습니다 봄이면 능금꽃이나 복사꽃 꽃댕기를 하고 산 넘어 당
신이 사는 집에 원족을 나가고 싶었습니다 나만이 아는 세상
의 꽃향기와 비밀스런 사랑 이야기로 당신의 하루를 축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는 새가 되고 싶었습니다 가난한 당신의
친구들을 위하여 유향과 몰약의 향기로 오는 약속의 노래를
뿌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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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사랑
보다 더 자유
스러워지기 위하여
꽃이 피고
보다 더 자유
스러워지기 위하여
밥을 먹는다
함께 살아갈 사람들
세상 가득한데
또 다른 사랑 무슨 필요 있으리
문득 별 하나 뽑아 하늘에 던지면
쨍하고 가을이 운다
당신이 보낸 편지는
언제나 따뜻합니다
물푸레나무가 그려진
10전짜리 우표 한 장도 붙어 있지 않고
보낸 이와 받는 이도 없는
그래서 밤새워 답장을 쓸 필요도 없는
그 편지가
날마다 내게 옵니다
겉봉을 여는 순간
잇꽃으로 물들인
지상의 시간들 우수수 쏟아집니다
그럴 때면 내게 남은
모국어의 추억들이 얼마나 흉칙한지요
눈이 오고
꽃이 피고
당신의 편지는 끊일 날 없는데
버리지 못하는 지상의 꿈들로
세상 밖을 떠도는 한 사내의
퀭한 눈빛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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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무와
나무 사이 건너는
이름도 모르는
바람 같아서
가지와
가지 사이 건너며
슬쩍 하늘의 초승달
하나만 남겨 두는
새와 같아서
나는 당신을
붙들어매는
울음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한 번 떠나간
나루터의
낡은 배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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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내 가슴속
건너고 싶은 강
하나 있었네
오랜 싸움과 정처없는
사랑의 탄식들을 데불고
인도 물소처럼 첨벙첨벙
그 강 건너고 싶었네
흐르다가 세상 밖 어느 숲 모퉁이에
서러운 등불 하나 걸어두고 싶었네.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바람은 자도 마음은 자지 않는다
철들어 사랑이며 추억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싸움은 동산 위의 뜨거운 해처럼 우리들의 속살을 태우고
마음의 배고픔이 출렁이는 강기슭에 앉아
종이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절망의 노래를 불렀다
정이 들어 이제는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는 이 땅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짓밟고 간
많고 많은 이방의 발짝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이웃에게 눈인사를 하지 않았고
누구도 이웃을 위하여 마음을 불태우지 않았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두려움에 떠는
눈짓으로 술집을 떠나는 사내들과
두부 몇 모를 사고 몇 번씩 뒤돌아보며
골목을 들어서는 계집들의 모습이
이제는 우리들의 낯선 슬픔이 되지 않았다
사랑은 가고 누구도 거슬러오르지 않는
절망의 강기슭에 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이 땅의 어둠 위에 닻을 내린
많고 많은 풀포기와 별빛이고자 했다.
숲속에는
내가 잘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들 만나러
날마다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
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
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言語(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가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않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걱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너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내 등뒤에 내려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포근하게 감싸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
더욱 편안하여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일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잠들지 않으리라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질러오는
한 세상의 슬픔을 보리라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라
곽재구
출생 : 1954년 1월 1일
직업 : 시인
학력 : 숭실대학교대학원
경력 : 순천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1986년 계간지 시와 사람 편집위원
수상 : 1996년 제9회 동서문학상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사평역에서 당선
대표작 : 삶을흔들게하는것들, 내가사랑한사람내가사랑한세상, 참맑은물살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등단
- 시집으로는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한국의 연인들>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이 있으며,
- 기행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 창작동화집
<아기 참새 찌꾸> 등을 발행.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해왔으며, 신동엽 창작기금과 동서문학상을 받았다.
지금은 섬진강의 맑은 바람과 물살이 지척인 한 작은 마을에 작업실을 얻어 시와 동화, 여행기를 쓰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