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320명이나 신청했어요."
교무실에서 수업준비를 하고 있는데 학생회장인 현진이가 형광등처럼 환하게 켜진 얼굴로 무슨 승전보라도 전하듯이 제게 말했습니다. 그는 이 선생님 책상에 앉아 올해로 4회째를 맞이하는 순천 청소년 축제의 개막식 행사에 해당하는 '교육주체 함께 달리기 대회' 단체 참가 신청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선생님, 애들 이름을 다 올려야 돼요?"
"아니, 장현진 외 320명, 그렇게 올리면 돼."
장현진. 저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프랑스의 성처녀 '잔 다르크'를 떠올리곤 합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녀의 몸 어딘가에도 커다란 흉터가 하나쯤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하긴, 그녀가 전장을 누빈 여전사였으니 엉뚱한 생각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난 해의 일입니다. 남학생 반 수업을 하고 있는데 그는 당당하게 교실에 들어와 3분만 시간을 달라고 제게 정중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학생회장 후보로서 유권자들에게 선을 보이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수업시간이라 안 된다고 매정하게 말하기도 뭐해서 자리를 비켜주고는 뒤로 가 서 있었습니다.
학생회장 후보로서 그가 내세운 첫 번째 공약은 학교 축제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런 공약 말고도 이런 저런 말을 했지만 저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 눈은 그의 목 정면에 나 있는 흉터에 붙박혀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여학생으로서 치명적이다 싶을 만큼 선명하고 커다란,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아픈 흉터였습니다.
그는 시간을 3분만 쓰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교실을 나갔습니다. 그가 떠난 교실은 잠시 침묵 속에 휩싸였습니다. 뭔가 위대한 것이 스쳐 지나간 느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남학생들의 표정 속에 그런 감동의 흔적들이 보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무심하리만큼 그들의 표정은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저 혼자만 그의 흉터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가 학생회장에 당선이 되고 난 뒤 며칠이 지났습니다. 복도에서 우연히 만난 그에게 저는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해마다 학생회장에 당선된 아이에게 들려주곤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학생회장 당선을 축하한다. 너의 첫번째 공약이 학교 축제 부활이었지? 이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은 가지고 있니? 선배들처럼 선거 공약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겠지? 선생님도 널 도울 수 있다면 도와주마."
그렇지 않아도 학교 축제 부활을 위해 주무 부서인 특별활동부가 중심이 되어 교사 중심으로 일을 진행해오다가 예산문제로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 있던 중이었습니다.
저는 교사가 아닌 다수 학생을 대표하는 그가 학교 축제 행사 준비를 위한 마지막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축제의 주체가 학생임으로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작년 11월, 드디어 4년만에 부활된 학교 축제 '봉화제'가 열리던 날입니다. 그는 예쁘게 옷을 차려입고 저와 함께 무대 뒤에 서 있었습니다. 개막 선언을 하기 위해 2부 공연 연출자인 저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를 마주보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그의 목에 난 흉터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자주 만나면서도 깜빡 잊고 있었던 흉터였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한 순간 착시 현상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그의 목에 난 흉터가 그가 차려입은 의상에 걸맞도록 일부러 차고 나온 우아한 보석처럼 보인 것이었습니다. 몸에 아로새겨진 보석 말입니다. 그가 떨고 있는 듯하여 이렇게 물었습니다.
"떨리니?"
"예 조금요."
"네가? 그런데 너 오늘 보니 눈이 참 예쁘구나."
"어머, 고마워요."
그리고는 꼭 한마디 더 해주고 싶은 것을 저는 간신히 참아야만 했습니다.
그를 보면서 저는 사람의 아름다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의 당당한 삶의 태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은 서양식 기준에 맞추느라 멀쩡한 몸에 칼을 댄다든지, 남자들의 취향에 맞도록 여성스러움을 강조한다든지 하여 억지로 만들어낸 허망한 아름다움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아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터득한 것 같았습니다.
5월 18일. 오후 5시. 출발 지점인 순천대학교 정문 앞에서 멋진 유니폼을 차려입은 근육질의 남학생들을 포함한 320명의 학생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현진이를 저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나의 영원한 '잔 다르크'에게 또 다시 그 말을 해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느껴졌습니다.
'네 눈보다 더 예쁜 곳이 어딘지 아니? 바로 네 목에 난 흉터야. 이 흉터가 내겐 보석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여'
이날 '교육주체 함께 달리기 대회'에서 현진이는 학생회의 수장답게 끝까지 선두를 지켜 우리 학교가 단체상을 받는 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를 옆에서 말없이 도와준 소림이와 은화, 그리고 반 아이들과 호흡을 맞추어 함께 달리신 이길섭 선생님의 공도 컸습니다. 저도 아내와 함께 5km의 구간을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좁은 방천길을 따라 뛰다보니 아이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습니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만 만나던 아이들과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함께 뛰는 즐거움이 컸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청소년 축제가 인문계 학교 중심으로 이루어져 실업계인 우리 학교 아이들은 어딘지 소외된 느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나의 영웅 현진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진이에게 영웅은 바로 자기 안에 있었습니다. 내 안의 영웅을 발견한 아이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나의 영원한 <잔 다르크>라고. 그와 함께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달리는 사람은 아름답다
숨이 차도록 달려와
하얀 김을 내뿜는 사람은 아름답다
먼 겨울을 이기고 돌아와
밭도랑을 덮은 흰 냉이꽃처럼
제 몸을 태우며
먼 하늘을 날아온 새처럼
먼길을 달려온 사람은 아름답다
안일과 행복에 취하지 않고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지금 달리고 있는 사람은 아름답다
달리는 사람은 아름답다
손 내밀어 일으켜주며
함께 달리는 사람은 아름답다
홀로 빼어나진 않아도
화음을 만들 줄 아는 들꽃처럼
일등도 꼴찌도 없이
편대를 지어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작은 한 방울 이슬이 모여
산모롱이 굽이쳐 흐르는
도도한 역사의 강물이 될 때까지
눈물이 되고 사랑이 되어
함께 달리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졸시, '달리는 사람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