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5/10 교무회의 때 나눈 내용
‘효성’(曉星)이라는 이름이 지닌 의미
저는 최근에 학교 홈페이지에 소개된 글을 다듬었습니다. 학교 연혁과 효성 교육에 대한 글을 다듬다가 “효성”이라는 이름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학교가 123년간 지속되는 동안 몇 차례 이름이 바뀐 것은 아시죠? 그때마다 많은 사연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 학교는 1924년부터 ‘효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 천주교 대구교구 교구장이셨던 드망즈 주교님이 어떤 마음으로 우리 학교에 ‘효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21년 오늘을 사는 제가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1. ‘효성’은 성모 마리아의 애칭으로서 ‘샛별’이라는 뜻입니다. 사회에서는 샛별을 새벽별, 금성, 혹은 비너스라고 부르지요. 어느 출중한 인물이 갑자기 부상했을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일컬어 새롭게 떠오른 별, 곧 ‘샛별’이라고 칭합니다. 우리 학교 어린이들이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효성’이라는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2. 그런데 우리 학교에 ‘효성’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 이름에 ‘특정 분야에서 출중한 인물이 될 것을 바라는 염원’만 담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겼고, 사람들과 자원을 수탈당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민족혼이 강하게 위협당하던 시대였지요. 따라서 ‘효성’이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조금 더 들여다봐야 하겠습니다.
박노해 씨의 수필집 「사람만이 희망이다」에 수록된 ‘새벽별’이라는 詩입니다.
“새벽 찬물로 얼굴을 씻고 나니
창살 너머 겨울나무 가지 사이에
이마를 탁 치며 웃는 환한 별 하나
오 새벽별이네
어둔 밤이 지니고
새벽이 온다고
가장 먼저 떠올라
새벽별
아니네
뭇 별들이 지쳐 돌아간 뒤에도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별
끝까지 돌아가지 않는 별이
새벽별이네
새벽별은
가장 먼저 뜨는 찬란한 별이 아니네
가장 나중까지 어둠 속에 남아 있는
바보 같은 바보 같은 별
그래서 진정으로 앞서 가는
희망의 별이라네
지금 모든 별들이 하나 둘
흩어지고 사라지고 돌아가는 때
우리 희망의 새벽별은
기다림에 울다 지쳐 잠든 이들이
쉬었다 새벽길 나설 때까지
시대의 밤하늘을 성성하게 지키다
새벽 붉은 햇덩이에 손 건네주고
소리 없이 소리 없이 사라지느니
앞이 캄캄한 언 하늘에
시린 첫마음 빛내며 떨고 있는
바보 같은 바보 같은 사람아
눈물나게 아름다운 그대
오 새벽별이네!”
이 시(詩)에서 나타났듯이 ‘샛별’은 새벽에 가장 먼저 뜨는 찬란한 별이 아니라, 가장 나중까지 어둠 속에 남아 있는 바보 같은 별입니다. 그래서 어둠이 깊어갈 때 비로소 밝게 빛나는 ‘희망의 별’이지요. 모든 별들이 하나 둘 흩어지고 사라질 때, 혼자 밤하늘을 꿋꿋하게 지키다가 새벽 붉은 햇덩이에게 손 건네주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 눈물나게 어리숙한 별입니다. 효성가족은 누군가에게 이런 샛별이 되어 줄 것을 지향합니다.
3. 희망의 새벽별은 지친 그대가 잠시 잠들어 쉴 때, 혼자 밤하늘을 성성하게 지키다 아침에 눈 뜬 그대 밝은 미소를 보고서야 붉은 햇덩이에 손 건네주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데, 이때 샛별이 손 건네주는 붉은 햇덩이가 누구냐?, 독립 투사에게는 민족의 해방이요, 일반인에게는 참되고 순수한 사랑이며,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효성’의 세 번째 의미를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희망’입니다. 샛별은 ‘희망의 별’입니다. 영성 생활에서 희망은 우리가 갖는 다양한 소망들과 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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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도 ‘희망’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교회가 선포하는 ‘희망’과 같지 않습니다. 희망의 정의, 희망의 내용, 희망의 근거 등 모든 게 다 다르지요. 일례로, 일반인들은 희망을 말할 때 자신들의 ‘소망’을 염두에 둡니다. 하지만 가정의 평화 · 사회적 성공 · 몸의 치유 등은 개인적 소망은 될 수 있을지언정, 교회가 선포하는 희망은 될 수 없습니다.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희망은, “어떤 일을 이루거나 얻고자 기대하는 마음, 혹은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가능성”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선포하는 희망은, “암흑 속에서 계속 노래함을 뜻합니다. 절망 속에서도 사랑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고, 내일을 신뢰하는 것이며, 바다의 폭풍우 속에서 육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희망의 기도가 될 때, 그것은 감사기도가 되고, 찬미기도가 됩니다. 우리가 바치는 숱한 청원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호의를 신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행위가 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희망으로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삶을 오롯이 하느님 손에 내맡기는 것이 됨으로 우리에겐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집니다. 나에게 닥쳐올 모든 것에 대해 열려 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희망하는 것입니다.”(「열린 손으로」 64-74쪽 편집)
이런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가 품을 희망의 내용은 ‘하느님과 하나 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의 재림’,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 ‘하느님 나라의 완성’, ‘우리의 부활’,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영광을 누림’, 혹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만 허락된 영원한 생명을 누림’ 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교회가 선포하는 희망의 내용과 일반인이 지닌 소망의 내용은 같지 않습니다.
희망의 근거 또한 확연히 다릅니다. 일반인이 갖는 희망의 근거가 자신의 노력이나 세상의 흐름 즉 운(運)이라고 한다면, 교회가 선포하는 희망의 근거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 희망의 내용과 근거가 다른 만큼,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 또한 같을 수 없겠죠. 희망을 간직한 제자의 기도를 들어봅시다.
“사랑하는 하느님, 저는 수많은 소망과 기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실제로 채워지겠지만, 많은 것들은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욕망이 충족되어 기쁠 때나 그렇지 못해 실망할 때조차도 저는 당신 안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결코 저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심을, 그리고 당신의 거룩한 약속을 완전히 채워 주심을 굳게 믿고 있으니까요.
어떤 일이 저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갈지라도 그것이 바로 당신의 뜻임을, 그리고 그 길이 결국엔 저를 위한 최선의 길임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 저의 수많은 소망들이 채워지지 않을 때, 바로 그때에 제 희망이 더 강해질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십시오.”(「열린 손으로」 74쪽 편집)
이 기도에서 제자의 자유로움과 당당함을 엿볼 수 있지 않은지요. 그리고 다양한 소망들과 구별되는 우리의 희망도 뚜렷이 드러나지요. 기쁨은 이와 같은 희망의 열매입니다. 희망을 품고 있으면 우리가 어떤 일을 겪을지라도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희망을 품으면 우연히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은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어 ‘오시는 하느님’을 잘 맞이할 수 있게끔 준비시켜 주는 도구들이 됩니다. 아픈 상처는 깊은 이해를 북돋워주는 기회로 승화될 수 있고요. 마치 암환자가 그의 병을 정면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을 이웃을 위한 치유의 계기로 승화시키듯이 그리고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삶을 발견하는 계기로 삼듯이 말입니다.
희망을 품고 살면 이렇게 슬픔을 기쁨의 재료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조차도 이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헨리 뉴엔, 「고독」, 49~57쪽 참조)
4. 제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그리스도인의 희망에 대해서 말씀드리느냐 하면, 효성초등학교가 대외적으로 걸고 있는 문구 때문입니다. “꿈, 행복, 감동이 있는 학교. 명문 효성초등학교가 함께합니다.” 할 때의 그 ‘꿈’은 앞에서 말씀드렸던 일반인이 갖는 다양한 소망들과 구별됩니다. 효성초등학교가 말하는 ‘꿈’은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뜻합니다. 이것이 또한 ‘효성’이라는 이름이 지닌 참된 의미이기도 하고요.
‘꿈을 키우는 학교, 공부 잘 하는 학교’에서 ‘꿈을 키운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키운다는 의미입니다. 샛별처럼 모든 별들이 하나 둘 흩어지고 사라질 때, 혼자라도 시대의 밤하늘을 씩씩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을, 그러다가 흘려보내야 할 때가 오면 자유로이 사라질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을 양성하겠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어린이들이 그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 어린이들의 샛별이 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고요. 이곳 효성초등학교에서 그 꿈을 함께 키워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