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교련 검열
70년대 초, ‘반공방첩’ ‘산림녹화’ 따위의 문구에서.
‘구국의 시월유신’으로 바뀐 리본 문구나 플랜카드가 육교마다 주렁주렁 걸리던 시국이다. ‘단일 후보 체육관 대통령’ 뽑는 선거 홍보 현수막이 쿵, 하고 바리게이트로 가로막던 동토의 어둠 즈음이다. 담임인 세포님(생물)이 말캉말캉 빠른 톤으로.
‘대통령과 함께 똘똘 뭉쳐 허리띠 졸라매야 하는 비상시국에도 선전·선동에만 몰입하는 몰지각한 놈들이 요소요소에 포진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유신만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대세요, 구국의 사명이란다. 반대파들은 기껏 빨간 잠바 좋아하는 의식화 대학생이나 그 시류에 편승하여 부화뇌동하는 고삐리들 아니면 니코틴 중독자들뿐이란다.
그 열강은 듣지 않아도 진작부터 달달달 외운 문장이었다. 라디오 전파가 문풍지 사이로 쏟아졌고 월요일 운동장 조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녹음되었던 따발총 그 소리가 진부하면서도 쇠뇌시키는 것이다. 아오지 탄광 강제노동이라도 해봐야 국가의 소중함이 느껴진다나, 어쩐다나. 유신의 최면이 보자기처럼 폭싹 씌워지면서 머리가 혼돈스러웠다. 하다못해 계집애들 고무줄놀이에서도.
일하시는 대통령
이 나라의 지도자
삼일정신 받들엇 총
사랑하는 민족 위해
오일륙 이룩하여
육대주에 빛내고
칠십년 대 번영은
팔도강산 뻗친다
구국의 새 역사
시월유신 김유신
치마 소녀들이 골목길 고무줄놀이로 폴짝폴짝 뛰기도 했다. 고등어 비늘로 팔딱이는 종아리가 겉으로는 상큼했으나 당장 예비고사 준비가 발등에 떨어진 우리 고3 수험생에겐 점수표가 중요할 뿐 기실 나머지는 아무 여유가 없었다. 9분도 쌀밥조차 모래알처럼 버걱버걱 씹히던 시절.
그리고 전국 고딩들의 발목을 일제히 묶어버린.
원래 일제 강점기의 잔재로 1960년도에 폐지되었던 제도다. 그러다가 1968년 북한군 특수요원 124군부대의 김신조 일당 31명이 청와대 기습 직전 문턱에서 잡힌 ‘1.21 사태’가 터졌고, 일주일 후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멱을 따러 왔수다.”
그 생방송 매스컴을 불쑥 접한 보수 논객과 마이크들이 당장 이쪽에서도 똑같은 숫자의 특수부대를 급조하여 ‘기밀썽 멱을 따야 한다’고 노발대발(영화 실미도 참조) 회오리 판을 만들면서 스프링처럼 부활된 제도다. 남학생들에게는 제식훈련, M1소총 사용법과 분해•조립법, 총검술 등을 가르쳤고, 여학생들에게는 구급법을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제식훈련까지 확대시켰다. 위관급 예비역 장교나 하사관들이 교련교사로 부임하면서 등굣길 기강이 예전보다 더 살벌해졌는데.
예전의 스승들은 왜 그리도 무지막지하게 때렸을까.
제자들은 아무도 반발하지 못했다. 무릇 분노란 것이 어지간히 느슨할 때 터지는 거지 ‘더 맞으면 아작 나겠구나’ 겁을 집어먹으면 일찌감치 꼬리를 내린 채 순종형으로 납작 엎드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기악부 해마님(음악)은 조금 다른 케이스다. 조기 청소 직후 반 전체를 싸리비로 ‘우로어깨 총’ 시킨 다음 ‘우향앞으로 갓’ ‘뒤로돌아 갓’ 할 때만 해도 그냥 괴짜 훈장 정도로 치부했었다. 그런데 어벙이 학동 규섭이가 ‘빗자루 총검술’ 때 딱 걸리면서 우리들은 그의 행태를 악마로 규정했다. 모가지 끌고나오는 기선 제압부터 이게 장난이 아니다. 열 대에서 스무 대, 서른 대, 마침내 오십 대까지 횟수가 불어나면서 처음에는 킬킬대던 구경꾼 고삐리들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굳어버렸다. 그 오십 대 빳따로 광란의 퍼포몬스 세례가 마감되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막대기로 반경 2미터 원을 그리는데 5초! 실시!”
2라운드에 돌입한 것이다. 빗자루로 동그라미 속에 갇힌 규섭이의 얼굴을 겨누며.
“피하고 싶으면 피해라. 단 네 몸뚱이가 금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지옥을 만나게 된다.”
좌충우돌 토끼몰이 식으로 후려패는 게 마치 ‘때리는 자와 맞는 자의 대결’ 같았다. 동그라미 속에 갇힌 규섭이가 금세 방어를 포기하고 ‘마음껏 때리쇼’ 자세로 웅크린다. (그 스승은 몇 달 뒤 담임반 제자들의 반란으로 쫓겨났으니, 그 인과응보는 예외라고 치고.)
언제부터였나, 교련님들이 체육님과 훈육실 팀을 제치고 압박스승 1호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들은 훈시 때마다 ‘유사시에 군인으로 변신할 정신무장’을 강조했다
“지금 당장 전선에 나가는 정신무장을!”
그래봤자 총 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열병, 분열, M1 소총의 16개 동작이나 총검술 따위만 반복했으니 그 절도 있는 동작들이 원자폭탄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검열관한테 퇴짜 맞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돼.”
발등에 떨어진 그 위협을 받아들이며 팔다리를 올려 오와 열을 맞췄다.
“어게인 검열…… 너 죽고 나 죽는 거지.”
일반 과목 스승들 중에도 비슷한 부류들이 있었다. 그들의 주특기는 ‘마이크 훈계하기’였는데 교단이건 사열대건 평등보다 높은 위치를 선호했다. ‘호시탐탐 철조망을 노리는 괴뢰들과 맞서려면 정신개조를 해야 한다’며 냅다 야단을 치는 것이다. 물론 유신헌법을 에둘러 비판하는 스승들도 가끔 있긴 했다. 소극적으로나마 ‘대통령 각하가 조금 성급하셨어요.’ 고즈넉한 메시지를 전한 스승은……국어님, 역사님, 국민윤리님 등이다.
청년들의 목을 조른 통제의 사슬 중.
장발 단속이 그 대표 사례다. 좌우지간 머리카락이 귀만 덮으면 당장에 가위손이 날아왔다. 베토벤이나 고흐보다 훨씬 짧은 머리도 범죄자처럼 자르고 또 잘라서 청춘의 헤어스타일을 고슴도치 두상으로 변신시켰다. 아가씨들 짧은 치마도 초토화 시키려는 금지령이 터졌다. 비곗살 관료들이 ‘어허 불손하다’며 미니스커트 초토화 작전을 속개시키니 청춘녀들은 경찰 제복만 나타나면 오그르르 자라목을 숨겼다. 치마 길이를 재던 사진 한 장이 나의 사춘기를 오래도록 괴롭히기도 했다. 30센티 자(尺)로 허벅지 맨살을 재던 경찰관의 나쁜 손이 치마 속으로 불쑥 들어가는 상상으로 아랫도리가 후둘후둘 떨리는 바람에, 밤마다 요강뚜껑 돌리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우리의 ‘발등의 불’은 당연히 대학입시다. 그런데 예비고사 한 달 전까지 초읽기에 들어간 수험생에게 ‘교련검열! 철저 대비!’ 따위의 멀쩡한 나팔을 불어대니 돌아버릴 지경이다. 검열관님, 교장님, 교련님에건 그런 게 중요할지 모르지만 우린 졸업장만 따기 전에 대학입시가 있다. 교련 검열 따위야 시간만 지나면 그걸로 땡이다. 그런 울컥은 속으로 감춘 채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교련님들은.
“질서가 없다. 질서, 질서!”
“수백 대열을 한 몸처럼 움직이라구. 머리를 비우란 말이얏.”
노대위가 ‘물 만난 고기’처럼 설쳐대면 우리들이 일찌감치 납작 엎드렸으므로 길들임의 강도에 갈수록 거침이 없었다. 등하굣길이건 운동장 조회 후 입실 순서건 그는 무조건 ‘질서! 질서!’만 입에 달고 살았다. 그가 대열을 툭 건드리면 재빨리 작대기 하나 직전의 훈련병처럼 뻣뻣해져야 하는 것도 군인정신이란다. 4열 횡대 쉬엇 자세에서.
“그렇지?”
하고, 그가 툭 칠 때마다, 재빨리 차렷 자세로 바꾸며.
“옛, 3중대 2소대(3학년 2반) 성강철.”
절도 있게 외친 다음 다시 열중쉬엇 자세로 돌아가 15도 상방을 주시해야 한다.
그래도 방교련(병장 출신)은 가끔 통 큰 농담도 주고받아서 조금 나았다. 길몽이 앞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담배 하나 꿔주라.”
“…….”
아주 잠깐 난감한 시간이 지나면 폭탄유머가 터진다. 길몽이는 비싯비싯 고개 숙였고 우리들은 과장된 몸짓으로 까르르 터뜨렸다. 시내버스에서 한산도 한 개비를 입에 무는 순간 (버스 내 흡연이 통용되던 시절임) 하필 방교련이 불쑥 올라탄 사건을 꼬집는 것이다. ‘죽었구나’ 포기하는 순간 방교련이 고개를 돌려 그냥 넘어가 주었으므로 그때부터 깐죽깐죽 괴롭히는 사람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때릴 때 때리더라도 쪼잔하지 않는 게 진짜 사나이다.
하지만 말가죽 스타일 노대위는 체벌에 목숨 건 승부사 스타일이었다. 그 시범케이스 젯밥이 공순구였는데, 심해도 너무 심했다. 그가 빈 타임을 이용하여 영어 단어장을 펼치는 순간.
“3중대 2소대 집합.”
깜빡 흘려들었는지 그때까지 단어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순구(480명 중 40등, 斜視장애)를 지명하는 것이다. 마주친 눈빛을 피하지 않았던 그 사팔눈을 노려보는 것으로 착각한 탓도 있다.
“손으로 막지 맛. 손가락 부러진다.”
처음에는 당연히 몇 대 정도에서 끝날 줄 알았다. 낙숫물처럼 딱, 딱, 딱 정수리에 떨어지는 뽕나무 막대기를 전혀 피하지 않고 돌부처처럼 움직이지 않는 순구 스타일이 노대위를 더 열 받게 한 것도 있다. ‘어렵쇼’ 표정을 짓다가 점차 타격의 강도를 높여나갔다. 스무 대가 넘으면서 공순구의 어깨가 조금씩 가라앉더니 마지막에는 눈사람 녹듯이 푸시시 주저앉는 것이다.
“일어섯.”
구경꾼 고딩들도 침이 바싹바싹 마르면서 입술을 태운다. (정확히 47대에서 멈췄다.) 순구는 글썽글썽 침묵을 지키다가 노대위가 나가자마자 소리 없이 흐느끼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나는 투명인간처럼 몰래 숨어서 샅샅이 관찰했다.)
그런가 하면 매타작을 빌미로 자발적 휴식에 빠지는 벗도 있었으니.
그 ‘뛰는 놈 위의 나는 선수’가 바로 석지훈이다. 아버지가 원래 역도 선수였는데 역기를 들다가 허리가 부러져서 지금은 자기 몸도 못 드는 육신으로 도장 가게를 차려 먹고 사는 집 막내아들이다. 그래서일까. 도시락 반찬도 도장처럼 얇은 단무지만 싸왔는데 점심시간만 되면 그의 도시락 뚜껑은 ‘집어온 남의 반찬’으로 완죠니 반찬 백화점으로 변신된다. 그가 재수생 출신인 동갑나기 후배를 아작 내는 걸 본 적이 있다. (다음 지면에 소개)
“이 자식들아 이렇게 줄이 맞지 않아서 어떻게 적의 침략을 막냐구?”
방교련이 꾸물대는 교련복을 찾아 종아리를 툭 걷어찼을 뿐인데도 석지훈은 허벅지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걀걀걀 뒹굴었다. ‘위기를 찬스로’ 만들었다고나 할까. 석지훈은 환자 포즈로 쪼그려 앉았다가 방교련님이 멀찌감치 뒷모습으로 흐릿해지면 홍알홍알 노래를 부르며 우리들의 약을 올렸는데 ……‘줄줄이 우로 갓’ 상태에서 귓바퀴에 쏟아지는 석지훈의 불량노래 가사는.
영자의 손목은 버스간의 손잡이냐 요놈도 잡아보고 저놈도 잡아보고
영자의 입술은 서울역의 수도꼭지냐 요놈도 빨아보고 저놈도 빨아보고
교관들은 달력 날짜를 지우며 날이 갈수록 조급하게 강도를 높였다.
우리들 역시 예비고사 대비에 자투리 시간까지 다급해졌다. 사이사이 쉬는 타임에 영어단어 하나라도 재빨리 챙겨야 했으므로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시간’도 아까워져서 그냥 ‘까라니까 까는’ 거다. 저 사열대 라이방 부대의 뽀대야 어차피 시간이 지나고 나면 소진되는 의미들이다. 죽이 되나 밥이 되나 어서 빨리 글자 수를 맞추고 싶은 것이다. 솔직히 영어나 암기과목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어지간히 점수가 오를 수 있다. 수학은 조금 달랐으니 아무래도 타고난 머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달달달 외워놔도 막상 실전에서 방향키 몇 개만 비틀어 놓으면 대번에 막막해지므로 수학은 가비얍게 포기한다. 그건 그렇고.
가장 한가해진 분들은 일반 교과 스승들이었다. 보름 동안 수업이 증발된 스승들은 삼삼오오 어슬렁어슬렁 계단식 참관으로 10월의 햇살을 받으며 시간을 때웠다. 그때 수학님이 손가락질로 킬킬대는 바람에 무안함으로 헤맨 사람이 있으니 그게 바로 나다. 행진 시에 팔과 다리가 교대로 헛둘헛둘 움직여야 하는데 나 혼자 오른 팔과 오른 다리를 동시에 올리며 아주 심각한 행진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수학 티춰가 우헤헤 웃자 덩치맨 물리님과 가분수 상업님까지 바싹 붙어 내 코를 비틀며 푸헤헤 웃으니, 민망함으로 죽고 싶었다.
수학님은 수업시간에 동욱이가 펼쳤다는 이유로 내 수학 자습서를 찢은 장본인이다. ‘탁’ 낚아챈 다음 한 장 한 장 낱장을 찢는데, 뒷자리 창수가.
“괜찮아, 풀로 붙이면 돼.”
촐싹 끼어들자, 펫 비웃는 표정으로.
“풀로 붙이면 된다구?”
대각선으로 찢더니 아예 갈기갈기 눈송이를 만들어버렸다. 이해할 수 없다. 동욱이가 보았는데 왜 내가 자습서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가. 또 있다. 약을 올린 놈은 창수인데 왜 엉뚱하게 내 자습서를 찢는가. 그 후 나는 다시는 수학공부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영원히 잊지 않기로 작심하며.
아무튼 방교련이 마이크 잡고 눈을 부라리면 아이들은 범생이들부터 먼저 중심을 잡으면서 대열 정돈을 시작했다. 이제 분열 연습이다. 스승님도 행진을 자박자박 따라다니면서.
“하나! 하나! 왼발! 왼발!”
“둘! 둘! 오른발! 오른발!”
찻, 찻, 차착.
방교련이 오와 열을 정비시킨 대오였지만 결국 사열대에 올라가는 건 라이방 쓴 노대위였다. 우리들은, ‘방자의 후손 방교련’은 사병 출신이고 ‘노벨네 후손 노대위’는 밥풀떼기 출신이라 성분이 다르단다, 썰렁 농담도 했다.
태양이 수직으로 내리꽂이는 늦가을의 한낮,
1,200명 교련복 모두 오와 열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운동장에 도열했으니 개미 새끼 한 마리 함부로 기어다니지 못할 엄숙함이었다. 특히 사열대 앞에 선, 연대장 뒤에 선 기수들은 후리늘씬 에리트 교련복의 바지도 칼날처럼 다려져 있었다. 모자 테를 턱에 두르니 사관생도처럼 절도와 규범이 갖춰지면서 중대장 이상 교련복들은 그런 복장 뽀대의 찬스를 잡는 것이다. 후리후리한 교련복 상의에 흰색으로 X자 띠를 둘렀으며 펄럭이는 깃발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