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이씨족보(계유보-1873) 발문
곡령송청(鵠嶺松靑-개성)에서 우리 시조(始祖-能一)공이 경사스러운 종(鍾)에 훈공을 새기고, 성산(星山)을 조토로 받고 운손(雲孫-자손)의 본관으로 삼았다. 높은 벼슬이 서로 이어져 고려조 말기에 이르는 500년간에 족성(族姓)의 번연(蕃衍)함을 이루었으나, 세계(世系)와 보첩의 전하는 바가 겨우 대경(堅守-堅守)공 하에 한 가지 있는데, 신혼항구삼초병(晨昏巷口三軺並), 가무연중사수련(歌舞筵中四袖聯)의 시(詩)로는 영향을 오랜 세월에 증명할 수 없고, 우리 소윤(少尹-文廣)공 선조께서 독특하게 세 아들을 낳아 파가 나누어져 비로소 백(伯)파, (仁州)파는 고령 관동이오, 4세를 전하여 영천파가 되었고 중(仲)파, (金山)파는 비로소 본 고을의 가좌산(加佐山)에 거주하다가 다시 전하고 나누어져 칠곡 약목, 지례 도곡, 의성 신례 제파가 되고 신례에서 3世를 전하여 안동의 일직파가 되었다. 계(季)파, (正言)파는 비로소 본 고을의 대포에 거주하였으며, 1世를 전하여 차(次)파가 개령으로 이주하였으며, 2世를 전하여 장(長)파가 합천으로 이거하였고, 개령에서 2世를 전하여 나누어져 상주파(尙州派-낙동파)가 되었으며, 합천에서 4世를 전하여 나누어져 양전파가 되었으니, 이것이 대략이다.
후손이 흩어져 각처에 거주하니, 마치 황하의 간(簡-물 이름)과 격(鬲-물 이름)이 있고, 양자강에 타(沱-강 이름)가 있는 것 같아서 한 근원에서 나누어지지 아니함이 없다. 그 동안 이름난 벼슬과 드러난 사람이 아주 많아서 서로 바라보고 문헌이 나라 안에서 저명하더니, 임진왜란을 겪은 후로 편적(編籍-책)이 탕일(蕩佚-몽땅 없어짐)하여 거의 징거 할만한 문헌이 없다. 지난 영조(英祖) 병오(丙午-1726)년에 우리 종인 성재(省齋-爾沆)공이 각파의 가첩을 모아 초보를 편성하여 광주리에 간직한 후 42년 정해(丁亥-1767)에 공의 손자 어은(漁隱-敏樹)공이 받들어 종로(宗老)에게 품의하고 물러나, 완재(完齋-碩五)공과 더불어 상세하게 정정하여 출간 하였는데, 규례를 근엄하게 하고 체재를 간정(簡整)하게 하였으니, 족히 보가(譜家)의 법률이 될 만하다.
그 뒤 70여년 동안 파류(派類)가 더욱 번성하고, 통제함이 조금 헤이 하더니 병신년(丙申-1836)에 다시 속보를 닦게 되어 첨장로께서 각별히 간섭하는 노고를 다 하였는데, 나의 선친 형제분(兄弟分-源祜, 源祚)이 실로 교정하는 역사를 맡아 구례(舊例)에 인하되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정정(井井-질서나 조리가 있음)하고 문란하지 아니했다. 나는 그 때에 약관(弱冠-20세)으로 조략하게나마 이목(耳目)에 미친바가 있었더니, 어느 사이에 또 38년이 되었다. 지난 때에 어린아이로 입보한 자가 이미 무덤에 나무가 한 아름이 되고 손자와 가지가 번성하게 되었다.
어느 날 사종숙 소계(小溪-源孝)옹이 종중에 의논하여 말하기를 「30년에 한번 수보하는 것이 보가의 통례인데, 세대가 더욱 오래 되면 세계(世系)가 더욱 어두워 질것이니, 어찌 지금 수집하여 선부로의 아름다운 뜻을 본받지 않겠는가?」 고 하니 모두가 좋다고 응락하였다. 또한 좌중에서 말하기를 「정해보와 병진보 양보는 다른 책으로 인쇄되어 세대가 오르락내리락 하고 고람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차라리 합하여 한통으로 하여 널리 전하지 않겠느냐?」고 하니 모든 의논이 진실로 동일하였다.
이에 계유(癸酉-1873) 곡우절(음 3월)상순에 보청을 월봉정에 설치하였으니, 대개 세 번의 족보를 모은 것이다. 내가 부형의 뒤를 이어 외람되이 교감(校勘)의 임무를 맡았으나, 쇠한 정력에 실로 포괄하여 망라하기가 어려웠다. 옅은 생각으로 혹 충돌하기도 하였으나, 다행히 첨종(僉宗)의 성력에 힘입어, 편집하고 만진지 10삭(朔) 만에 겨우 원보를 이룩하였는데, 존속하고 빼고 하는 즈음에 심신을 죽이고 시간을 허비하였다. 정해보에 미입(未入) 한 것도 병진보에 준하고, 병인보에 혹 누락된 것이 장부에 신실한 징빙이 있으나,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파중(派中)에서 단자가 들어왔더라도 일일이 삭제하여 범람하게 섞이지 않게 하였다.
상주파(尙州派-洛東派)가 처음 누락 된 것은 전 종인이 함께 개탄하고 애석하게 생각한 것이므로 이제 본파와 합의에 의하여 수록하되, 그 파보로 대안을 삼고 더불어 정문익(鄭文翼-鄭光弼, 領相)공과 신문경(申文景-申用漑, 左相)공의 묘갈명을 참조하였다. 중포파인즉 근래에 우리 참의공(參議公-壽星)이 나오는 병신보(丙申譜-1836)부터 수단을 하지 않았으므로 이번에도 빠졌다. 소원했던 자는 들어오고 친근했던 자는 나가니 금인이 개탄하고 애석해함이 전년과 같다.
신편(新編)이하에 모든 의논을 첨부하고 각각 그 소속의 파로 인하여 서차 하였으니, 그 승급하고 입보하는 것을 하나도 미리 준비하여 처결함이 없었고, 관향을 같이하여 족의가 있는 사람을 수록한 것이다. 문적(門籍)의 현회상략(顯晦詳略)은 각각 파두(派頭)의 소서(小序)에서 알게 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 동방세가에 모두 족보가 있으나, 넓게 하되 확실하지 않으면 민(珉-옥돌)과 무(珷-옥돌 비슷한 돌)가 서로 섞여서 청엄한 규율에 부끄러움이 있고, 편벽하여 다하지 못하면 규모가 크게 좁아서 혹 독후한 풍습에 흠이 되는 것이니, 후인이 우리 족보를 보는 자 반드시 다시 어떻게 하겠는가? 오직 이 원보는 병오년 이래로 수집을 넓게 하여 상고(詳考) 하기를 쉽게 하였으며, 가필(加筆)하고 삭필(削筆)하는 것을 공정하게 하고 준수한 것을 확실하게 하였으니, 비유컨대 전인이 집을 짓고 밭을 이룩한 것을 후인이 흙을 발라 꾸미고 밭이랑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
다만 그 사적을 실어 기록한 것이 옛것에 비하여 상세함을 더하여 항상 눈으로 보고 우모(寓慕)하는 자료에 해로움이 없을 것이니, 인을 일으키고 의에 옮기는 실제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 무릇 우리 제종은 각각 세덕(世德)을 생각하고 가법을 준수하여 안으로 효제(孝悌)하는 행실을 닦고, 밖으로 충순(忠順)하는 절의에 힘써서 강신수목(講信修睦)하여 백세에 쇠체(衰替)함이 없다면, 창대하는 경사가 또한 장차 당나라의 위두(韋杜)와 송나라의 왕여(王呂)와 더불어 융성(隆盛)함을 견주고 아름다움을 같이 할 것이다.
1874년 3월 상순에 후손 이진상(李震相) 삼가 발문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