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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산문-김훈 『연필로 쓰기』(문학동네, 2019)
方 旻
1. 소설가 산문집
유명 소설가 김훈이 산문집을 펴냈다. 수필 쓰는 사람으로서 소설가는 얼마나 다르게 산문을 쓰는지 알고 싶다. 특히 김훈은 꽤 널리 알려진 작가로서 이미 여러 편의 산문집(『라면을 끓이며』외)을 펴냈기에 어쩌다 써낸 일반인 산문과 다른 특이점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비문학인이나 수필 작가가 아닌 경우에도 흔히 수필집 또는 에세이집이라 책이름 붙이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산문집이 아닌 ‘산문’이란 표제를 붙인 것도 특별하게 다가온다. 소설가가 글을 모아 ‘산문’으로 이름 붙인 것은 작가와 출판사가 상호 조정한 의견이라 짐작하지만, 하여튼 흥미롭다. 왜 소설가가 소설이 아닌 산문을 써 발표하는지 우선 궁금한데다, 또한 그 글 묶음 또한 굳이 ‘산문’이라 붙인 이유 또한 관심을 끌기 족하다.
문장 스타일로 보아 글은 시문(율문)과 산문 둘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 시만(산문시도 있지만) 빼고 모두 산문으로 문학을 창작하는 같은 처지에서 보자면, 소설과 수필은 나란히 산문 문학에 속한다. 그런데 산문 문학의 대표를 수필이라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산문 문학이라기보다는 서사 문학의 대표로 보는 게 두루 퍼진 생각이지 싶다. 하면 드라마는 극문학의 대표이듯, 시는 서정 문학, 소설은 서사문학으로 이른 바 문학의 3대 장르로서 자리 잡은 건 꽤 오래된 전통 인식이다. 이에 다소 관용적인 3문학 장르 인식에서 조금은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수필, 달갑지 않게 4대 문학에 어정쩡한 눈으로 수필을 합석시키지만, 속내는 약간의 멸시와 푸대접을 3장르 주도인 한국 문단에서 겪는 게 일상이라, 왜 당당한 소설 작가께서 소설과 방계인 산문 문학(수필)에 나섰는지도 아울러 호기심을 불러내기에 충분하다. 바로 이런 점이 이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다. 혹여 수필가가 소설집을 낸 것만큼 주목할 특이한 현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설가가 명칭이야 어쨌든 산문집을 펴낸 것은 흔한 것이 아니기에 이런 글을 시도한다.
수필가 중에 전업 작가는 없다. 즉 수필만 써서 생계비를 마련한 사람은 작고한 지 십여 년 지난 매원 박연구 선생 밖에는 없다고 할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이와 달리 소설가는 전업 작가가 적지 않다. 얼마 전 작고한 최인호를 비롯하여 이글의 주인공인 김훈과 방송 활동이 활발한 김영하를 비롯하여 여러 명이 적잖이 활동 중이다. 그만큼 문단 실황에선 수필가와 소설가는 차이가 많다. 소설만 써서 살아간다는 것, 어쨌든 생계 마련을 위한 특정 직업을 갖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척박하고 비좁은 한국 문단 현장에서만이 아니라 수필가 입장에선 퍽이나 경이로운 현상이다. 소설가와 달리 수필가는 다른 생계용 직업이 있거나, 이미 그 직업 현장을 떠난 은퇴자가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아니면 직업이라 보기에 애매한 주부가 여류 수필가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서 수필가는 소설만 써서 살아가는 소설가가 부럽다 못해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수필가와 다른 소설가의 산문에 관심의 호미질을 굳이 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소설가 산문은 수필가와 어떤 점에서 다를까. 문장 스타일은 소설가와 수필가 모두 산문으로 쓴다는 점에서 같은데, 또한 수필에서도 소설의 허구 서사와 다른 체험 서사지만 서사도 중요한 속성이기에 외현적인 산문체를 함께 쓰는 소설가 산문이 수필가 산문(수필 작품)과 얼마나 무엇이 다른지, 어떤 면에서 다른지, 나아가 왜 소설을 쓰지 않고 산문을 쓸까도 함께 의혹의 눈초리로 따라 붙는다. 혹 본업인 소설 쓰는 여가를 이용한 일종의 부업인가, 아니면 글로 하는 취미 생활은 아닌가, 양자를 겸한 것인가. 이와 다르게 수필가처럼 산문집(수필가의 수필집은 모두 산문집이다)을 펴내야만 하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이처럼 소설가 산문집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하지만 필자에게 꽤나 흥미로운 의문을 이제부터 풀어보려 한다.
2. 산문집을 펴낸 동기
그가 산문집을 펴낸 동기는 서문 격인 “알림”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김훈은 『연필로 쓰기』 서문(다소 낯선 용어인 ‘알림’)에서 말한다. 자신의 글은 비정치적 목표를 갖고, 독자의 공감도 관심 밖이라 한다. 이 말은 오로지 자족 의미만으로 충분하며 독자는 의식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 책 산문은 삶의 일상 중 사소한 것들로 구성하나 글로 쓰기는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책(글)으로 자신이 문제(?)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도 한다. 이 서문의 태도는 상당히 독단적이고 어찌 보면 독자를 다소간 무시하는 듯하며 꽤 권위적으로도 보인다. 즉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썼으니 독자는 그에 관해 시시비비하지 말기 바란다는 집필 의도를 마주하니 순간 당황스럽다. 적절한 독자 반응을 원하지도 않고 긍정 반응도 기다리지 않는 “나의 글은 다만 글이기를 바랄 뿐”이라는 선언은 왜 이런 글을 써 혼자 지니지 않고(일기처럼) 발표하는지 무척 의아하기만 하다. 글은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서 독자에게 전달하고 반응을 기다리며 서로 소통하자는 것이란 본질에 대한 도전 혹은 외면으로 보이면서 퍽 주관적 혹은 독선이란 판단이다. 그러면 이 선언은 의도적 허세나 과장 또는 회피인가 아니면 무언가 다른 목적을 가진 교묘한 고도의 술책인가 따져보지 않을 수 없게 강한 궁금증을 유도한다.
산문집은 작가의 말로 추정해 보자면 소설로는 쓰기 어려웠거나 직접 다루기 적절하지 않은 작가 자신의 일상적 삶, “날마다 부딪치는” 세세한 자신의 나날 삶을 쓴다. 이 점에서 당장 성급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수필가의 일반 제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수필가도 작가 일상을 주요 제재로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글의 핵심 제재로 삼는다. 소설가 산문집 역시 수필가 산문집(수필집)과 글 재료는 동일하거나 유사하다는 점이다. 수필가 수필집과 소설가 산문집 제재가 같다면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글 쓰는 사람인 작가가 다르다. 김훈 소설가는 이른 바 낙양의 지가를 올린 베스트셀러 작가인데 반해, 보통 수필가는 일찍이 그런 일 들은 적 없고(혹 있었다면 김소운, 피천득 정도) 앞으로도 쉽게 일어나지 않을 이름 없는 작가들뿐이다. 둘 다 일상 삶은 별로 다를 것이 없는데 한쪽은 유명 작가의 삶이고, 다른 쪽은 무명 작가의 삶이므로 글감(체험 주체)의 성분에서 차이난다. 다시 말하자면 평소 삶은 특별히 다를 게 별로 없지만 등장인물인 작가가 유명이냐 무명이냐만 다를 뿐 근본 차이는 없다는 말이다. 요즘 미스 트롯 방송으로 갑자기 무명인에서 유명 인사가 된 어느 여가수 사연이 단연 화제다. 이 일이 있기 전 그녀와 인기가수가 된 이즘 이 사람의 근본은 별달리 달라진 게 없다. 다만 대중에게 얼마나 널리 알려졌는지 여부만 다르다. 본래 원본은 같은데 유무명이 판세를 달리 한 것, 결국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삶의 주목도가 달라졌다는 얘기다. 어쩌면 무명인(수필가)의 삶을 다룬 ‘수필집’이 아닌 나름 유명인(소설가)의 삶이라 이와 다르게 ‘산문’이란 다른 책 이름을 붙이게 한 직접 이유일지도 모른다.
소설가와 출판사 생각으로는 ‘수필집’이라 붙이면 흔하게 넘쳐나는 평범한 사람의 삶을 다룬 ‘수필가’ 수필집 범주에 묻힐까 염려하여 소설가의 ‘수필집’이라 안 하고, 소설가의 ‘산문’이라고 표 나게 내세운 것은 아닐지 의문을 품게 한다. 식재료가 다르니 그것으로 만든 요리 이름도 다르게 붙여야 하는 것, 혹은 수요자인 독자에게 특색 있는 것처럼 내세워야 출판사의 상업적 목표 달성에 더욱 유익한 것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자비 출판인 수필집에 비해 유명 출판사의 상업 출판인 소설가 산문집에 걸맞은 행위일거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 책의 출발부터 다른 소설가 산문집은 과연 수필가 산문인 수필집과 어떤 차별성을 가지는지 살펴볼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덧붙이자면 수필가의 산문 작품집보다 상업성 측면을 확실하게 강조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왜 이처럼 그들이 상업성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지 이유는 앞으로 따져 볼 일이다. 대중 독자인 소비자에게 본 상품인 소설을 제공하기 위해 일정 기간 작품을 구상하며 보내는 동안 그들에게 잊히지 않으려고 유명세를 일정 부분 유지하는 것은 글로써 생계 수단을 위한 작가에겐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한 일일 것이다. 즉 글의 교환가치용 지속을 위해서, 사용가치용 위주의 수필가와 달리 시장에서 금전으로 교환할 수 있는 그들 책(소설, 산문)의 가치 유지가 그들에겐 절실한 것이 아닐까. 이점은 책의 출간에 맞추어 유명 신문사 인터뷰(조선일보)가 실리고 그 아래 지면엔 적잖은 크기로 책 출간을 알리는 출판사의 상업 광고가 동일한 날짜의 신문지면에 등장하는 것으로 추정하면 그 양자 연계성을 쉽게 확인하게 한다. 이점 역시 수필가의 수필집과 다른 그들만의 통상 행태다.
3. 산문집의 목적 혹은 지향
산문은 문학 장르 명칭이 아니다. 이에 반해 수필은 보통 문학 장르 명칭이다. 소설가가 수필이라 안 하고 산문이라 부르는 것은 그 내면에 그들이 쓴 글은 문학이 아니라는 의식이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남이야 어찌 보든 수필이란 이름을 쓰는 사람은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문학의 한 장르로 인식한 것이다. 반면에 같은 글을 두고도 산문이라 부를 때와 수필이라 부를 때는 작가 의식에선 문학이냐 비문학이냐의 기본 장르 인식의 차이가 자리하는 것으로 보는 게 온당한 판단일 것이다. 이런 전제로 보자면 소설가 산문은 일단 문학은 아닌 셈이다. 즉 그가 소설을 분명히 산문으로 쓰면서도 산문이란 명칭은 안 붙인다. 작가 소개란에서도 명확하게 소설과 산문을 구분해 표시한다. 곧 그가 쓴 소설은 문학이고, 산문은 문학이 아닌 것으로 인식한다는 증거다. 즉 문학인(소설가)이 문학 작품(소설)을 쓰지 않고 비문학인도 쓰는 산문(신문기사, 칼럼, 일반 서적의 글)이라 붙인 것은 어쨌든 문학 작품은 아니란 것, 그러면 문인(소설가)이 왜 비문학 글(산문)을 쓰는지 궁금증을 더한다. 당연하게도 글이란 꼭 문학인만 쓰는 것은 아니다. 문학 작품은 문학인이 주로 쓰거나 문학인처럼 행세하고 싶은 사람만 쓴다. 어찌하든 일단 글은 아무라도 쓸 것이 있고, 쓰고자 하면 쓰는 것이라서, 소설가가 일반인처럼 글을 쓰는 것을 두고 사실 뭐라 할 게 아니다. 하지만 앞에서 밝힌 것처럼 수필가의 제재와 거의 유사하거나 동일한 제재로 쓴 글을 수필가처럼 수필이라 하지 않고 산문이라 하는 점이 궁금함을 넘어 그 이유를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문학에 정통하지 않은 일반인이 쓴 글을 ‘에세이’라던가, ‘수필집’이란 명칭으로 종종 펴내는 우리 출판계 현실에 비추어 보아도, 문학이 무언지 확실하게 인식하는 소설가로서 왜 일반인처럼 ‘수필집’ 혹은 ‘에세이’라고 붙인들 별 문제가 없다고 보는 면에서 보자면 무척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학인이 즉, 문학 작품을 쓰는 일이 직업인 사람이 문학이 아닌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직업인으로서 쓰는 글이 아닌 글이라면 취미나 여기로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게 한다. 비유하자면 어부가 고기잡이 본업 활동 여가에 친구와 낚시를 하거나 직업 요리사가 집에서 요리를 하는 경우와 비교할 수 있는 일을 소설가가 한 셈이기 때문이다. 문학으로 보지 않는 글을, 전업 문학인이 쓴다는 것은 분명 직업으로서의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필자는 소설가가 펴낸 산문은 소설을 쓰는 틈새를 이용한 여가 생활의 일부거나 취미로 쓰는 것이 아닌지 추측해 보는 거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이보다 더욱 확실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생계를 위한 상업적 의도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즉 전업 소설가인 그는 소설을 쓰고 출판하여 독자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 그 대가로 출판사로부터 판매 숫자만큼의 인세 수입으로 생계를 이어갈 것(김훈은 “시작! ->”에서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라 썼다)이다. 특별한 사업을 병행하거나 남다른 재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혹 다른 가족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이 책 판매의 인세 수입이 전업 소설가의 주요 소득이 될 터이다. 이런 상업적 이윤이 목적이기에 비 상업성이 강한 수필가의 수필집이란 명칭과 다른 이름(산문)으로 독서 시장에 내놓는 것은 아닐까.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강조할 것은 그런 행태에 관해 문제로서 비판할 일은 따로 없다는 점이다. 다만 수필가로서 이런 현상을 따져볼 것은 단 하나인데, 비문학으로 인식한 그 글이 수필가 수필과 어떤 점이 다른지를 찾아내거나 밝혀야 할 일이다. 만약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면 이것은 분명 상업 목적으로 명칭을 붙였다는 것을 실제 확인하는 셈이며, 이와 달리 수필가 산문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면 왜 수필이라 부르지 않고 산문으로 부른지 진정한 이유를 찾아내면, 유사한 제재로 다른 명칭의 글을 쓰는 소설가 산문은 어떤 면에서든 수필가의 작품 활동에 직간접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 수필문학 발전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일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4. 수필과 다른 산문
김훈 산문에서 가장 수필다운 글은 <떡볶이를 먹으며>다. 사물에 대한 접근 태도가 개인 감상인데다 어린 시절부터 체험한 떡볶이 기억을 환기한 뒤에 그 세태 변화를 신문기자 출신답게 분석한다. 시대 의미를 캐어들면서 자기류의 체험을 조정도 하며 자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개별 체험을 확대하여 시대를 보고, 체험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여 현재와 과거 기억을 융합시켜 어머니를 소환하여 그 정서 근처를 어루만진다. 이 글에서는 개인 김훈의 정서 면모를 드러내어 소설가의 너울을 벗은 인간적 실루엣을 만나게 한다. 이점이 수필다운 점이다. 수필문학에선 무엇보다도 그 작가의 인간다움, 혹은 일상속의 사람, 유명 작가로서가 아닌 그냥 사람 삶의 일단을 대면케 한다. 다시 말해서 수필에선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떠올릴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이게 수필을 읽는 맛이다. 이 <떡볶이를 먹으며>가 다른 산문에 비해 그렇다는 말이다.
이제 김훈 산문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문학적인 혹은 비수필적인 경향을 찾아보자. 이를 편의상 몇 개 항목으로 나누어 살피면, 첫째 각 편 글의 주제 설정, 둘째 글의 제재 선정, 셋째 문장과 문체, 넷째 구성, 다섯째 문학적 특성. 위 다섯 항목으로 글을 살피면 수필가 산문과 소설가 산문의 정체가 어느 정도 문학 수면에 모습을 드러낼 거라 기대한다. 왜 이런 항목으로 다루는지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이 요소가 수필을 읽거나 쓸 때 유용한 핵심 요소라는 것을 인지하기에 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즉, 이 요소들은 수필이란 글이 성립하기 위한 중요한 골격이자 혈맥이기 때문이며 이것을 갖추어 쓰는 것이 수필쓰기 요체라는 걸 수필가는 모두 인식할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먼저 주제 면을 살펴보자. “김훈 산문” 『연필로 쓰기』에 첫 번째 실린 글 <호수공원의 산신령>에서 보면 특정한 주제를 발견하기 어렵다. 상당히 긴 산문(22면, 대략 66매)인데 나름 일정 메시지를 찾기 힘든 글이다. 지난여름을 회상하며 지금 가을에 “20년째 일산 신도시에 살고 있”는 작가가, 20년간 호수공원 주변의 자연변화와 함께 달라진 세태를 그리는 글이라서 뚜렷하게 파악할 주제를 발견할 수 없다. 여러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내는 글에서 어렵게 추정하자면 변하는 자연과 세태를 바라보는 작가의 세상 인식 위주인데, ‘세상은 세월 따라 변해간다’ 정도 아닐까 싶다. 의미를 달아보자면 수필과 다른 거시성(巨視性) 주제라고나 할까. 이보다 더 긴 두 번째 글인 <밥과 똥>(29면, 대략 87매)도 역시 주제는 거대하여 그런지 세밀하게 붙잡을 주제는 모호하다. 잘 알다시피 주제란 어떤 대상과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면서 작가가 맥락 따라 자연스레 해석하여 설정하는 의미다. ‘밥과 똥’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다각도에서 풀어내지만 하나로 모아지거나 수렴되는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개인적인 ‘밥과 똥’에 관한 그간 체험에서 사회 문제를 찾아내어 거시 주제, 즉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 활동인 섭취와 배설 문제를 제기한다. 이 배설물 처리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자기 성찰에 이어 “말이나 똥을 말도 함부로 내지르지 말고 ~ 포식자의 부끄러움을 늘 기억하자”라는 다짐이 전부다. 이렇게 보면 일반 수필에서 자주 보는 것과 닮은 작가 반성과 각성으로 마무리한다. 글의 중간 어디에도 주제와 연결되는 언급을 찾기 어렵고 결미부에 이르러서 생뚱맞게 성찰적 반성을 내놓는다. 길게 벌여놓은 이야기에 비해 보면 너무 급작스럽고 사소한 주제로 결말을 지어서 허전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점은 글의 구성을 살필 때 상세하게 더 다루기로 하자. 세 번째 글인 <늙기와 죽기>는 주제가 미약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삽화로 구성한 글인데 각 삽화 사이 연결성을 찾기 어렵고 주제로 향한 통합성은 더욱 찾기 힘들다. 이렇게 서로 개별적인 이야기는 작가 의도대로 “늙기”와 “죽기”에 관련된다고 보아 이런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늙는 것과 죽는 것의 관계가 산문 글의 제목인 ‘늙기’와 ‘죽기’로 연관되는 것을 찾을 수 없고, 주제로 집약되는 것도 역시 만나기 어렵다. 있다면 그에 관한 작가의 관념 나열 또는 집합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 자성적 회한이 가세한다. 어떤 글일지라도 하나의 주제로 모든 내용이 모여야 한다. 길건 짧건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펼쳐놓았다고 글이 되는 것은 아니고 하나의 정리된 생각, 메시지 혹은 의미 곧 주제로 모이지 않으면 그냥 이야기 집합 덩어리일 뿐이다. 예컨대 운동장에 사람이 모여 있으면 단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와 열을 갖추어 한 사람의 지휘로 움직여야 쓸모 있는 조직으로 힘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을 속어로는 콩가루 집안이란 말을 쓴다. 글은 콩가루 집안이 되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콩가루 같은 글을 하나로 뭉치는 것, 곧 주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콩가루 같은 여러 유사한 이야기를 한 줌으로 뭉칠 수 있는 것이 안 보인다. 혹여 신문 기사는 주제가 없을 수도 있다. 특정한 사건을 시간 흐름대로 육하원칙에 이어 놓으면 된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기자라면 그 사건의 본질과 원인 따위를 직, 간접으로 드러내야 한다. 어디에서 누가 이러 저러한 사건을 일으켰다, 라고만 쓰면 기사로서는 충분할지 모르나, 그것이 일으키는 파장 혹은 사회 의미까지 담겨야 좋은 기사일 것이다. 즉 사설처럼 분명한 의미를 가진 글, 소위 주제가 있지 않으면 글로서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김훈의 산문에서 이런 주제가 미약한 면을 자주 발견한다. 네 번째 글인 <꼰대는 말한다>는 제목처럼 주제가 선명하다. 기성인으로서 세상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글이다. 비록 교시적 계몽성을 갖지만 주제가 없는 것보다 바람직하다. 주례사를 한 체험을 쓴 글로서 자족적이지만 자신의 “주례사는 대체로 실패했다”는 반성적 고백은 수필답다. 분명한 주제라서 수필로 보아도 손색없다. 이 주제에 대한 “꼰대의 말”에 공감할지 여부는 얼마든지 독자에 따라 다르지만, 주제를 분명하게 설정하여 작가 관점을 제시한 것은 앞의 글과 분명 다르다. 다음엔 세태 비판 글인 <동거차도의 냉잇국>은 제목부터 수필적이다. ‘세월호 3주기’에 부친 신문에 실은 글이지만 주제도 분명하고 작가 감상을 곁들여 사실을 적시하고 체험을 조화시켜 감상적으로 접근한 수필로 보인다. 지적 논리와 다중 시각을 종합한 점도 교설문학인 수필 성격에 부합하는 산문이다. 물론 작가는 수필을 쓴다는 의식 없이 쓴 산문일 것이지만 일반 수필보다 분량은 많아도 작가의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을 알아볼 수 있는 체험적 개성 인격이 가장 잘 드러난 수필이 분명하다. <이순신 1,2>는 소설 <칼의 노래>에 쓰지 못했던 것을 보충 설명하는 글로 보이며 김훈 소설가의 정치적 주관을 펼치는 글이다. 이순신 생애를 돌아보며 이와 동궤인 정치적 소신을 펴는 글엔 <이승복과 리현수>, 주제가 산만하여 여러 관념이 뒤섞인 글이라 하나의 주제로 통합할 수 없는 글인 <Love is touch, Love is real>, 개인 관찰 체험으로 사회 문제를 인식하는 글인 <아, 100원> 역시 작가의 사회적 발언이다.
김훈 산문은 특정 단일 주제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고 싶은 얘기의 핵심 메시지나 골자가 분명하지 않아도 소설가 특유 습성으로 이야기를 펼치고 싶은 만큼 분량에 상관없이 서술한다. 기자 생활 경험으로 사태를 분석하고 거기에 자신의 평소 생각과 지난시절의 체험을 곁들여 떠오르는 관념을 줄줄이 엮어낸다. 어쩌면 한 마디 주제로 묶을 수 없는 것, 묶고 싶지 않은 관련된 이야기 모음 같은 식으로 산문을 쓴다. 그러기에 자신이 갖는 이견에 대하여 독자의 반응은 괘념치 않겠다고 이미 서문에 밝혀 놓은 바다. 주제를 중심으로 글을 집중해 써야한다는 의식도 따로 없어 보인다. 그는 주로 장편 소설을 쓴다. 줄줄이 여러 인물이 등장하여 전후 사건을 만들고, 서로 인과의 얽힘으로 스토리를 플롯으로 구성하여 전개시키는 글에 익숙하다. 그런 점에서 일정 체험 분량에 엑기스만을 담은 수필가 글과 다르다. 수필이 단거리 경주라면, 소설은 마라톤이다. 출발하여 골인 지점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달리는 단거리 경주인 수필과 달리, 페이스를 조절하며 달리며 길 주위도 둘러보고 다른 선수도 곁눈질로 바라보기까지 하며 긴 시간 달리는 마라톤이 소설이다. 직업 마라톤 선수가 단거리 뛸 때는 어떻겠는가. 더구나 단거리 규칙에 상관 않고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리고 싶은 거리를 뛰는 셈이니 반드시 주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즉 도착 기록을 의식하지 않고 자족적으로 달리는 글이라, 주제도 분량도 제재도 특별히 의도하지 않는다. 적당히 달릴 수 있는 곳에서 뛰고 싶을 만큼만 뛰면 되는 글이 바로 김훈의 산문인 셈이다. 그는 널리 알려진 대로 자전거 마니아다. 그의 장편 소설이 자전거 타기라면 산문은 마라톤형 산책과 같다. “나는 밥과 똥과 대지의 순환과 그 단절에 관하여 말하려 한다.”에서처럼 주제에 관한 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주제는 상당히 비문학 현실 목적에 관한 것이다. 자신이 흥미를 갖거나 마음에 닿는 특이한 소재에 집중하여 소설의 핵인 허구성을 필요할 때 적당히 가미하여 독자를 향한 대중성과 통속성 혹은 상업성을 지향하는 글, 독자에게 향하는 계몽적이거나 설득적이고 정보적인 목소리도 알맞게 추가하여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이 시대 ‘꼰대’ 목소리를 들려주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꼰대라 부르는 사람이 듣건 말건 나는 할말,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되는 것이고 이것을 일찍이 책의 첫머리에서 ”알림“으로 당당하게 선언하기도 했다.
두 번째로 얘기해 볼 것은 김훈 산문의 제재 선정이다. 한 마디로 다종다양하다. 책의 편성은 총3부로 나뉘었는데, 제재 면에서 보면 제1부 제재는 작가 개인의 현재 시간에 맞춘 일상 체험, 인간과 인생관, 개인 취향과 감상 위주 등을 드러내어 수필 제재와 흡사하다. 작가의 인간적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 작가 내면 시선의 제재가 주류이다. 제2부는 개인 과거 체험에서 연상되는 분단 현실과 관련 깊은 정치성향 제재와 독서와 영화 감상문을 통한 세상 관찰 제재이다. 수필처럼 자성의 자기 내면으로 향한 ‘돌아보기’나 ‘들춰보기’가 아니라, 체험으로 ‘바라보는’ 세상 해석과 개별 의견을 보여주는 제재, 군대 생활 체험과 연관되는 제재가 다수다. 제3부는 신문 특집 기사성 관점과 성격으로 보이는 세상 관찰의 제재다. 이처럼 다소 거칠게 나눠본 바로는 개인 일상생활 체험에서 시간은 과거로, 공간은 주변으로 넓히면서 이 시각을 더욱 심화하고 확대하여 세상과 사회 저변에 대한 작가 관심사에 관한 의견을 펼치는 제재로 나뉜다. 수필 관점에서 보면 제1부에서부터 뒤로 갈수록 수필 유사도가 옅어진다. 즉 개인 체험을 중심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각성하며 깨우치는 ‘돌아보기’에서 점차 주위를 바라보며 세상 공간으로 넓혀가면서 그에 관한 작가의 관념과 의견을 펼치는 세상 ‘바라보기’로 달라진다. 그러면서 작가의 정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처음 시작하는 글에서는 수필과 가까운 쪽에서 출발하다가 점차 작가 의견을 펼치면서 논설화해 간다. 즉 신문의 사설과 칼럼을 닮아간다. 즉 문학 경계를 벗어나 사회평론과 논설로 향한다. 수필 문학으로 보기 힘든 잡다한 의견을 다룬 글, 산문으로 쓴 소설가의 잡문 모음일 뿐이다. 문장 유형의 공통인 ‘산문’ 이외는 함께 묶일 공통점이 없다. 왜 이 책이 “산문”인지 확연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당연히 “수필”로 볼 수 없게 한다.
세 번째는 문장이다. 앞에서 살핀 바대로 이 책은 산문 문장으로 쓴 잡다한 내용의 잡문 모음이다. 아무리 산문이라도 소설가 문장이라서 수필 문장과의 차별성이 있는지 살펴보거나 바라볼 수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문법의 주요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 즉 ‘서술어’와 ‘동사’를 혼동한다. 서술어는 문장 성분 명이고, 동사는 품사명이다. 이를 혼동해서 쓴다. 보기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주어 한 글자와 동사 한 글자만으로 구성된 이 차가운 문장은”(98면)과 “주어와 술어만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더이상 줄일 수 없는 이 단순한 문장들은”(146면)의 혼선이다. 한국어에서는 “주어+동사”란 맞지 않는다. 대신에 영어에선 “주어+술어”보다 ‘주어+동사’가 자연스럽다. 그런데 한국어 문장을 말하면서 김훈은 영문에서 어울릴 ‘주어, 동사’라 썼고, 반대로 영어 문장에서 한국어식으로 ‘주어, 술어’라 써서, 그가 혼동한 것인지 의도적인지 의문스럽다. 당연히 주어에 대응하는 것은 술어이고, 동사에 대응하는 것은 명사이다. 상식이지만 구차하게 말하자면 한국어는 동사와 형용사 또는 명사(서술격 조사 ‘이다’를 붙여)도 술어로 쓰인다. 반면 영어 술어는 오로지 동사만 가능하다. 이게 두 언어의 차이점이다. 이처럼 한국문법과 영문법의 혼동은 그의 불필요하고 어색한 영어식 이중피동형 서술어 사용에서도 확인한다. 예컨대 “말하여질 수 없는”(101면), “그렇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109면), ‘즉각 목이 베어졌다.“(110면), ”잡히면 베어졌다.“(112면) 따위다. 또 수필문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작가 자신의 체험 이야기이므로 언제나 화자는 1인칭이다. 그러므로 1인칭 화자를 뜻하는 ’나, 내‘를 쓸 필요도 없고 쓰면 걸리적거려서 문장이 군시럽다. 아래 예를 든다.
젊었을 때 나는 동물원에 자주 갔다. 동물들하고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나는 동물들을 좋아했다. 말을 건네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는데, 동물들 쪽에서 본다면 내 생각은 틀렸기 십상일 터이다. 그러므로 동물을 향한 나의 갈증은 순전히 짝사랑이고 동물들에게는 이해받지 못할 나 자신만의 몽상이라 해도 할 수 없다.“(「Love is touch, Love is real」, 140면, 밑줄 필자)
위 인용문은 한 문단으로 4개 문장이다. 여기에 작중 1인칭 화자를 가리키는 ‘나’가 6개이고, 거기에 ‘자신’까지 포함하면 7개다. 시문(詩文)이 아니라면 아무리 좋게 보아도 과도한 반복 사용이다. 위 글에서 밑줄 친 ‘나’를 모두 빼고 읽어보길 바란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수필가라면 이런 식으로 글을 쓰지는 않는다. 이런 보기는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발견한다. 김훈 작가만의 개성 문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네 번째는 구성이다. 김훈은 유명한 인기 소설가다. 그러므로 스토리를 플롯화하여 글을 구성하는 전문가다. 이런 특장을 그의 산문에선 잘 드러내지 않는다. 대부분 글이 작가의 상념 전개에 따른 나열식 삽화 구성이다. 동원한 글의 맥락이 긴밀하지 못한 경우에는 한 줄을 비워서 그것을 구분한다.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지평도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의 이야깃거리와 관련한 체험과 연상된 해석과 의견을 나열한다. 조금 상관성이 미약한 이어진 내용은 한 줄을 비워서 계속 이어간다. 그러다 보면 모든 글이 일반 수필문 분량인 10-15매를 훨씬 넘어선다. 단순 계산으로 일반 수필집의 두 권 분량에 해당하는 책에서 작품 수는 30편이다. 수필집으로 치자면 최소 80편에서 100여 편에 해당한다. 평균해 보자면 일반 수필의 대략 3배에 해당하는 길이의 산문이다. 이것으로만 보아도 수필집으로 보기는 곤란하다. 이 책에서 가장 수필다운 글인 「떡볶이를 먹으며」도 20매 정도다. 이 글보다 적은 분량은 한두 편이고 모두 더 길다. 즉 보편적인 수필 분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것은 김훈 산문 특성이자 수필과 아주 다른 점이다. 또한 소설의 1인칭 주인공 화자 시점이다. 다만 다른 것은 수필처럼 작가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작품 내 갈등은 미약하다. 이른 바 소설의 기본 특징인 자아(주인공)와 세계의 대결 스토리가 아니라,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과의 불편한 여러 체험과 지식과 정보 관점에서만 다소의 내면 갈등(부조화)이 있을 뿐이다. 작가의 상당한 관심사는 한국분단으로 일어나는 여러 세태의 관찰이다. 다양한 관점과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와 선뜻 화해하지 않는다. 그 거북함과 마땅치 않음을 “꼰대” 처지에서 그는 비판하고 의견을 펼치고 주장한다. 이런 방식의 글에서는 어쩌면 문학적 구성이 필수적이지 않다. 말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관련된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그 관련 생각을 펼치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 입장을 배려하여 흥미로운 구성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독자는 구성 효과보다 작가가 펼치는 체험과 지식 정보와 그 의견과 해석에 흥미와 관심을 갖고 동의하고 공감하면 되는 것이다. 바로 산문 본질에 부합하는 점이다. 훌륭한 소설 구성의 기법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면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말하자면 구성 형태로서 술(述)보다 교(敎)에 더욱 큰 가치를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기 때문이다. 글 제재에서 보자면 기자가 취재한 르포 기사문에 흡사한 내용도 있고 사설과 논설 칼럼과 유사한 것도 여럿이다. 때문에 김훈 작가가 가장 무심하게 다룬 것이 바로 구성일 터, 이점 수필과 매우 다른 점이다.
끝으로 문학적 특성 사항이다. 김훈은 이 책에 실은 산문을 쓰면서 문학 작품을 쓴다는 생각은 거의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소 느슨하게 약간 편안한 심정에서, 소설을 쓰면서 쌓이는 연필 ‘똥’ 분량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심리적 부담은 덜했을 것이다. 물론 글쟁이는 어떤 글을 쓰더라도 특히 지면에 발표할 글은 전심으로 쓴다. 다만 글의 종류에 따라 그 정도에서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아마도 소설 쓰는 것보다 그에게는 이런 유의 산문이 싱거운 작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때문에 수필 문학의 관점에서 이 책의 글을 읽으려 한 시도 자체가 애초부터 무리일 수도 있다. 문학 창작 본업인 소설가로서 쓰는 글이 아니라, 일종의 부업으로서 쓴 글, 프로 스포츠 선수가 가볍게 몸을 풀듯이 쓴 글인 셈이다. 문학은 아니어도 문학 언저리 글로써 밥벌이의 한 마당이 될 수 있다면 전업 작가의 생계를 위한 외도(?)에 나선 셈으로 보아도 되지 않겠는가 싶다. 이런 의도의 글을 어쩌면 괜히 시비 대상으로 삼아 헛된 힘을 쏟은 것은 아닌지 자평하는 마음도 없지 않다. 하지만 변명삼아 덧붙이자면 많은 이들이 ‘에세이집’ 혹은 ‘수필집’을 출간하는 마당에 저명한 소설가가 너무나도 평범한 ‘산문’으로 명명하는 것에 궁금증이 일었다. 혹시 그런 명명이 어떤 저의가 있는지 의심도 들고, 수필가로서 도움 받을 수 있는 무언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여 살펴본 것이다. 종합하여 보면 김훈 산문은 여러모로 수필 문학에 포함시키기는 어렵다는 판단이다. 역시 그도 이 글이 수필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여 무난한 명칭인 ‘산문’으로 펴낸 것이란 결론이다. 그는 ‘수필’이란 문학 명칭을 써 독자를 혼동시키지 않고 글과 책의 성격을 정직하게 밝힌 셈이다. 세상에는 수필답지 못한 수필도 넘쳐나고, 수필이 아닌데도 수필집이라 타이틀을 붙인 책이 횡행하는 세태에 비추어 매우 온당한 행위라 보인다. 수필에서 거의 필수적인 고백과 자성으로 작가 약점을 드러내며 스스로 치유의 힘을 얻는 수필가와 달리 김훈 산문은 지식과 정보의 우월한 장점을 표출하며 권위주의적이나 소소한 스토리 중심으로 교시성 설득과 설교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하다 보면 문학 진실의 탐구 자세는 미약하게 되고 이는 일정 길이와 분량을 의식하는 수필가 관점과 어긋난다. 대부분 글이 상당량 초점이 풀어지는 구성이나 허술한 짜임을 노출하며 일종 꼰대의 수다 또는 요설을 노정한다. 이러하니 독자는 이 “김훈 산문”을 읽으며 긴장하거나 몰입할 필요 없이 적당히 동의하며 때로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읽으면 맞춤할 것이다. 한적한 바닷가 파도소리를 들어가며 살랑대는 바람도 머리칼로 느껴가며 읽다가 한편에 밀쳐놓아도 좋은 책, 갈매기 소리에 문득 다시 들고 한줄 읽어가며 시간을 낚기에 괜찮은 글이라 보겠다.
첫댓글 길어서 세세히 다 읽지는 못했어도
대체로 이런 류의 '유명인의 산문 내지는 수필'에 대한 생각은 전해집니다.
공감하는 부분도 많구요.
탄탄한 논리의 바탕이 없으면 산문이라지만 김훈이라는 대작가의 글을 요리조리 분석하는 일.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이지 싶네요.
나중에 찬찬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방민 교수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산문이라는 용어는 편하게 산문 형식으로 쓴다고 할 때 쓰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