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리 거창하게 시작하려고?
70년대 초였을게다. 당시 박경리선생이 토지를 완간(아마 1부)했을 때였지 싶다. 삼성출판사에서 토지 전집을 냈던 게 대박을 쳐서 엄청 돈을 벌었다. 독자한테 보답하겠다고 전국 지사를 동원해서 고장마다 "독서가족" 운동을 펼쳐서 신문에 떠들석하게 보도가 되곤 했다. 물론 자기들 책 많이 팔겠다는 마케팅의 일환이었겠지만, 좋은 일을 한셈이다. 우리 고향에도 독서가족운동이 시작됐다. 현재 지례예술촌 촌장으로 계신 김원길 시인하고 소설가 김주영씨, 세상을 떠난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도 참여했지. 매월 한 번 예식장이나 다방 같은 데서 그 달의 주제를 가지고 발표가 있은 다음에는 활발하게 토론을 벌였다. 주제는 문학, 역사에다가 음악 감상에서 미술까지 참 다양했다. 고급 문화를 접하기 어려운 지방에서 문화 살롱 역할을 해낸 거로 자랑할만 했다. 회장이니 총무같은 감투도 없었지만 자연 김주영 선생과 김원길 촌장이 주관하는 편이고 심부름 하는 내가 총무격이었지요. 서울서 가끔 술먹을 자리 찾아 오는 황석영하고 조해일, 이문구 선생이 오면 술자리에서 술심부름 하느라 문인들과 안면은 트고 지내느라 맨날천날 술에 쩔어 살았더래요. 서점 점원하느라 시인, 소설가들은 나를 무시할 수 없었지요. 내가 권하는 책은 시골 읍네 고객들에게 꽤나 먹혀들어갔어요. 자랑 하나 더할까요. 박목월, 손소희, 서정주 선생 같은 분도 서점에 들러서 제 손을 꼭 잡아주면서 부탁한다고 해서 내가 대단한 힘이 있는 줄 알았어요. 김주영선생은 하루에도 서점에 두세 번은 꼭 들렸는데 막걸리 사준 걸 많이 마셨지요. 술인심은 넉넉했어요.
어느 해던가, 김주영선생이 발표한 것은 "우리나라 문학작품에 나타난 사랑의 현장" 이었다. 소설가로 막 입신한 김주영 선생은 대단한 멋쟁이였다. 큰 키에 후리후리한 모습이 엔간한 영화배우보다 잘 생겼어. 하지만 그 양반의 품성은 겉모습을 훨씬 뛰어넘는다. 소탈하고 세련되지 못한 입담이 오히려 사람을 휘어잡고마는 그 무엇이 있다. 엽연초 조합 주사가 당시의 김주영 선생의 직장이었지.
서론이 너무 길었네. 우리나라 문학 작품에 나타난 사랑의 현장이 어디일까 한번 맞춰보실까? 일등은....짐작대로 물레방아간이고 두 번째로 빈번하게 나온 곳은 보리밭이래요. 그리 생각했다고? 퀴즈로 냈다간 상품만 뺐길번했네. 그리고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물레방아간을 당시 상영된 김지미하고 박노식 주연의 영화를 예로 들어 설명했지 아마. 하지만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긴 바로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라고. 째째하게 초등학교 시절 이야길 꺼낸다면 퇴장하게나. 텔레비에 보면 유명짜한 양반들 첫 사랑 이야기가 나오면 어느누구할 것 없이 초등학교 때 짝꿍을, 선생님을 꺼내더라고. 그건 내밀한 사랑 타령을 하다가 부인한테 바가지 긇히기 싫다는 거 아니겠어. 최소한 고등학생 정도는 돼야 이성간에 피어오르는 아련하고도 마음을 달뜨게 하는 연정이 소록소록 떠오를 게 아니겠어?
그 시절 가난한 연인들이 가는 곳이 어디겠어. 강변 따라 둑방길을 걷는 거지. 우리 고향은 낙동강이 길게 똬리를 틀고 지나갔어. 황혼녘엔 물비늘이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물에는 고기들이 뛰어오른곤 했어. 달빛이 좋은 날에는 백사장이 유독 새하야서 파스텔톤같이 신비스러웠다고. 아~ 미술 시간에 처음으로 파스텔을 써봤기에 파스텔이 주는 환상적인 색감을 잊을 순 없지. 강둑길을 걸어가면 가슴이 다 뚫렸어. 지금도 우스운 에피소드가 있다네. 강변 길은 둘이서 걷기에 딱 알맞은 폭이었어. 걷는 발걸음이 많아지면서 풀이 나지 않은 곳은 단단한 흙길이 났는데 풀이 무성한 가운데를 빼고 가장자리로 두 줄로 흙길이 죽 뻗어 있었지. 문제는 개구장이들이 가장자리 풀을 가운데 풀과 묶어 놓으면 걷다가 발이 걸려서 쓰러지기 안성맞춤이었어. 그걸 어려서 내가 많이 했는데 앙갚음을 당한 거야. 내가 데이트할 때 여자가 발이 걸려서 넘어지면서 무릎이 까져서 피가 흐르더라니까. 불같이 화를 냈지만 어쩔거야. 내가 어려서 한 짓 때문에 어느 누군가의 연인이 그렇게 낭패를 당했을 거 아냐. 더우기 굽이 높은 하이힐 뒷굽이 부러지는 불상사는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다고. 우리가 사는 읍내에는 물레방앗간이나 보리밭은 없었으니 강둑길이 제일 좋은 데이트 코스였다고 할 수 있지. 그렇다고 극장엘 갈 수는 없었어. 걸리면 정학인데 어떻게 여학생이랑 극장엘 가겠어.
야외에서 데이트할 때 말고는 찐빵이나 만두를 팔던 빵집이 제일 흔한 현장이 아니었을까. 참고서 산다고 돈을 삥친 날은 고기만두도 시켜 먹었다니까. 그 다음은 중국집, 야끼만두가 제일 인기랬지. 야끼만두란 요즈음 군만두라 그러지 왜. 맛도 좋았지만 사실 청요리는 이름을 아는게 그거 하나였어. 탕수육처럼 고급 요리는 언감생심이라고 어림도 없어. 데이트할 때 짜장면 시켜먹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입 주위로 시커먼 짜장국물 자국이 나면 어떡하라고. 난 청요리집은 질색이었어. 왜냐고? 청요리에 빠져서는 안 될 반찬이 양파가 아니던가. 다마네기를 짜장에 찍어 먹고난 뒤 입냄새 풍기며 어찌 분위기 살면 입맞춤이라도 할 참이면 끔찍하지. 야~ 넌, 고등학생이 뽀뽀도 했단말인가? 아이고~ 아재요, 그게 아이고요 청춘남녀가 만날 때 뽀뽀 같은 유쾌한 상상도 못한단 말입니껴. 하기사 꿈엔들 어찌 입맞춤을 했을까만.
그런데 왜 남의 이야기하듯 무심한 거야? 눈치가 빠르시네요. 그런 찐빵집에서 놀 만큼 제가 촌스럽지 않았거든요. 시내에 베이커리가 막 생기기 시작한 참이라 베이커리에서 떡하니 곰보빵(소보로)이나 단팥빵, 크림빵 같은 고급 빵으로 시켰다니까요. 아직도 베이커리에서 빵을 시켜 먹던 날을 잊지 못해. 접시에 놓인 서양빵 서너 개에다가 가지런하게 놓인 포크가 놓인 테이블이 얼마나 날 감동 시킨 줄 아세요. 우스운 이야길 하나 할까봐. 당시엔 식빵을 시키기도 했어. 굽지도 않은 식빵 두어 조각에 설탕종지 하나에 물그릇이 따라나왔다고. 어떻게 먹느냐고? 포크로 찍은 식빵을 물에 적시고 난 다음에 설탕에 찍어먹었다는 거 아닙니까. 후후 별나게 먹었다고? 어디서 유래한 법인지 몰라도 식빵을 그렇게 먹었다요. 나중에 토스트란 집에서 식사대용으로 먹는 걸로 알게되자 별나게 먹던 방법은 금새 없어졌다네.
하여튼 베이커리에서 데이트를 하는 별종은 아마 내가 처음이었을 게야. 여학생들은 기가 팍 죽더라고. 골목길에 자리한 찐빵집에서 무럭무럭 김이 나는 찐빵을 먹는 친구들과는 달라도 아주 달라보이지 않았을까. 사실 여간 멋쟁이가 아니었지. 우아하게 포크로 서양빵을 찍어서 오물오물 먹는 여학생들의 입모습조차 예쁘더라고. 입가심으로 살짝 덥힌 우유를 마시는 장면은 바로 미국 영화에 나오는 귀족들의 디너같더라니까. 그래 잘 났다. 나이프를 들고서 돈까스라도 썰었다면 아주 기절했겠구먼. 잘 아시네. 그건 대학생이 되어서야 해봤거든.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데이트할 때 서로 어떻게 불렀을까? 호칭말이야. 이름? 아니. 그럼 뭐라고? 후후 웃지마, "학생요!"라고 불렀지. 에이 그게 뭐야. 정 떨어지게 학생요가. 글세 다른 고장은 몰라도 우린 그렇게 불렀어. 요즈음, 국민학교 동창회에 가면 여자 동창들 보면 "야~ 가스나야" 하고 과감하게 부르지만 그땐 머뭇거리며 간신히 조그맣게 불렀지 "학생요!" 하고. 지나고 보니 이것도 괜찮네 그치요?
사실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건 다방인데 베이커리에서 노닥거릴 수 없지. 그럼 진도 나가볼까요. 고등학생이 다방 출입을 했단말이야? 그럼, 다방엘 가봤다고. 너 알고 보니 아주 몹쓸 학생이었던가보네. 에이, 그렇게 참을성이 없어서 어쩐다요. 우리 선배가 다방에서 시화전을 했걸랑요. 신세훈- 펜클럽회장을 지낸 시인-선배가 베트남 참전을 하고 돌아와서 시화전을 한다기에 얼른 가봤다요. 시가 문제가 아니라 다방이 어떻게 생겨먹은가 무척 궁금했거든. 그 당시 다방은 어른들 사랑방이었고 문화살롱이라고 해도 좋을 거야. 시화전에다가 그림 전시회에 서예전까지 전시할 수 있는 유일한 문화 살롱이었다고. 책가방을 들고서 뻘쭘하게 서서 벽에 걸린 시를 보다가 어른들이 레지들하고 희희덕거리는 모습을 엿보며 어른들한테 가졌던 존경심이 사라지는 걸 경험했지 뭐. 신세훈, 선배는 대단했어. "삐에뜨남 옆서" 시집에다가 흘려 쓴 펜글씨로 사인이란 걸 해주더군. 야~ 나도 시인이 돼야지 하고 맹세까지 했다니까. 얼마나 멋진 일이야. 머나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시인이 그린 베트남 여인의 아오자이처럼 희고 말간 얼굴이 막 떠오르는거야. 말도 안 돼. 야~ 딴죽 걸지 마. 월남여자는 무조건 까무잡잡해얄까. 시인은 분명 아오자이 베트남 여인과 달콤한 연애를 했을 거 같더라고. 총알이, 포탄이 터지는 전장에서 맺어진 사랑은 얼마나 달콤할까 하고 턱도 없이 부러워했다고. 나중엔 박영환이라고 "머나먼 쏭바강"이라는 소설을 쓴 양반한테 물어봤지. 월남 여잔 다 까무잡잡한가? 천만에 사이공에서 잘 사는 집 딸들은 하얗대요. 아오자이, 이국여자하고 연애 걸 때는 희고 말간 얼굴로 보였겠지. 그걸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고 하지. 한심하다고 우리가? 자유를 위해 목숨 바쳐 전장터에 간 전우들 한테 기껏 연애질이나 하러 간걸로 오해하는 우리가? 우리가 월남 참전한 마지막 세대였어. 우리 땐 돈 써가며 월남에 갔다니까. 친구들 한테 물어봤지. 연애질이나 해 봤던가? 말마쇼. 눈에 선연한 거는 밀림과 쉬도 않고 달려들던 그악스런 모기떼밖엔 없었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마음놓고 다방을 출입해보니 별 거 없더구먼. 그건 극장이나 다방도 마찬가지였더고. 못 가게하니까 가고싶어 몸살이 나지 가라고하면 별 수 있간데. 그 시절 젊은이들이 갈 곳은 다방밖에는 없었어. 아~ 막걸리 마시는 선술집이 있었구먼. 그래도 처음 만난 여자랑 술집은 좀은 곤란하지 않을까. 커피, 맛도 쓰기만한 걸 폼잡고 시켜야 했어. 어짜피 남여간의 상열지사는 폼생폼사가 아니던가. 씁쓰름한 커피를 넘기고나면 왠지 입 안에는 뭔가 씹히는 듯 했어. 나중에 알고보니 커피 한 통(물론 미제 피엑스에서 산 미제 깡통)에 커피를 몇 잔 내는가에 다방 주방장 월급이 달라진다 하더라고. 그래서 커피에 담배 꽁초가루도 넣는다는 말도 있었어. 물론 확인 되지 않는 말이었어. 중국집 짜장면에 뿌려먹는 고추가루에는 톱밥 가루가 섞였다는 건 사실이야. 신문에 났더라니까. 그리고 어느 다방이나 가면 천편일률적인 것은 찻잔이었어. 하얀 자기로 만든 잔- 자기는 커녕 사기로 만든 거-에다가 둘레에는 초록색 또는 푸른 테두리를 하나 거나 두 줄 두른 거였어. 질렸어. 붕어빵 같이 찍어낸 거에 대한 반항심은 내 체질인가 봐. 또 설탕이거나 프림은 따로 주질 않았어. 천편일율적으로 그냥 타서 내왔다고. 맛은 지금 봉지 커피맛이야.
색다른 풍습은 음악을 틀어주는 또 다른 음악감상이었어 다방은. 대학가에 자리한 다방엔 디제이가 음악을 틀어줬다고. 클라식을 틀어주는 다방이 있는가 하면 팝송을 틀어주는 곳도 있었지. 대학가를 벗어난 다방에는 대중가요, 뽕작을 틀어주는 게 일반적이었어. 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가 주로 가정교사였던 시절이지만 다방 디제이도 제법 많았어. 다방에서 빠져서 안될 사람은 당연 레지였어. 레지가 커피를 내오면 우린 신청 음악이 적힌 쪽지를 주면 레지가 그 쪽지를 디제이한테 가져다 줬지. 예쁜 여학생이 시킨 신청곡은 단번에 틀어줬어. 가끔 데이트 신청도 들어오고 디제이는 괜찮은 아르바이트 자리였어. 어떻게 그리 상세하게 아느냐고? 제가 한때 날렸던 디제이였거든요. 남사스럽게 디제이한 걸 자랑하냐 덜 떨어진 놈아. 우얍니껴. 그래야 여학생하고 말이나 터 보지요. 지 같이 경상도 사투리 쓰는 놈 어디 데이트 한 번 해볼 수 있는 줄 압니껴. 드라마에 보면 도끼만한 빗을 꼽고 다니는 그런 골빈 디제이는 아니었다고.
레지뿐 아니라 다방 마담한테 잘 보일려고 다방엘 엄청 드나들었던 적도 있어요. 뭔 소리래. 니가 그리 조숙했더냐? 그게 아이고 청자 담배 얻어 피울려고요. 뭐라카노. 담배는 담배포에 가서 사면 안 되나. 아이씨더. 그 당시 청자 담배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담배포에는 씨가 말랐고 다방에도 자주 오는 단골한테만 마담이 치마폭에 숨겨서 슬쩍 하나 주곤했심더. 청자 담배는 포장부터 남달랐니더. 금박으로 포장한 담배갑이 진짜 금종이로 착각했다니까요. 전매청이 생긴 이래 청자만치 인기가 짱인 담밴 없었을 기라요. 우예 돈(프리미엄)이 붙었을 정도로 짱이었지요. 박대통령이 피운 담배도 이거라카니까. 그래 청자 다방이라고 명륜동 가는 길 입새에 있던 다방 마담이 날 이쁘게 봐줘 청자를 친구들 몰래 두어갑을 내 주머니에 찔러 주던 걸. 고시 공부하느라 고생한다고. 무슨 고시 공부라고? 제 직업이 고시생이었거든요. 눈치 채셨구려. 고시 공부는 안 하고 고시 공부한답시고 떠들고 다니는 놈을 일러 고시생이라고 했지요. 그냥 실업자라하기에는 자존심이 있어서.
무신 쓸데없는 잡담이 많았네요. 여학생들하고 만날 때 가끔은 써 먹은 작전이 커피 대신 완숙을 시키기도했시유. 사실 완숙 또는 반숙이 내겐 훨 입에 맞았다고. 배 고픈 놈이 달걀 바짝 익힌 놈이나 반쯤 익힌 놈을 먹어야 배라도 부를 거 아이요. 사실 그래야 돈값을 톡톡히 하는 거고. 그럼 서울 처녀들이 고학생이 불쌍하다고 점심이거나 저녁을 배불리 사 주더라고. 이그~ 이 놈아 어디가서 눈치만 백 단이라 쯧쯧. 하몬하몬, 저요, 하숙집에서 혼자 달걀 후라이 몰래 얻어먹는 눈치 하난 끝내줬다고요.
이제 다방 입문한 걸로 첫 번째 우리들의 사랑의 현장 이야기 하나 끝낼 게요. 하나 정도는 남겨둬야 할 거구먼. 기둘려요. 외고편이라 하고 본편이 얼마나 재미 난 건지 두고 보시라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