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29) 제목은 시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 ① 음식점 간판과 음식의 맛/ 시인 안도현
제목은 시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jeonclaire/ '시집 출판 프로젝트' 2기 2주차 미션- 시의 주제 정하기. 시집제작
① 음식점 간판과 음식의 맛
나는 음식점을 고를 때 간판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간판에 적힌 상호, 간판의 크기, 글자체, 디자인에 따라
그 음식점의 역사와 음식의 맛을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조’라는 말이 붙어 있으면 일단 의심한다.
역사성의 과잉이거나 후발주자의 과장 광고일 수도 있다.
또 무슨 텔레비전에 출연했다고 요란하게 써 붙인 곳이 있으면 경계한다.
그게 설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맛없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는 문장도 아주 싫어하며,
할인가격을 보란 듯이 써 붙여 놓은 음식점도 꽝이다.
또 있다. 터미널 앞 식당가처럼 한 집에서 조리하는 음식의 수가 많아도 기피 대상이다.
최근엔 ‘웰빙’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간판을 달고 있는 보리밥집에는 아예 들어가지 않는다.
웃기고 있네, 비웃어주고 만다.
한 끼의 밥을 먹기 위해서도 이모저모 간판부터 살피는데, 하물며 시에서 간판이라고 할 제목을 어찌 소홀히 다룰 수 있으랴. 연암 박지원은 글을 병법에 비유하면서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이란 적국과 같다”는 문장을 남겼다. 성벽에 올라 단숨에 사로잡아야 하는 적처럼 글을 쓰는 이는 제목부터 장악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 조선 후기의 홍길주(洪吉周)는 “글이란 살아 있는 물건이어서 크게 할 수도 작게 할 수도 있다. 각기 그 제목을 따를 뿐이다. 되(升)들이의 용량을 제목으로 삼았으면 홉(籥)으로 만들어서도 안 되고, 말(斗)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만약 작(勺)이나 홉, 되, 말을 가리지 않고 모두 열 말, 즉 곡(斛)으로 만들어버린다면 이것이 대체 어떤 모양이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제목이 내용과 걸맞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북악은 창끝처럼 높이 솟았고 北岳高戌削
남산의 소나무는 검게 변했네. 南山松黑色
송골매 지나가자 숲이 겁먹고 隼過林木繡
학 울음에 저 하늘은 새파래지네. 鶴鳴昊天碧
박지원의 「극한(極寒)」이다. “스무 글자 어디에도 춥다는 말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다.
다만 그저 경물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제목마저 없었다면 무슨 이런 시가 있느냐고 했을 법하다.
시인은 제목에서 몹시 추운 날씨라고 분위기를 잡아놓고서,
정작 시 속에서는 추위에 대한 묘사를 예상했던 독자의 기대를 외면하고 딴청을 부렸다.
여기에서 의미의 단절이 생긴다.
단절을 채워 제목과 본문을 잇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긴 것이다.
시의 제목을 이승하는 ‘첫인상’이라 했다.
작품의 첫머리에 나서는 제목은 독자에게 지워지지 않을 인상을 남기게 된다는 말이다.
또한 강연호는 ‘이름’이라 하였다.
그는 “한 편의 시작품은 여러 부분이나 요소들이 모여 전체의 구조를 이루는데,
이때 제목은 전체 구조를 한곳으로 응집하는 역할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조의 확장에 기여하기도 한다”면서
제목을 정할 때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 본문의 주제나 내용과 일정한 조화를 이루도록 할 것.
둘째, 너무 거창하거나 추상적인 제목은 피할 것.
셋째, 본문의 내용을 모두 풀어 제시하는 제목은 피할 것 등이다.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백석의 「멧새 소리」 전문이다.
시의 전면에 멧새 소리는커녕 멧새가 빠뜨리고 간 깃털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처마 끝의 명태와 이를 동일시한 시적 화자 ‘나’만이 꽁꽁 얼어 있을 뿐이다.
백석은 왜 이런 제목을 택했을까?
독자가 전혀 뜻하지 않은 의외의 제목을 제시함으로써
제목과 내용 사이에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노리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시각과 촉각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이 시의 배경음악으로
멧새 소리를 삽입해 청각적 효과를 가미한 것일까?
후대에 이 시를 읽는 독자인 우리가 심심해 할까봐 일부러 그랬을까?
(이 짧은 시 한 편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접었다 폈다 하는 이유도 시에서 제목이 그만큼 중요한 탓이다.)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2. 6. 6.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29) 제목은 시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 ① 음식점 간판과 음식의 맛/ 시인 안도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