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34) 인사이더, 나도 그들이 되고 싶다 - ③ 연예인 걱정을 하는 밤/ 시인, 한양대 교수 정재찬
인사이더, 나도 그들이 되고 싶다
Daum카페 http://cafe.daum.net/dusdlakf2/ 별이 빛나는 밤에,
③ 연예인 걱정을 하는 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다시 용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아픔에 눈 감고, 세상의 고통을 잊고, 난세의 저 영웅들의 판타지에 빠져듭니다.
어차피 세상은 내가 아니라 ‘엑스맨’이나 ‘어벤져스’가 구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영화나 게임의 서사가 중세 북유럽의 판타지에 기대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현실계는 사이버세계에 의해 대체되고,
소설로 맺었던 네크워크는 소셜네트워크가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미디어 시대라 불리는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아주 쉽게 대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가상연애 예능프로그램을 들 수 있을 겁니다.
저 사람들이 진짜 연애를 하는 걸까? 흉내 내는 걸까?
의심하면서도, 설정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주인공들처럼 아슬아슬한 감정,
‘썸 타는’ 기분을 함께 느끼곤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예 그들이 실제 연애를 하는 거라 믿기도 하고,
그리하여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감정을 공감하는 놀라운 사태가 벌어진답니다.
이러다 보면 굳이 연애를 하지 않아도 될지 모릅니다.
가상의 체험으로 연애의 감정을 대신하면 될 테니까요.
이러니 연예인의 실제 연애담 기사라도 나면 자기 일보다 더 심각해집니다.
더구나 그 연예인의 팬이라면 웬만한 친구 일보다 마음이 더 바빠집니다.
그런 날은 온·오프라인을 오가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 일을 화제에 올리며 호들갑 떨기 일쑤이죠.
다들 인싸가 되는 그 기분, 그 마음은 십분 이해합니다.
저도 그래요. 스타가 남입니까.
하지만 그래서 제가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가장 쓸데없는 일이 연예인 걱정하는 거다”입니다.
물론 걱정해줬다가 낭패와 실망과 배신감마저 안고 돌아서야 했던 경험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만,
세상에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을 빌어줘야죠.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 사람들인데, 이렇게라도 말입니다.
김혜수의 행복을 비는 타자의 새벽
성미정
잠에서 깨버린 새벽 다시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생뚱맞게 김혜수의 행복을
빌고 있는 건 인터넷 메인 뉴스를 도배한
김혜수와 유해진의 열애설 때문만은 아닌 거지
김혜수와 나 사이의 공통분모라곤
김혜수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신혼 초 살던 강남 언덕배기 모 아파트의
주민들이었다는 것
같은 사십대라는 것 그리고
누구누구처럼 이대 나온 여자
가 아니라는 것 정도지만
김혜수도 오늘 밤은 유해진과 기자회견
사이에서 고뇌하며 나처럼 새벽녘까지
뒤척이는 존재인 거지 그래도 이 새벽에
내가 주제 높게 나보다 몇 배는 예쁘고
돈도 많은 김혜수의 행복을 빌고 있는
속내를 굳이 밝히자면
잠 못 이루는 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오늘처럼 잠에서 깨어나는 새벽도
남아도는데 몽롱한 머리로 아무리
풀어봐도 뾰족한 답이 없는 우리 집
재정 상태를 고민하느라 밤을 새느니
타자의 행복이라도 빌어주는 편이
맘 편하게 다시 잠드는 방법이란 걸
그래야 가난한 식구들 아침상이라도
차려줄 수 있다는 걸 햇수 묵어
유해인 타짜인 내가 감 잡은 거지
오늘 새벽은 김혜수지만 내일은 김혜자
내일모래는 김혜순이 될 수도 있는
이 쟁쟁한 타자들은 알량한 패만
들고 있는 나와는 외사돈의 팔촌도 아니지만
그들의 행복이 촌수만큼이나 아득한 길을
돌고 돌아 어느 세월에 내게도 연결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사실 나는 이 꼭두새벽에
생판 모르는 타자의 행복을 응원하는
속없는 푼수 행세를 하며 정화수를 떠놓고
새벽기도 하는 심정으로 나의 숙면과
세 식구의 행복을 간절히 빌고 비는
사십 년 묵은 노력한 타짜인 거지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문학동네, 2011)
이 시를 이해하려면 먼저 어떤 남녀 배우의 연애담과 그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 영화 정보를 알아야 하겠죠.
만나본 적도 없는 남녀의 러브스토리와 필모그래피에 관한 정보라니 굉장한 지식에 해당할 것 같은데,
실상 우리 중에 웬만한 사람치고 그걸 모르는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인데 마치 친근하기라도 한 양,
우리는 연예인의 별별 소식을 시시콜콜히 알고 있잖습니까?
알고 싶어 해서기도 하지만, 알고 싶지 않은데도 자꾸 온갖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알려주지 않습니까?
이 시의 배경은 배우 김혜수의 열애설이 각종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도배한 날입니다.
그날 새벽에 잠이 깨어난 화자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생뚱맞게 김혜수, 자신과 공통점도 하나 없고 자기보다 몇 배 예쁘고
돈도 많은 그 김혜수의 행복을 빌어주면서 말입니다.
천하에 쓸데없는 연예인 걱정을 하고 있는 이유를 그녀는 어떻게 합리화할까요?
오늘밤 김혜수도 기자회견 걱정에 밤잠 못 자고 있으리라는 동병상련 때문일까요?
화자는 능청과 자조를 섞어 유머로 답합니다.
자기가 밤잠을 못 이루는 것이 정작 집안의 재정 문제 때문이지만 고민한다고 해결되지도 않을 터.
그 시간에 타자의 행복을 빌어주는 덕이라도 쌓으면, 그 덕에 잠 잘 들고 일어날 것이고,
그러면 식구들 아침상이라도 잘 차려줄 테니 이게 노름에서 이기고 따고 벌고 남은 것 아닌가.
김혜수 아니라 김혜자면 어떻고 김혜순이라고 다르랴.
비록 지금 내 패는 별로지만 내가 빌어준 복이 돌고 돌다 보면 내게로 돌아오지 말라는 보장도 없지 않으냐.
그러니 생판 모르는 타자들의 행복을 빌어주는 푼수처럼 뵐지라도,
이래봬도 내가 타짜인 것이다.
이 시니컬한 자기만족과 자기 비하야말로 우리가 각종 미디어와 SNS 속에서 겪고 있는 일상이 아닐는지요.
오늘도 어느 인싸의 호캉스와 해외여행과 먹방과 반려견과 잘 나가는 소식에 ‘좋아요’를 누르며
그이의 행복을 빌어주다가, 한편으로는 타자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에 고개를 젓다가,
다른 한편으로는 속물스럽지 않은 자신의 건강함에 대해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는지요.
요즘 우리는 그것을 ‘정신 승리’라고 부르죠.
루쉰(魯迅)의 소설 《아Q정전(阿Q正傳)》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성취욕은 강하지만 시정잡배에게조차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아Q는 동네 건달들에게 얻어맞고선
“내가 자식놈에게 얻어맞은 걸로 치지. 요즘 세상은 돼먹지 않았어”라며 속으로 의기양양해합니다.
이를 두고 소설 속에서 정신적 승리법이라 일컫습니다.
모욕을 받아도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적 승리’로 치환해버리는 주인공 아Q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 속에서도 자존심만 비대했던
당시의 청나라와 중국민족을 빗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과도 많이 겹치는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정신 승리의 건강한 측면을 인정하고 옹호하는 편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정신 승리라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고요.
하지만 자신까지 속이면 곤란합니다. 아니, 위험해집니다.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정재찬, 인플루엔셜, 2020)’에서 옮겨 적음. (2022. 7. 3.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34) 인사이더, 나도 그들이 되고 싶다 - ③ 연예인 걱정을 하는 밤/ 시인, 한양대 교수 정재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