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에게 복이 있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장)
산 위에서 주어진 첫 말씀 (5-7장)
유대인들이 주된 구성원이었던 어느 신앙공동체의 저술로 알려진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 독자들에게 친숙한 모세의 흔적과 오경(五經)의 요소들이 발견됩니다. 유아 대학살과 이집트로의 피난과 귀환이라는 예수 출생 이야기의 구성이 모세를 연상시킵니다(마2장). 그리고 마태복음이 예수의 말씀을 다섯 군(群)으로 집대성하여 기록했다는 사실에서, ‘다섯 두루마리’라고도 일컬어지는 오경식 구조가 엿보입니다. 산상수훈(5-7장), 제자들 파송 연설(10장), 비유 연설(13장), 공동체(교회)에 관한 가르침(18장), 종말에 관한 연설(24-25장)이 그 다섯 말씀 군입니다. 그 첫 말씀인 산상수훈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주신 말씀과 비견됩니다. 시내산에서의 말씀 수여가 이후 모든 율법의 근간이 되었듯이, 산상수훈 역시 이와 비슷한 권위와 특성을 지닙니다. 산상수훈의 중요성은 이 말씀이 첫 번째 말씀이며, 산에서 주어졌다(5:1)는 점과 결부됩니다.
산상수훈이 주어지는 배경 그림은 이렇습니다. 산 위에는 무리가 있고, 제자들은 예수께 좀 더 가까이 있습니다(1절). 무리도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고(4:23-25), 제자도 예수를 따르는 이들입니다(4:18-22).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리도 그 말씀을 듣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따라온 이들로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산 위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교회(산 위의 동네, 5:14)를 가리킵니다.
팔복(Beatitude) : 그들에게 복이 있다
산상수훈은 여덟 번에 걸친 복의 선언인 팔복 말씀(5:3-10)으로 시작됩니다. 예수의 모든 말씀이 ‘복된 소식’ 즉 복음(福音)이지만, 마태복음은 “복”에 대한 직설적 가르침으로 예수의 첫 강론을 시작합니다. 이는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진 아브라함이 구약성서에 등장할 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는 약속이 있었다는 점과 연결됩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신앙을 집대성한 기도와 찬송집인 시편이 “복 있는 사람은…”(1:1) 이라는 말로 시작된다는 사실과도 관련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앙을 따르는 유대인 공동체인 마태복음 공동체가 복의 말씀인 “팔복”을 산상수훈의 머리말로 삼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첫 번째(3절)와 마지막(10절) 복은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는 약속입니다. 이는 팔복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4:17)는 예수의 첫 메시지와 이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도래한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서의 복이 무엇인지를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11-12절은 팔복에 포함되지 않은 또 하나의 복입니다. 팔복이 “그들에게복이 있다”고 선언하는 반면, 아홉 번째 복은 “너희에게복이 있다”고 대상을 바꿉니다.
여덟 가지 복은 크게 두 부류(3-6절, 7-10절)로 나누어집니다. 앞의 네 개 복의 수혜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이들은 뒤의 네 부류(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뒤의 네 부류에 해당하는 이들은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고 이들이 복(상)을 받는 것은 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애통하며 비천하고 무시당한다는 이유로 복을 받는다는 석연치 않습니다. 3-6절과 7-10절은 각각 36개 단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3-6절의 네 부류를 가리키는 형용 명사는 모두 “P”시작됩니다.
종말론적 역전 : 복은 은혜이다 (3-6절)
마음이 가난한(ptochoi, 누가복음은 단순히 가난한 이들, 눅6:20) 자들, 애통하는(pentheo) 사람들, 온유한(praus) 사람들, 의에 주리고(peinao) 목마른 사람들이 왜 복된지, 합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정받을 만한 삶을 살거나 상 받을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가난하다(ptwco,j)”는 말은 빼앗기거나 버림을 받았다는 말이지, ‘하나님을 위해서 가진 것을 버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마음(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표현은 희망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렇듯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선언이 팔복의 첫 번째입니다. 애통하는 이들은 기쁨을 빼앗긴 이들입니다. 생노병사의 자연적인 슬픔을 넘어, 당연히 누릴 기쁨을 강탈당한 상태에 주목합니다. 세상은 이들의 애통을 외면하는데,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을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온유한(prau<j) 이들은 겸손한 이들이 아닙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신발을 닦기 위한 깔개”라는 의미를 지닌 말로, 수치와 무시를 당함을 가리킵니다. 고대 시대에 가장 무시를 당하는 이들은 소속이 없는, 즉 발붙일 곳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복이 선언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란 의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당한 권리를 박탈당하고 불의와 부당함을 겪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의에 주린 사람들은,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한(무시당하는) 사람 모두를 포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배부르게 되리라(환대를 받으리라)고 선언됩니다.
세상은 이들을 가리켜 불쌍하다고는 하겠지만, 복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그들을 형벌이나 저주를 받은 이들이라고 낙인찍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놀랍게도, 세상의 버림을 받았다는 바로 그 이유가 하나님 나라의 선택을 받는 이유입니다. 이 세상에서 박탈된 것들이 하늘의 복으로 수여됩니다. 이것이 조건 없이 수여되는 역전으로서의 복입니다.
왜 천국의 복이 역전을 본질로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하늘나라는 ‘선물’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선물은 받을 사람의 자격을 따지지 않고, 전적으로 주고자 하는 이의 의지에 좌우됩니다. 가난하고 슬퍼하며 무시당하고 주린 이들에게 선물을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무도 이를 시비할 수 없습니다. 이는 착한 이들에게 상을 주시는 일보다 우선하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대가를 주시기에 앞서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역전으로서의 복의 특징은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하늘나라의 주인공이라고 믿었던 이들이 쫓겨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이들이 그 나라를 차지합니다(마25:31-46).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한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마7:22-23). 열두 시간 동안 포도원에 들어와 일한 품꾼과 한 시간만 일한 품꾼이 하늘나라에서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습니다(마20:1-15). 이처럼, 하늘나라의 가장 큰 특징은 역전(逆轉)입니다.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됩니다(마20:16). 제왕들은 왕좌에서 끌어내려지고 비천한 사람이 높여집니다(눅1:52). 거지 나사로는 괴롭게 살았으므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호사를 누린 부자는 불 속에 떨어집니다(눅16:25).
종말론적 보상 : 복은 상(償)이다 (7-10절)
물론 하늘나라는 선물이지만, 상이기도 합니다. 선물은 자격을 따지지 않지만, 상은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자비로운 삶을 사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상으로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7-10절).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뜻을 바라고 그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비와 깨끗한 마음과 평화와 의는 모두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이를 위해 헌신한 사람은 복이 있으며 그들은 상으로서 천국(하나님 나라)을 얻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비를 베푸는 자들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긍휼히 여기는 이들일까요? 앞서 언급된 이들, 즉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고, 의를 박탈당한 자들을 을 긍휼히 여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선을 베풀고 돕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빼앗긴 권리들을 되찾고 회복하는 일에 참여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베푼 것을 그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이들은 긍휼을, 자비를 베푸는 이들은 자비를 얻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깨끗하다)는 말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마음’ 혹은 ‘나누어지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을 뜻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면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과 먼 자들’(15:8)이나 회칠한 무덤 같은 이들이 아니라, 전심을 다하여 사랑하고 나누어지지 않는 충심을 지닌 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약속을 얻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립니다.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려는 궁극적인 구원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합니다. 평화는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일이며, 그 일에 복무하는 이들은 그분의 자녀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내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지요(12:50).
의를 위해 박해를 당하는 이들이 천국을 차지합니다. 여기서 “의”는 ‘긍휼히 여김’, ‘마음이 청결함’, ‘평화를 이룸’을 포괄합니다. 이런 의를 위해 사는 이들의 삶은 고단하고, 많은 경우에 반대에 부딪힙니다. 진정한 교회와 참된 그리스도인을 세상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의를 위해 사는 이들이 박해를 받아 온 것은 예수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이런 박해를 받은 이들에게 약속되는 복은, 가난한(박탈당한) 자들에게 약속된 것, 바로 천국입니다.
너희에게 복이 있다 (11-12절)
팔복이 “그들에게복이 있다”는 삼인칭 목적어를 가지고 있다면, 팔복 다음에 주어지는 한 가지 복은 이 말씀을 듣는 “너희”를 겨냥합니다. 바로 예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말씀을 듣는 제자들, 예수의 공동체인 교회, 바로 우리를 향해 주어지는 복입니다. 예수께서 복이 있다고 선언하시는 “너희(우리)”는 “예수(나)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이들”(11절)입니다.
마태복음 공동체가 겪은 박해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온 외적인 박해였고, 또 하나는 유대인들로부터 온 내적 박해였습니다. 로마는 기독교를 무너뜨리려고 했고, 유대교는 기독교를 축출했습니다. 12절은 ‘너희(교회)’가 당하는 박해를 ‘선지자들’의 박해와 비견합니다. 선지자들은 이방인(로마)이 아니라 이스라엘(유대인)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를 죽인 이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교회사에서, 종교개혁을 이끈 이들은 한결같이 외부의 박해가 아니라 내부의 박해로 추방된 이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공동체의 겪는 어려움도 내부에 있었습니다. 내부의 박해란 다수의 거짓이 소수의 진리를 억압하고 추방하는 형태로 발발했습니다.
예수를 위하는 삶이 성공과 풍요와 안락을 누리리라 약속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박해와 모욕과 부당함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다. 하긴, 예수께서 세상에서 가난하셨고 슬픔과 수치를 겪으셨고 불의한 판결을 받으셨으니,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이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뻐하여라!” 오늘의 전체 말씀 중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명령어입니다. 바로 그런 일을 겪을 때 우리는 복되다는 선언이고, 우리가 받을 복은 하늘의 상이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