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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자연․역사·문화
70일간 유럽여행을 마치고, 후회되는 점들이 많았다. 그 후회되는 것 중하나가 ‘좀 더 유럽에 대하여 잘 알고 가서면 좋았을 것’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유럽여행을 정리도 하고, 또한 유럽을 여행하시는 분들에게 손쉽게 유럽을 알아볼 수 있도록 유럽에 관한 기본이 되는 정보를 정리해 보기로 하였다.
여러 생각 중에 내가 알았으며 좋았을 것 같은 것을 항목으로 정했다. 이것이 “유럽의 자연·역사·문화- 건축·미술·음악·문학 그리고 실제 유럽을 여행 할 때의 이동수단(비행기, 열차, 배, 렌트카)과 숙소, 입장(료) 예약 등의 유럽 여행정보”에 대한 것이다.
-유럽의 자연·역사·문화 편의 목차-
1. 지형 및 기후
(1) 지형
(2) 기후
① 북서부 유럽의 해양성기후 ② 남부 유럽의 지중해성기후 ③ 중부 유럽의 내륙성기후
2. 농업·임업 및 어업
(1) 농업 (2) 임업 (3) 어업
3. 인구 및 인종 그리고 종족
(1) 인구
(2) 인종
(가) 3종류의 인종구분: ① 게르만족 ② 라틴족 ③ 슬라브족
(나) 5종류의 인종구분: ① 북방형 인종 ② 알프스형 인종 ③ 지중해성 인종
④ 디나르형 인종 ⑤ 동유럽형 인종
(다) 4종류의 지역구분: ① 북서부 유럽 ② 남부 유럽 ③ 동부 유럽 ④ 러시아와 주변 국가
(3) 종족
① 켈트족 ② 훈족 ③ 게르만족 ④ 반달족 ⑤ 고트족 ⑥ 프랑크족
⑦ 앵글로 섹슨족 ⑧ 노르만족 ⑨ 슬라브족
4. 언어
① 게르만어파- 영어, 독일어의 북부 유럽,
② 로마어파-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의 남부 유럽,
③ 슬라브어파- 러시아어의 동부 유럽
5. 문화와 문명
(1) 유럽 문화
(가) 3가지 문화적 특징
① 기독교를 믿는 사람
② 인도-유럽 어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③ 백인인종.
(나) 유럽 3대 문화권
① 튜튼족 중심의 북서유럽 문화지역(게르만어권)
② 라틴족 중심의 남부유럽 문화지역(로마어권)
③ 슬라브족 중심의 동부유럽 문화지역(슬라브어권)
(2) 유럽의 문명
6. 종교
(1) 신화 혹은 다신교 시대
(가) 그리스 로마신화 (나) 게르만 신화 (다) 켈트 신화
(2) 크리스트교
(가) 전래와 정착 그리고 분열 (나)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작품들
(3) 이슬람
7. 역사
(1) 고대 그리스(BC 1100~BC 146)
(2) 로마제국(BC 753~AD 1453)
(3) 중세(5세기~15세기)
(4) 르네상스 시대(14~16세기)
(5) 근세 초기(16~17세기)
(6) 근대적 특징의 혁명시기(17세기 초~18세기 초)
(7) 산업혁명의 시기(18세기 중엽~19세기 초)
(8) 19세기
(9) 20세기 이후
8. 더 알고 싶은 유럽 이야기
(1) 스페인 산티아고(Santiago) 순례자 길(Camino de Santiago)
(2) 유럽 가톨릭의 성지
(3) 베네치아(venezia)
(4) 폼페이
(5) 피렌체
(6) 이탈리아
(7)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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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쭉 15km 잔세스칸스의 풍차 마을
유럽이라는 명칭은 고대에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번영했던 페니키아인이 그들이 살던 지방의 동쪽을 아쿠(Acu: 해가 뜨는 지방이란 뜻)라 부르고, 서쪽을 에렙(Ereb: 해가 지는 지방이란 뜻)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여기서 페니키아는 고대 가나안의 북쪽에 근거지를 둔 고대문명이다. 중심 지역은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해안에 있었다. 페니키아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에서 900년경까지 지중해를 가로 질러 퍼져나간 진취적인 해상무역 문화를 가졌다.
유럽을 지형적 측면에서 동쪽은 우랄산맥, 아랄 해, 카스피 해, 흑해를 경계로 하여 아시아 대륙과 접하고 있고, 남쪽은 아프리카 대륙과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대륙이다. 그리고 우랄산맥으로 상정(想定)하는 관습으로 우랄산맥 서쪽의 러시아 영역을 유럽 러시아이라고 불러 유럽에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구분 방식이다.
우랄산맥 서쪽 러시아 영토를 제외한 좁은 뜻의 유럽은 490만km²로 오세아니아 대륙의 반이 약간 넘고, 소련의 4분의1, 카나다, 중국, 미국, 브라질의 2분의1 정도에 불과하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 32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있고, 대부분 육지를 국경으로 삼고 있어 항상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긴장상태였다. 이러한 긴장상태는 서유럽의 정신적 물질적 문화를 낳는 촉매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유럽은 지리적 위치, 인종, 문화 관계에 따라 다시 나누면 다음과 같다.
① 서부 유럽 ② 북부 유럽(스칸디나비아 제국) ③ 중부 유럽 ④ 남부 유럽(지중해 연안국) ⑤ 동부 유럽(구소련 위성국가) 등으로 구분한다. 인구는 아시아대륙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가졌다.
1. 지형 및 기후
(1) 지형
스의스 인터란켄의 융프라우 정상
지형적으로는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 위치하는 커다란 반도에서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반도가 갈려져 있으며 대륙 총 면적의 약 27%가 반도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에 비해 해안선의 길이가 대단히 긴 것이 특색이다. 반도란 삼면이 바다에 쌓이고, 한 면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연한 땅이 곧 대륙에서 바다 쪽과 좁다랗게 돌출한 육지로 이것이 작은 것을 갑(岬)이라 한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체코, 슬로바기아, 헝가리 등 6개국만이 내륙국으로 대양과 직접 접해 있지 않을 뿐이고 유럽인과 바다는 떼어 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의 항해기술을 이어받은 유럽인들이 신대륙 발견과 더블어 500년 동안 세계 곳곳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도 후미, 곶, 섬이 많은 해안지역의 영향이라 말할 수 있다.
해안선의 길이뿐만 아니라 평야비율이 높은 것도 유럽지형의 지형적 특색의 하나다. 유럽평균고도가 345m로 아시아의 960m보다 휠씬 낮은 편이면 200m 이하의 평지가 전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 스페인 사이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피레네산맥의 북동쪽을 기점으로 유럽대륙의 북부를 거쳐 러시아에 이르는 북유럽 대평원은 다른 대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연속적인 넓은 평야로 유럽대륙의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알프스 산맥을 중심으로 해발 4000m에 이르는 높은 산맥이 대륙남부를 동서로 달리고 있고, 이베리아, 이탈리아, 발칸의 세 반도는 평야지역보다 산지면적이 많아 남부 유럽 여러나라에서 산업근대화가 늦어진 한 가지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독일 라인강 유역에는 심한 단층작용으로 절단되어 지구대, 분지, 지루 등의 단층지형이 이루어졌다.
(2) 기후
핀란드 헬싱키 바닷가
유럽에는 알프스, 피레네 등 높은 산맥이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어 편서풍과 난류인 북대서양 해류의 영향이 내륙 깊숙이 미쳐 대체로 연중 온화한 기후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동쪽으로 갈수록 편서풍의 영향이 점차 약화되어 대륙성 기후가 나타나며, 바다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강수량도 감소하여 헝가리 분지에는 건조한 초원 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유럽기후는 위도상의 위치(북위 35도~71도)에 비해 따뜻한 것이 특색이다. 특히 겨울철 기온이 온화하다. 런던(북위 51.5도)의 1월 평균 기온이 4.4도C는 제주도(북위 33.5도)으 4.8도C와 비슷하며, 노르웨이 베르겐(북위 60.5도)은 부산(북위 35.0도) 1월 평균 기온과 비슷하다.
이유는 온난한 북대서양 해류와 북대서양 고기압 대에서 대륙 서해안으로 부는 편서풍이 대양의 따뜻한 공기를 대륙으로 옮겨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편서풍은 대략 위도로 30도~60도의 중위도 지방의 상공에서 부는 서풍이다. 중위도의 고압대로부터 고위도 지방으로 부는 바람이 지구의 자전에 의하여 방향을 동으로 돌린 것으로, 지형의 관계로 남반부에 발달되고, 여름보다 겨울에 그리고 높은 상공 일수록 강한 탁월한 서풍을 말한다.
남부 유럽지방에서는 건조하고 더운 여름과 강수량이 비교적 많고 온난한 겨울이 뚜렷이 구분되는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난다. 과일류 지배에 적합한 지중해성 기후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 발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유럽의 기후는 북서부 유럽의 서안 해양성 기후, 남부 유럽의 지중해성 기후, 중부 유럽의 내륙성 기후로 크게 나누어지고 있다.
① 북서부 유럽의 해양성 기후
북해 연안은 난류인 북대서양 해류와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여름이 서늘한 반면, 겨울은 위도에 비하여 온화하며 연 강수량은 많지 않으나 연중 고른 편입니다.
이러한 기후 특색은 벼농사에는 불리하나 목초 재배에는 유리하여 일찍부터 가축과 작물을 함께 재배하는 혼합 농업이 발달해왔습니다.
② 남부 유럽의 지중해성 기후
지중해 연안은 여름에는 덥고 건조한 반면 겨울은 따뜻하고 비가 많은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납니다. 이 지역은 여름이 비가 적기 때문에 건조한 기후에 잘 견디는 올리브, 코르크, 무화과, 포도 등의 나무를 재배하는 수목 농업이 발달했습니다.
③ 중부 유럽의 내륙성 기후
중부 유럽 내륙은 해양성 기후와 지중해성 기후와는 다른 대륙 내에 위치하는 내륙성 기후의 특색을 나타내는 지역을 말한다. 그리고 유럽 북부의 북극에 가까운 지방은 한대 기후 지역이며 백야 현상이 나타난다.
2. 농업 · 임업 및 어업
열차 차창가로 보이는 스웨덴 농촌 풍경
(1) 농업
유럽은 3대 농업지역으로 구분한다.
첫째, 지중해연안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식 농업지역
이베리아, 이탈리아, 발칸반도의 지중해 연안중심으로, 겨울철 기온이 따뜻하고, 강수량이 많다. 밀, 보리 등의 곡물과 귤, 올리브 등의 과수 그리고 채소 등을 가꾸며, 여름철에는 덥고, 강수량이 적어, 올리브, 포도, 대추야자, 무화과 등의 과일과 관개에 의해 쌀 등의 곡물 농업이 행해진다.
둘째, 북해연안을 중심으로 한 낙농업지역
셋째, 중앙의 구릉지와 북부 유럽 평원을 중심으로 한 혼합 농업지역
곡물재배와 가축사육을 중심으로 한 혼합농업지역은 지중해식 농업지역과 낙농업지역의 중간지대에 발달하였다.
(2) 임업
유럽의 산림면적은 총 육지면적의 47%로 그 중 러시아가 전체 산림의 81%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의 1인당 산림면적은 1.42ha로 이는 축구장 2개의 면적과 비슷하다. 실제 여행으로 느낀 점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가 비옥한 넓은 평야 내지 작은 언덕으로 만 이루어져 예상외로 사람살기 좋은 옥토의 땅들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세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대륙이라고 하지만 인구에 비하여 넓은 평야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상대적으로 산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알프산 주변과 유럽 북부의 나라는 산지가 많았다. 통계적으로 핀란드 국토의 64%, 스웨덴 53%, 오스트리아 37%가 삼림이다.
(3) 어업
유럽은 일부 내륙 국가를 제외하고 섬과 반도국가로 되어있다. 북대서양, 발트해, 흑해, 지중해로 둘레 쌓여 세계 최대의 수산물 생산 및 교역국이다. 대항해 시대를 이끈 것도 해양 유럽이기 때문이다.
3. 인구 및 인종 그리고 종족
독일 퓌센 노이슈반슈타인 성에 있는 유럽각지 실제 여성 인물도 1
(1) 인구
아시아 다음으로 러시아를 제외하고도 4억8000만 인구이다. 약 2000년전 우랄산맥 서쪽의 유럽지역 거주자는 3300만명에 불과하였다. 남부에 50%, 서부에 20%, 중부에 10%, 동 북유럽에 9% 그리고 북부유럽에 1% 미만으로 분포되어있었다.
15세기 말 신대륙 발견이후 유럽인구의 대이동이 시작하였다. 6500여만 명의 인구가 유럽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동하였고, 1700여만 명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로 이동하였다. 신대륙 6500만명 중 4500만명이 미국과 캐나다 나머지 2000만명은 중남미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들 유출 인구의 3분의1 정도가 영국인이며, 이탈리아, 스페인, 포루투갈이 3분의1이며, 그리고 나머지 3분의1이 러시아를 비롯한 동부 유럽과 북부유럽 여러나라들이 차지하였다.
1630년 청교도의 이주와 같이 종교적 이유 때문에 유럽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동한 인구도 있었으나 그들 이동 인구의 대부분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유럽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상과 같은 유럽인구의 대이동은 유럽문화를 다른 지역에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2) 인종
(가) 3종류의 인종 구분
유럽은 크게 3종류의 인종으로 나눌 수 있다.
① 게르만족
게르만족은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사람들.
② 라틴족
라틴족은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스페인 사람들.
③ 슬라브족
슬라브족은 러시아와 동유럽, 발칸 지역의 체코, 폴란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등.
(나) 5종류의 인종 구분
좀 세부적으로 5종류 분류한다. 백색인종(코카서인)으로
① 북방형 인종 ② 알프스형 인종 ③ 지중해성 인종 ④ 디나르형 인종(키가 크고 마른편, 단두형) ⑤ 동 유럽형 인종으로
크게 다섯 종으로 구분한다.
① 북방형 인종
주로 북부 유럽에 거주하며, 특히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중부와 남부 및 영국, 아이슬란드에 많다. 신체적 특징으로 피부색이 희고, 키가 크며, 머리는 장두형이 많다. 코는 좁고 높은 것이 특색이며, 무엇보다는 남부지역의 인종보다 신체적으로 큰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노르만족은 북방인이라는 뜻이며, 바이킹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장두, 장신, 백색피부, 금발, 파란 눈 등을 특징으로 한 미남, 미녀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② 알프스형 인종
피부색이 대체로 희지만 북방형 인종에 비해 색소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고, 모발은 갈색 또는 밤색이다. 키는 대체로 작고, 몸에 비해 팔과 다리가 짧은 것이 특색으로 땅딸 말한 인상을 준다. 이들 알프스형 인종은 프랑스 중부지방, 이탈리아 북부지방, 독일 남부지방, 헝가리 등지에 주로 거주한다.
③ 지중해성 인종
키가 작고 머리는 장두형이며, 얼굴은 달걀형으로 긴 얼굴이다. 머리카락은 파상형이 많고대부분의 경우 얼굴 전체의 길이에 비해 윗부분이 긴 것이 특징이다. 이탈리아 남부, 지중해의 도서 지방, 발칸반도의 남동부에 주로 거주한다.
④ 디나르형 인종
키가 크고, 마른 편으로, 단두형이 많고 특히 뒷머리가 편평한 것이 특색이다.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의 디나르, 알프스 산지가 이들 인종의 주요 거주지역이다.
⑤ 동 유럽형 인종
북방형 인종보다 피부색이 희고, 키는 작으며, 머리는 단두형이 많다. 이들 인종은 동부 유럽에 산재하며, 시베리아 지방에 살고 있다. 동발트해 인종이라고도 한다.
유럽의 주민들은 대부분 백인이며 크리스트교를 많이 믿는다. 그러나 지역적으로는 교회의 종파와 언어를 달리하는 수많은 민족들과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5대 인종 외에도 아시아 인종 계통의 마자르인(헝가리), 핀족(핀란드) 등이 있다.
(다) 4종류의 지역 구분
① 북서부 유럽 게르만족이 대부분이나 프랑스에는 라틴족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노르만족이 많다.종교는 신교가 우세하고 프랑스에서는 카톨릭교를 많이 믿는다. 주요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이며 스위스와 벨기에에서는 여러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② 남부 유럽주민의 대부분이 라틴족이며 에스파냐어와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며, 카톨릭교를 믿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는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그리스정교를 믿는다.
③ 동부 유럽동부 유럽은 여러 문화가 만나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민족, 종교, 언어가 다양하고 한 국가 안에서도 이들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주민은 슬라브족을 중심으로 여러 민족이 섞여 있고, 종교는 대부분 카톨릭교를 믿으나. 일부에서는 그리스정교를, 알바니아에서는 이슬람교를 믿는다.
④ 러시아와 주변 국가주민은 대부분 슬라브족이며, 그리스정교를 많이 믿는다. 유럽은 게르만, 라틴, 슬라브 등 백인종이 90 % 이상이며 핀란드의 핀족, 헝가리의 마자르족, 북극해 연안의 라프족 등 아시아 인종도 있다.
(3) 종족
① 켈트족
언어학자들이 켈트어라고 명명한 언어군을 사용한 집단이다. 게르만족이나 고대 로마가 존재하기 전부터 유럽전역에 살며 유럽의 주인노릇을 했다. 켈트문화를 공유하는 지역들은 주로 북서부 유럽에 존재한다. 즉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콘월, 맨섬, 프랑스의 브르타뉴 반도도 포함된다. 현재 남아있는 켈트족 국가는 아일랜드가 유일하다. 그러나 영국의 브리튼섬 산악지대와 북프랑스지방엔 켈트문화가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② 훈족
훈족은 한나라가 흉노를 이간질 시켜 북흉노와 남흉노로 나눈 후 남흉노와 작당하여 몰아낸 북흉노가 중앙아시아로 유입되면서 기존에 살던 민족들에게 동화되면서 만들어진 집단이 훈족이라고 한다. 서양사에 최초로 등장한 훈족은 투르계 유목민족이다. 이들은 중앙 아시아를 중심으로 시베리아에서 발칸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퍼져 거주하는 튀르크어파를 모어로 하는 민족이다.
③ 게르만족
게르만족은 발트해 북유럽 연안에 살던 민족이다. 이들은 인도유럽어족 중에 게르만어파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총칭하며, 특징으로는 상대적으로 큰 체구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졌다. 4세기 후반에 게르만족들은 중국의 흉노(훈족)의 동진과 함께 대대적인 이동이 시작되었다. 훈족이 게르만족 중 가장 잘나가던 동고트족을 밀어버리자 이들이 서진하게 되었다. 게르만일파인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이 로마제국 내에 국가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서로마는 서고트족의 일격에 망하게 된다. 서로마가 멸망한 것을 기준으로 유럽은 고대에서 중세로 구분한다.
④ 반달족
발달족은 원래 스칸디나비아에서 살다가 독일, 프랑스, 스페인을 거친 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에 정착했다. 즉 5세기 초 훈족의 침입에 밀려 서쪽으로 대이동 로마국경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리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지금의 스페인으로 들어갔다. 이에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를 진출 하고. 이후 북아프리카의 로마 영토인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반달왕국을 세운다. 그와 동시에 지중해 연안의 영토를 침공하여 결국 455년 로마를 침공하게 된다.
반달족은 462년까지 북아프리카 전역과 지중해 연안의 섬들을 장악하여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였지만, 피지배인들을 너무나 억압하였기에, 점차 쇠퇴하였고, 결국엔 동로마 제국인 비잔티움 제국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반달족은 로마에 침입하여 수많은 약탈과 문명 파괴행위를 저질렀는데, 이 때문에 생기 명사가 그 유명한 반달리즘이라 한다.
⑤ 고트족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기원한 동부 게르만족의 일파이다. 최초의 거주지가 동부 스웨덴 지역이었던 이들이 1세기경에 발트 해안과 비스와 강유역으로 옮겨 왔다. 3세기경에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나뉘었다. 4세기 훈족에게 밀려 로마 영내로 이주하게 되었다. 서고트족은 도나우강을 건너 발칸반도와 이탈리아, 프랑스의 갈리아를 거쳐 에스파니아까지 진출한다. 로마 초기엔 이들을 받아들여 북방 국경안정 및 경제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지만.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여, 로마는 고트족을 영내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이후 로마제국에 상당기간 봉사했으나 제국 분열에 힘입어 로마를 공략하고. 마침내 410년 로마를 점령 약탈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로마 본진까지 휩쓴 서고트족은 이를 계기로 자신들이 정착하고 있던 에스파니아를 중심으로 아예 독립국가를 세우게 되니, 이것이 서고트 왕국이다. 동족의 성공에 사기충천한 탓이었을까, 동고트족은 5세기중엽 훈족이 사라지자 아예 이탈리아 반도로 진출하여 동고트 왕국을 세운다. 이탈리아 본토에서 군림하던 동고트는 522년 동로마인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게 멸망당한다 서고트는 507년 프랑크족에게 오늘날 프랑스 방면의 영토를 빼앗기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명맥을 유지하다.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침공한 이슬람교 세력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르네상스 이전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문화를 "고딕양식"이라 부르는데 이 말이 바로 고트족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나마 문화 파괴활동이란 "반달리즘"의 유산을 남긴 반달족보다는 나은 셈이다.
⑥ 프랑크족
게르만족의 대표적인 세력으로, 라인강 근처에 살던 여러 게르만 부족들을 한데 묶어 프랑크족이라 불렀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현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역에 이르는 통일왕국인 프랑크 왕국을 세운 것도 프랑크족의 한 분파이다.
⑦ 앵글로 섹슨족
색슨족은 게르만족의 연맹부족으로 그들은 지금의 니더작센과 베스트팔렌 지역에 살았던 민족이다. 그들 민족은 이주하면서 지금의 네덜란드인과 앵글랜드인들에게 영향을 준 민족이다. 이웃인 프랑크족과 충돌이 잦았으면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영토를 잃은 후 앵글족에 흡수되어 브리튼섬에 이주하게 된다. 그들이 앵글로색슨의 모태가 되는 민족이다.
⑧ 노르만족
노르만이란 북방인 이란 뜻의 어원이다. 본거지는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발트해 연안에서 협만을 중심으로 해양생활을 하였다. 길쭉한 얼굴과 키다란 키, 하얀색의 피부, 황금색의 머리털, 파란색의 눈을 가진 이들 역시 게르만족으로서 부족의 명칭에 따라 노르웨이인, 스웨덴인, 덴마크인 등으로 불렀다.
그리고 바이킹족이란 8세기 말에서 11세기 중반에 걸쳐 활동한 전투 종족을 말한다. 특히 북쪽에 살던 바이킹이란 노르만족은 농업과 어업 생산량만으로는 인구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노르만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남으로 대 이주를 시작했고, 단 몇 세대 만에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가지고 있어서 유럽의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해안지방은 물론이고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근교마저 약탈한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웨일스를 제외한 전 왕국이 바이킹에게 넘어가고. 프랑스 지역은 바이킹의 약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 아예 영토를 떼어줘 10세기경 노르망디 공국을 건립하게 만든다. 또한 시칠리아와 러시아에 들어가 몇몇 국가를 세우기도 했다. 그들의 항해술이 얼마나 경이로웠는지, 아이슬란드나 그린란드는 물론이고. 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하여 식민지를 건설한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투 종족도 12세기 유럽국가의 해안방어 체계가 정비되자 이들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⑨ 슬라브족
인도유럽어족의 슬라브어파의 언어를 사용하는 유럽의 종족이다. 주로 동유럽과 중앙유럽, 발칸반도에 분포하고 있다 원래 코카서스 지역에 살고 있었으나, 게르만족이 훈족의 압박으로 서부로 이동한 이후, 그 공백지로 이동하여 동유럽을 차지하였다. 그 이후 민족분화가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부분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며 일부는 서유럽과 전세계로 퍼졌다.
독일 퓌센 노이슈반슈타인 성에 있는 유럽각지 실제 여성 인물도 2
독일 퓌센 노이슈반슈타인 성에 있는 유럽각지 실제 여성 인물도 3
4. 언어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 광장의 많은 사람 많은 말
30여개의 국가에 언어가 70여개나 된다. 하나의 나라에 두개 이상 사용하는 나라는 유고, 슬라비아, 스위스, 벨기에이며, 한 개의 언어 독일어가 여러 나라에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나라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이다.
대부분 인도-유럽어족이며, 비인도-유럽어족은 헝거리어, 핀란드어, 에스토니어어, 바스크어, 몰타이어 등이 있다.
유럽어를 세 가지로 분류하면
① 게르만어파- 영어, 독일어의 북부 유럽,
② 로마어파-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의 남부 유럽,
③ 슬라브어파- 러시아어의 동부 유럽으로 구분 한다.
5. 문화와 문명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
어떤 의미로는 서구화, 유럽화는 그리스도교화, 민주주의화, 산업화, 기술문명화, 과학화, 합리주의 사고, 근대교육의 보급을 뜻하기도 한다.
(1) 유럽 문화
(가) 3가지 문화적 특징
① 기독교를 믿는 사람
② 인도-유럽 어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③ 백인인종.
그리스·로마문화의 영향과 기독교 문화가 유럽문화의 기초를 이루었고, 산업혁명 이후 상공업의 발달로 인해서 유럽문화는 공업화, 도시화, 산업문화가 이루어졌고, 시민혁명으로 다른 지역보다 민주화가 먼저 이루어졌다.
(나) 유럽 3대 문화권
튜튼족 중심의 북서유럽 문화지역(게르만 어권), 라틴족 중심의 남부유럽 문화지역(로마 어권), 슬라브족 중심의 동부유럽 문화지역(슬라브 어권)으로 구분된다.
① 튜튼족 중심의 북서유럽 문화지역(게르만 어권)
북해 주변의 영국, 베넬룩스 3국, 독일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 튜튼족 중심 문화지역이며,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신교를 믿는다.
② 라틴족 중심의 남부유럽 문화지역(로마 어권)
지중해 연안의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그리스 그리고 프랑스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곳은 유럽문화의 요람지로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된 지역이다. 북서유럽지역보다 상공업 발달은 뒤떨어졌으나 특색있는 지중해식 농업이 발달된 지역이다. 라틴족계의 백인종이 주로 거주하고 있으며, 주민의 대부분은 로마 가톡릭를 믿는다.
③ 슬라브족 중심의 동부유럽 문화지역(슬라브 어권)
슬라브족계의 백인종이 중심이며, 동부 유럽 여러 나라와 러시아가 포함된다. 북서, 남부 유럽 그리고 건조 문화권과 접촉 지대로, 민족, 언어, 종교가 복잡하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지금의 러시아의 강력한 영향으로 공산주의 체제가 발달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은 비잔틴 문화의 영향으로 그리스 정교를 신봉하고 있다. 그중 알바니아 주민만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과거 400~500년간에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진원지가 되었고, 콜롬버스 이후의 지리적 대 발견으로 산업혁명으로 대량 생산과 기술혁신, 유럽 인구의 대이동으로 세계는 유럽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유럽화는 그리스도교의 전파, 근대교육의 보급, 산업기술의 전달가 이루어 졌다.
(2) 유럽의 문명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로마제국, 로마제국 멸망 후 신성 로마제국, 정교회 그리고 신교를 이해하는 것이 유럽을 여행하는 데 조금 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헬레니즘은 인간에 기본을 둔 문명이고, 헤브라이즘은 서로마 제국 멸망 후 기독교를 바탕으로 일어난 문명이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진 로마제국 안으로 게르만 민족이 들어오면서 라틴문명과 게르만 문명의 융합이 일어나게 된다. 그 후 게르만 민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에 의해 신성 로마제국이 성립된다. 이러한 과정를 거치면서 많은 종교적 변화도 있었다. 만신교이던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고, 가톡릭이 생겨나고, 정교에 이어 신교가 나오는 과정을 거친다. 즉 르네상스, 대항해시대, 시민혁명 그리고 산업혁명을 거치며 이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변해왔다.
그리스·로마 신화가 유럽 문명의 밑바탕이 되었고, 현재 유럽의 강국인 프랑스, 영국, 독일과 같은 나라들이 그리스·로마 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문명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것이 동방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유럽역사를 통해 보면 훈족이 서진을 하고 그로 인하여 게르만 민족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그 결과 게르만 문화와 라틴 문화가 혼재되면서 유럽 문명에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태초의 서양문명은 아시아에서 왔다. 유럽문명의 출발점이 크레타문명인데, 크레타는 그리스의 남부의 작은 섬이다. 이 섬은 소아시아계 이주민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이 크레타문명의 주인공들이다. 지중해에 인접한 소아시아의 페니키아는 오늘날 레바논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리스의 남부에 있는 크레타 섬은 지중해 세계를 동서남북으로 있는 바닷길의 교차점이었다. 그래서 이 그리스 남부의 작은 섬은 유럽에서 오리엔트의 선진 문명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이었다. 페니키아는 오늘날 레바논으로 오리엔트 문명이 발생한 곳이다. 오리엔트란 단어는 라틴어의 오리엔스(oriens)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해뜨는 곳, 곧 동방이라는 이라는 것이다.
기원전을 중심으로 하면 아시아가 유럽보다 휠씬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어, 그 중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유럽 문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메소포타미아는 ‘메소스’와 ‘포타모스’의 합성어인데, 그리스어로 그 뜻은 ‘두 강 사이의 땅’이란 것이다. 두 강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지금의 이라크와 시리아 일부 지역을 말한다. 이 문명이 인근 페니키아인 지금의 레바론을 통하여 그리스 남부 크레타 섬으로 유입되어 그리스 문명이 발화된 것이다.
알파벳의 시원도 기원전 1500년 전의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쓰인 것인데, 메스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인이 쓰는 문자를 참고해 페니키아인들이 만들었다. 물론 알파벳이라는 이름은 그리스 문자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인 알파와 베타에서 유래되었다. 페니키아는 지리적으로 인도 인더스 강 유역에서 서쪽으로 지중해 연안까지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6. 종교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유럽의 정신적 두 뿌리는 헬레니즘 문화와 헤브라이즘 문화로 구분된다. 헬레니즘 문화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중심적인 사유를 지향하며 개인을 중시하는 특징을 지녔다. 따라서 보편적 인간성에 기초한 세계 시민주의와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했으며, 이는 이성을 통한 개인의 금욕을 강조한 스토아학파의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한 에피쿠로스학파의 사상으로 구현되었다.
이와 반대로 헤브라이즘은 내세적이고, 신본주의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신과 양심의 준엄성에 대해 복종하며 이를 통해 평안에 도달하고자 한다. 초기 헤브라이즘은 더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 철학적 기반이 필요했다.
이것을 만족시키면서 중세를 지배한 그리스도교 사상의 원천은 아우구스티누스를 필두로 자리잡은 교부철학이다. 이어서 중세 후기에는 토마스아퀴나스(1225~1274)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체계화하면서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 간의 조화를 추구한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켰다.
(1) 신화 혹은 다신교 시대
(가) 그리스 ․ 로마신화
지중해 연안의 해양 문화권, 우주생성에서 민족 국가 기원.
(나) 게르만 신화
북유럽 일대 게르만 민족, 운명에 대한 체념.
(다) 켈트 신화
켈트 신화는 고대 켈트족이 믿던 켈트 다신교와 관련된 신화.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아일랜드와 웨일스의 민화에서 엿볼 수 있다.
(2) 크리스트교
(가) 전래와 정착 그리고 분열
유럽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 사상의 보편성과 고도의 윤리성은 오늘날 서 유럽 문화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공인을 받은 기독교는 392년에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476년 서로마가 멸망하고 게르만인과 그리스도교가 융합하면서 더욱 번창하였다.
그 후 기독교는 프랑크 왕국의 도움을 얻어 교황령을 설치함으로써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각 방면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당시의 교회와 수도원은 종교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유럽에 크리스트교를 전파한 인물은 사도 바울, 일신교의 크리스트교를 유대교의 한계를 넘어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1세기에 전 유럽을 세력권으로 확대되었다.
4세기 초(313년) 로마에서 밀라노 칙령에 의해 공인된 그리스도교는 유럽 전역에 걸쳐 급속히 전개되었고, 근대 유럽 문화의 발전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이시기는 고구려의 공격에 의하여 낙랑이 멸망한 시기(313년)이며, 중국은 5호 16국 시대(317년)이다.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리스도교가 신봉되고 있고, 그 밖에 이슬람교(알바니아와 유럽 터키 지역)와 현재는 거의 자취를 감춘 유대교가 있다.
그리스도교는 다시 ① 로마 가톡릭(구교) ② 신교 ③ 그리스 정교로 나누어지며, 분포지역도 뚜렷이 구분된다.
로마 가톡릭교는 분포지역이나 신도수로 보나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이다. 이탈리아, 남부 유럽지역과 프랑스, 독일 남부,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플란드 등의 주민 대부분은 로마 가톡릭을 신봉한다.
16세기 초 종교개혁이 있은 이후에 로마 가톡릭에서 분리된 신교는 독일 북부지역, 영국, 북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주로 믿고 있다. 11세기 중엽 교황의 파문을 받은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탐블) 주교가 그리스도교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그리스 정교를 세운이래 그리스 정교는 슬라브족의 이동과 더불어 동부 유럽지역에 주로 전파되었다.
동방 정교회의 실제적인 분열 계기는 1204년 제 4차 십자군 원정 때문이다. 이슬람국가가 아닌데, 정교국가에 약탈과 방화사건 등에 의하여 수난을 당한 이후 부터이다. 정교회는 반 로마가톡릭으로 그리스와 러시아 중심으로 각국이 느슨한 연합체로 형성되고 있다. 로마가톡릭에 비해 동쪽에 있다는 뜻에서 동반 정교회라 한다. 크리스트교의 분열의 근본적 원인은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의 대결에서 찾을 수 있다.
15세기 중엽 비잔틴 제국 패망 후 오스만투르크 치하로 넘어가면서 마침내 영구적인 동서교회가 나뉘는 결과를 낳았다. 동로마 제국이 건재할 당시는 그리스 정교회가 중심이였으나, 1453년 동로마가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면서 러시아 제국으로 옮겨져 러시아 정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가톨릭이란 말은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정교회는 말 그대로 ‘정통 교회’라는 뜻을 가지고 이다. 2001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그리스를 방문하여 과거 십자군에 의한 침략과 학살 등에 대하여 정식으로 사과했다.
초대 교회는 다섯 총대주교구로 되었다. ①로마 ②콘스탄티노플리스 ③안티오키아 ④예루살렘 ⑤알렉산드리아인데, 그중 동방의 세 총대주교구인(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리스의 양대 세력은 서양과 동양의 문화권에 위치하였다. 두 교회는 중세초기의 혼란기에는 서로 협력하였으나, 안정기에 접어들어 그리스-헬레니즘적인 동방과 라틴-게르만적 서방의 이질적인 정체성과 국제적 정치 알력 등으로 점점 사이가 멀어졌다.
(나)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작품들
유럽은 5세기부터 15세기까지 1000년은 기독교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를 중세라고 하면 그 이후에도 기독교는 유럽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로마 바티칸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있다.
이 작품은 성서에 바탕을 둔 기독교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으로 가득하다. 하느님이 세상과 사람을 만든다. 그 최초의 사람이 아담과 이브이다. 이들은 선악과를 먹게 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세상으로 나온다. 그들은 세상에 나와 속죄의 마음으로 살아지만 그의 아들인 카인과 아벨에 의해서 인간의 죄는 다시 이어진다. 카인은 하느님이 자신보다 동생인 아벨을 좋아하는 것을 질투하여 들판에서 동생을 몽둥이로 죽인다. 하느님이 너의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는냐고 물어보자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여 저주를 받는다. 카인과 아벨에 관련된 작품은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피렌체<천국의 문>에 조각되어 있다.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차 하느님은 그 악을 없애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킨다. 이때 선택받은 노아와 몇 쌍의 동물들만 살아남으며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인류가 번성하여 온 세상으로 퍼진다. 노아의 홍수와 그후 하느님에게 감사의 번제 의식을 올리는 장면이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에 그려져 있다.
400년 후 노아의 12대 손으로 아브라함이 태어난다. 그는 이집트 땅에서 하느님의 명령으로 지금의 중동 지방인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다. 하느님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께 순종은 아들은 살아냈고 아브라함의 믿음도 인정받게 된다. 25년마다 문이 열려 죄사함을 받는다는 성 베드로 성당의 <희년의 문>과 피렌체의 <천국의 문>에 아브라람의 믿음과 관련 내용이 조각되어 있다.
그 후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다시 이삭의 아들 야곱으로 그 역사는 계승한다, 야곱은 11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제일 맏내인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해 형들의 질투로 이집트로 간다. 그 곳에서 이집트 총리가 된다. 그는 가나안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을 용서하고 이집트로 불러서 함께 산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폰토르모의 작품<이집트에 있는 야곱과 요셉>이 그 내용이 주제이다.
기원전 1200년 경 독재자 람세스 2세가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면서 이집트의 신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을 탄압하게 된다. 이때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모세가 홍해를 갈라 이집트를 탈출한다.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모세의 일생> 벽화 중 <홍해를 통과하는 모세> 작품에 그때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모세는 40년의 방랑 끝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지만, 신에게 한번 불충한 죄 탓에 자신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인근의 느보 산에서 장엄한 생을 마친다. 그러나 모세의 이집트 탈출과 가나안으로 민족을 인도한 숭고한 희생은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는 십계명 석판을 들고 있는 모세 상은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이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인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왕을 세워 달라고 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울을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정한다. 사울을 처음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선정을 베풀었으나 권세가 강해지자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골리아 정수리를 명중하여 쓰러뜨린 다윗이 왕이 된다. 인간<다비드상>은 피렌체 아카데미 미술관에 있다.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간통 사건은 이스라엘 왕 다윗이 저지른다. 어느날 밧세바의 목욕 장면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밧세바는 그의 부하 우리아의 아내다. 다윗은 우리아를 전장으로 보내고 그 곳에서 우리아는 전사하고, 밧세바와 결혼 한다. 이후 하느님의 노여움으로 다윗은 많은 고초를 겪어면서 다윗은 진심으로 회개한다. 루브르 박물관의 렘브란트방의 <목욕하는 밧세바>가 있다. 다윗과 밧세바가 회개한 후에 낳은 아들이 솔로몬이다.
(3) 이슬람교
이슬람교는 7세기 초인 610년에 아라비아 반도 중부에서 마호메트가 세운 종교이다.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는 유복자로 태어나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였다. 25세에 부호의 미망인 하디자와 혼인하여 한때 시리아 등지에서 대상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아라비아반도 주민들은 종교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자연신과 신령을 믿는 복합적인 신앙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급속한 상업경제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부작용과 갈등적 요소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존의 삶에 대한 깊은 회의를 품고 사색과 명상을 계속하던 마호메트는 40세 되던 610년경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하느님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 마지막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띠고 포교에 나섰다. 이 때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를 기록한 것이 ‘코란’이다.
코란의 특정적인 것으로는
첫째, 기독교의 성경은 약 850년간 여러 사람들에 의해 각기 다른 언어로 쓰였는데, 코란은 마호메트 한 사람에 의해 한 장소에서 23년 동안 아랍어로 계시되어 쓰였다.
둘째, 이슬람이란 ‘절대 순종한다’는 뜻이며, 이슬람 신도를 가리키는 무슬림(Muslim)이라는 용어는 ‘절대 순종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셋째,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기반으로 소외된 사람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하였다.
이런 이슬람이 확산되면서 이슬람 제국은 638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하였다. 당시 초대 교회의 중심이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 제국에게 점령당하였다.
이슬람교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인 알라(Allah)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유대교, 기독교 등의 셈족계 제 종교를 완성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도 수는 세계 인구의 20%를 점하는 9억 정도이고, 국가 총인구 중 다수를 차지하여 ‘이슬람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만도 43개국에 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슬람교(Islam敎) 또는 회교(回敎)로 불리며, 6·25전쟁 때 UN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터키군에 의하여 1955년 소개되어 2009년 기준으로 약 3만 5천여 명의 한국인 신도를 확보하고 있다.
그 당시의 이슬람교는 보수적 전통이 강한 메카 지도층 코레시아족의 탄압으로 포교에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622년 9월 메카 북방 400㎞ 지점의 메디나로 옮겨갔다. 이 메디나 행을 이슬람에서는 ‘헤지라(聖遷)’라고 부르고 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이주한 무하자룬 교도과 그 지역 협력자들을 모아 최초의 움마라는 교단을 조직하게 되는데, 이를 강화하여 나중에 이슬람국가로 발전시켰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방대한 아라비아지역을 하나의 조직으로 통일한 그는 632년 6월 메디나에서 죽었다.
처음부터 하느님 앞에 완전평등을 주장한 이슬람교는 형제애를 강조하며 영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을 연결함으로써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및 다른 인간과의 관계까지 강한 공동체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다. 예언자가 죽은 뒤 한 세기도 안 되어 스페인에서 중앙아시아를 걸쳐 소아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이슬람의 2차 확장은 12세기 이후 모슬렘 신비주의자인 수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주로 중앙아시아, 터키, 사하라 일대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그 밖에도 무슬림 상인들은 원거리무역으로 인도 동부연안과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중국 사람들을 개종하는 데에 촉매역할을 해냈다. 이슬람교는 여러 인종과 다양한 문화로 이루어져 있던 거대한 지역에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내적 차이를 하나의 종교공동체로 포괄함으로써 일체감을 부여해주었다.
특히, 세계사에 있어서 동서 대륙의 세계문화 교량역할을 담당하였고, 중세유럽 암흑기에는 그리스·로마의 고전문명을 훌륭하게 보존하여 르네상스시대가 도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서구제국주의 세력에 대처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점차 종교적·정치적·사회적 제도 간에 갈등을 빚게 되고 있으나, 하나의 신앙체계로서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이슬람국가를 결속하고자 범 아랍주의라는 이념을 창출하여 현재도 국제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슬람의 기본신앙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예언자”라는 신앙고백에서 출발한다. 또, ‘코란’은 “다만 믿는 것으로 그치고, 이를 실천하지 않는 자는 무슬림일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이렇듯 실천을 강조하는 이슬람 신앙은 대체로 칠신(七信)과 오행(五行)으로 요약된다. 칠신은 알라·천사·경전·사도(使徒)·내세·정명(定命)·부활에 대한 믿음이며, 오행은 오주(五柱)라고도 하는데, 신앙고백·예배·쟈카드(救貧稅)·단식·순례의 실천을 말한다.
우선 믿음을 보면 유일신 알라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근본을 이루며, 알라가 모든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라는 정명관 신앙(定命觀 信仰)과 신은 하나이고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라는 신앙고백 선언이 핵심이다. 구약에서 말하는 아담 이후의 노아·아브라함·모세·이삭·예수·무함마드는 모두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사도로서 여겨진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사도로 존경하나, 기독교에서와 같은 예수신성, 십자가와 부활의 개념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 기독교에서의 원죄설도 부인한다. 무함마드는 최후심판의 날까지 인류사를 관장할 임무를 띠고 이 땅에 온 최후의 사도로서 종래의 모든 예언자의 활동을 보완, 완성하기 위해서 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믿음에 따른 다섯 가지 주요 의무가 있다.
첫째, 신앙고백을 통하여 하느님의 종임을 확인.
둘째, 예배는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하여 드리고 금요일 정오에는 집단예배.
셋째, 자기수입의 2.5%를 헌납하는데, 이것은 국가재정과 가난한 자의 자선에 사용.
넷째, 단식으로 성년무슬림은 매년 이슬람력 아홉번째 달인 라마단기간 동안 해뜰 무렵부터 해질 무렵까지 음식·음료수·담배·성행위와 같은 일체의 본능적 행위를 억제하는 금욕생활을 행한다. 라마단월(月)이 끝나 새 달을 맞게 되면 화려한 의상을 입고 거리로 나와 성대한 축제.
다섯째, 성지순례로서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이슬람력 12월 9일경을 전후하여 메카순례의 의무가 있다. 하느님 앞에서 완전평등이라는 이러한 생활실천은 세계의 방대한 지역과 다양한 민족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또한 음주·간음·돼지고기·고리대금·거짓말 등은 무슬림의 계율로 엄격히 금지.
그리고 이슬람의 몇 가지 이야기는 ‘하렘’과 ‘의상’에 관한 것이다. 16세기에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이슬람 제국이었던 오스만 제국(1299~1922)의 황제는 전쟁으로 인해 황후를 빼앗길까 두려워 ‘하렘(harem)’이라는 비밀 공간을 만들어 후궁들을 생활하게 하였다.
머리와 목을 가리는 <히잡>, 온몸을 가리는<부르카>, 눈만 내 놓고 얼굴을 가리는 <니캅>의 제도가 있다. 또 일부다처제도 허용하고 있다. 이는 전쟁으로 남자들의 사망으로 인한 영향이 크다.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은 1차 세계대전에 패망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또 이슬람 국가는 왕자의 난을 예방하기 위하여 왕위계승을 형제에게 계승하는 점이 특이하다.
7. 역사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유럽의 문명은 그리스의 작은 섬 크레타 섬에서 출발한다. 당시 크레타는 통상과 무역이 주업종인 덕분에 오리엔트의 선진 문명을 유럽에서 가장 빨리 도입했다. 크레타의 선진 문명은 그리스로 유입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리스의 문명은 다시 로마로 유입되면서 자신의 독특한 문명을 가미해 새로운 서양 역사를 꽃피운다. 그리스 문명은 자연 숭배를 사람으로 의인화하면서 사람 중심의 문화를 발전시킨 헬레니즘 문화이고, 313년 로마 콘스탄티누스 왕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기독교 문화가 신 중심으로 널리 퍼지는데 이를 헤브라이즘 문화라고 한다.
(1) 고대 그리스 (BC 1100~BC 146)
그리스는 유럽의 모태 문명이다. 유럽의 최초 문명은 지중해 연안에서 탄생했다. 기원전 2000년경 미노스인 들은 자유롭고 생동감 넘치는 크레타 문명을 만들었다. 이곳에 살던 주민은 에우로페와 같은 동족의 소아시아계 주민으로 추정된다. 소아시아는 현재의 터키 지방이다.
지중해 동부 에게해 주변에서는 여러 문명이 발전하였다. 소아시아 서해안의 트로이문명, 북방계의 본토 문명인 미케네문명 그리고 남방계의 도서 문명인 크레타문명이며, 에게해 바다에서 일어난 문명이기 때문에 ‘에게해 문명’이라고 불린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
이에 더하여 BC 1200년경 발칸 반도를 거쳐 남하한 도리아인들은 그리스에 도시국가를 형성하고, 부족을 단위로 촌락을 이루어 농업과 목축업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다. 상업과 무역의 발달은 교통로와 교통수단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이런 경제활동들은 유럽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스 북부의 야만 국가로 인식되었던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지역에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하였다. 마케도니아는 현재 발간 반도에 위치하였다.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은 부왕인 필리포스 2세의 뒤를 이어 플리스를 평정하고, 동방 원정을 시작하였다. 10년 동안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 걸친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정복지에 그리스인을 이주시켰다. 그의 활동은 동서 문화의 융합을 통하여 헬레니즘이라는 문화를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에서 사망 후 제국은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로 분열된 후 로마 제국에 정복당하였다.
(2) 로마제국 (BC 753~1453년)
BC 753년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건국한 로마는 지중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당시의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테베레 강 하류에 세운 도시국가 로마는 반도 자체를 통일한 이후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4세기 말에 전 지중해 및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이룩하였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는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해이다.
로마제국은 대부분의 서부 유럽을 500여 년간 통치하였고, 그 기간 동안 로마문화는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주민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복한 토지와 노예의 증가, 농업위주의 경제는 상업 위주의 경제로 변화기 시작하였다.
로마제국은 AD 395년에 동서로 갈라졌고 서로마제국은 AD476에 훈족이 게르만족을 덮치자 게르만 민족은 대이동을 하게 되었다. 이시기에 게르만 용법 대장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동로마제국은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로 개칭하였다가 그후 이스탐블로 개명하고 그곳에 수도를 두고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으로 멸망할 때까지 1000여년간 동부 유럽을 지배하면서 동부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로마가 유럽문화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는 그리스도교와 로마의 법률이다.
지중해 주변 모든 나라를 점령한 로마인들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노예수백, 수천명이 의식주와 관련된 모든 일을 해결해 줬으니 말이다. 로마 시민의 90%는 일자리도 미래도 없는 평생 실업자로 전략하였다. 푹동과 혁명이 두려웠던 정부는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무료음식과 술을 제공했고, 콜로세움에서는 하루 12시간 동안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이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잔인한 구경거리가 무료 제공되었다 그 결과 결국 로마를 일으킨 중산층은 몰락하고, 로마 공화국은 귀족과 황제 위주 제국으로 타락하였다. 할 일없는 사회의 비극적 사실의 역사적인 교훈이다.
로마제국에 영향을 미친 게르만 민족은 발트해 북유럽 연안에 살던 소수 민족이다. 북유럽의 게르만족은 로마입장에서는 이방인이고 야만인이라고 한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경작지가 부족한 것이 계기가 되어 게르만인들이 남부로 내려오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게르만 민족은 흉노족이 동진과 함께 대대적인 이동이 시작되었다. 초기의 이동은 흉노를 피해 로마로 이주한 유민이고, 4세기 훈족의 압박으로 게르만족이 무장하면서 대대적인 이동이 시작되었다. 훈족은 북방 기마 민족을 통칭하는 흉노의 한 분파이다.
흉노족은 몽골 초원에서 발흥한 아시아 북방의 유목제국을 건설해 중국과 힘을 겨뤘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약 600년간 중원지역을 놓고 중국과 각축전을 벌린 종족이다. 그들은 중국에 패망한 이후 동유럽의 중세시대를 바꾼 훈족으로 세계사에 재등장하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초원의 지배자로서 세계사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흉노가 선진적인 문화를 영위했고, 동서양의 다양한 문명과 교류했음은 속속 증명되고 있다.
이 훈족이 우리 조상인 한민족과도 연계가 있다. 이들의 영토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 서로는 아랄 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와 티베트 고원 그리고 북으로는 바이킬호와 이르티슈 강변까지 이르렀다. 이들 중 한 부류는 서진하면서 훈족으로 성장하였고, 다른 한 분류는 동진을 하면서 현재 한민족의 일부가 되었다고 한다.
게르만 일파인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이 로마제국에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동고트의 약탈로 약해진 서로마는 서고트족의 일격으로 망하게 되었다. 서로마가 멸망(AD476)한 것을 기준으로 유럽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 간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 라틴 문화와 게르만 문명이 융합되어 발전하면서 유럽의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3) 중세 (5세기~ 15세기)
중세는 진정한 의미에서 ‘서양’ 혹은 ‘유럽’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시기이다. 4~5세기경 라인강 하류를 중심으로 살고 있었던 프랑크족은 프랑크왕국을 건설하고 그 영토를 확장한 이후 기독교를 크게 융성하게 하였다. 843년에 베르팅 조약과 879년의 메르센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3분 되었고, 이들 3국은 오늘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었다.
십자군 원정(1069년~1224년)이후 베니스, 플로렌스, 제노아를 중심으로 서부 유럽과 동방의 이슬람교 문화권과의 접촉이 확대되었다. 당시 교역의 중심지였던 이들 도시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이들 도시의 부는 르네상스를 이룩하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재생을 뜻하는 르네상스는 본래 뜻 그대로 14세기에 이르러 점차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에 대한 흥미가 학자와 문인들에서 나타나게 되었고, 이런 고전 문화에 대한 흥미의 재생이 곧 르네상스이다.
고전문화에 대한 단순한 흥미라기보다 중세 그리스도교의 신성에 대한 저항이었고, 휴머니니즘의 회복이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튼, 베이콘, 데카르트 등에 의해 발전된 과학적 사고와 방법은 성서에 기초를 두었던 중세의 신중심의 사고와 대치되었다.
십자군 원정은 교황의 호소로 조직된 기독교적인 성향이 강하게 띤 군대이다. 11~ 13세기에 중세 유럽의 로마 가톡릭 국가들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대항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목적으로 행해진 대규모의 군사원정이다.
프랑코 왕국은 5세기말 서프랑크계의 게르만족이 세운 왕국이다. 프랑코족은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아우리는 지역이다. 이 왕국은 현재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형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프랑크 왕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의 동고트족과 아프리카의 반달족을 격멸하고 아랍인이 에스파냐의 서고트 왕국을 제거한 와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존속 확장한 게르만족의 정치체제이다.
신성 로마제국은 로마제국 멸망 이후 그 뒤를 이은 국가로 로마제국의 관념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현실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모든 것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로마제국이라는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럽에서 로마가 가지는 의미가 무척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성 로마제국은 800년 샤를마뉴 대관식 때부터 1806년에 이르는 동안 처음에는 프랑크 황제가 나중에는 독일인 황제가 통지한 영토이다. 특히 독일 국왕 오토 1세가 962년에 교황 요한 2세로부터 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하면서 신성이라는 말을 사용함에 따라 신성 로마제국이 성립되었다. 신성 로마제국의 의미는 ‘신성’이라는 말은 종교와 관련이 있고 기독교와의 일체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국’이라는 말은 황제의 국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1034년부터 콘라트 2세가 통치하는 영토를 가리켜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1157년부터 ‘신성 제국’이라는 이름이 쓰였다. 하지만 샤를마뉴 대제에서 오트 1세 때까지는 ‘황제이며 존엄한 자’라는 표현을 특정 영토와 연결 짓지 않고 썼다.
800년에 샤를마뉴가 황제의 관을 쓰고 난 후부터 신성 로마제국은 교황청과 함께 서유럽에서 가장 지위가 높고 중요한 곳이며, 고대 로마제국의 계승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1556년 이후 제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재로 여러 독일 제후들이 합친 연방체에 불과했다. 1806년 나풀레옹은 프란츠 2세의 호칭을 발탈하였다. 결국 프란츠 2세가 1806년 8월6일 스스로 물러남으로 신성 로마제국은 막을 내렸다.
(4) 르네상스 시대 (14~16세기)
르네상스는 중세와 근세 사이에 서유럽 문명에 나타난 역사 시기와 그 시대에 일어난 문화운동이다. 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과 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르네상스의 과학적 사고와 방법은 산업혁명을 통하여 기계문명과 기술문명을 탄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이슬람교를 믿는 터키족에 의해 근동지방을 통하여 이루어지던 정상적인 동방무역로가 봉쇄됨에 따라 유럽인들은 새로운 무역로 개척이 요구되었고, 이는 곧 15~16세기에 걸친 인도항로와 신대륙 발견으로 요약되는 지리적 대발견 시대를 열어 놓았다.
(5) 근세 초기 (16~17세기)
16~17세기 근세초기에 유럽의 팽창은 기본적으로 무역 성격을 띤 것으로 볼수 있었으나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의해 시작된 식민지 개척의 그 후 서부 유럽 여러 나라에 의해 확대되었다.
이 시기가 신항로 시대이다. 14세기에 들어서며 동방으로의 새로운 황금 유혹은 대항해 시대를 열개했다. 그 선두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스페인)가 있었다. 이때 유럽은 동로마가 막을 내리는 시점에, 오스만 튀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하였던 시점이다. 오스만 튀르크족의 조상은 원래 돌궐족이다.
신항로 개척의 초창기 주역은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인 엔리케(1394~1460)였다. 그리고 에스파냐 아라곤의 페르디난도와 카스틸랴 이사벨의 결혼으로 에스파냐가 통일된 시기이다. 포르투갈은 인도 항로를 개척하면서 남미 브라질 등 많은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세계 1등국으로 도약하는 시기였다. 이사벨라 여왕(1474~1506)은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모험가 콜럼버스(1446~1506)를 후원하였다. 그가 도착한 곳은 아메리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인도 어딘가에 와 있다고 믿었다. 그 후 이탈리아의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하여 콜럼버스가 발견한 인도는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인 것을 알아냈다. 아메리카라는 명칭은 그의 이름에서 나왔다.
신항로 개척의 모험가로는 콜럼버스,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 브라질을 발견한 포르투칼의 카르랄(1467~1520), 파나마 지역을 횡단하여 태평양을 발견한 에스파냐의 발보아(1475~1519), 최초 세계일주 항해 주역인 마젤란(1480~1521) 등이다. 15~16세기 대항해의 가장 큰 동기는 경제적 이유였다. 많은 부와 상권을 획득함으로써 에스페냐는 유럽의 일류 강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5~16세기 유럽인의 항해와 신대륙 발견은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에 세게 되었다.
(6) 근대적 특징의 혁명 시기 (17세기 초~18세기 초)
루이 14세가 죽은 후(1715년)부터 빈회의가 개최될 때(1815년)까지 1세기 동안의 유럽은 근대적 특징을 가진 혁명의 시기였다. 이 시기는 정치와 사회적으로는 프랑스 대혁명(1789)과 같은 시민혁명이 일어나 절대주의 군주체제를 타도하고 근대 시민사회를 수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 7월14일~1794년 7월 27일 사이의 5년간 계속된 혁명이다. 1791년 6월 21일 국왕 루이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가 도망을 치다가 베르뎅 가까이 있는 바렌에서 농부에 의해 붙잡혔다. 왕과 왕비의 이런 행동에 파리 시민들의 감정은 고조되었다. 하지만 무지한 정부와 국민의회는 왕가를 보호하려고만 하였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 명목상 국왕 자리에 있었다.
1792년 시민은 왕궁을 습격하였고, 왕은 스위스 용법을 통해 총격을 가하였으나 승리는 시민에게 돌아갔다. 도시 자치 단체인 코뮌은 의회를 누르고 국왕을 폐위시켜 감옥에 가두었다. 1793년 1월 21일 프랑스 왕정이 저지른 죄를 물어 루이 16세의 목을 단두대인 기요틴에 매달았다. 그리고 그의 부인 마리 앙트와네트는 국고를 낭비한 죄와 오스트리아와 공모하여 반혁명을 시도한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즈 1세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리지어 사이에서 막내 딸로 태어나 루이 16세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가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1793년 10월 16일 처형이 혁명의 마지막 의미가 되었다.
특권의 폐지와 인권 선언의 기초는 1789년에 시작되어 1794년까지 5년 동안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민중은 국민의회를 통해 군주제를 철폐시켰고 봉건 제도와 교회의 특권도 폐지시켰다. 프랑스 국민의회는 여러 특권 제도를 폐지한 후 1789년 8월 26일 국민으로서 가져야할 권리에 대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라는 명칭으로 선포한 ‘인권 선언’을 통과시켰다.
신성 로마제국은 중세에서 근대 초까지 이어진 기독교 성향이 강한 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연방체이다. 프랑크 왕국이 베르됭 조약으로 나뉜 동쪽에서 독일 왕이 마자르족을 격퇴한 후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수여받아 신성로마제국을 선포하였다.
즉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대제가 유럽에서의 고대 로마제국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을 정복한 후 이탈리아에 진격하여 로마교황을 롬바르드족의 공격으로부터 구출해 주었다. 교황 레오 3세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800년 샤를마뉴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이리하여 프랑크 왕국을 제국이라 불렀고, 이 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이라 생각했다.
이때가 서기 800년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였다. 카롤로스 대제 이후 잠시 분열 되었다가 962년 로마교황 요한 12세의 대관식으로 서로마 황제의 지위를 다시 얻은 독일 왕국의 왕 오토 1세를 본격적 출발로 보는 입장도 있다. 후에 정착된 정식 명칭은 도이치 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이다.
카롤로스 대제 이후 흐지부지 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정통성을 다시 세운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800년의 서로마 제국과 926년의 신성로마제국을 굳이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 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이나 연장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로마제국이라 불렸고, 또 고대로마의 전통보존자인 그리스도교회와 일치라는 뜻에서 ‘신성’이라는 말을 불였다. 실제 사용은 15세기로서 그 이전은 단순히 제국 또는 로마제국이라 불렸다.
신성로마제국은 초기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으나 점차 이탈리아에 대한 간섭으로 독일지역에 소홀하면서 여러 제후들에 의해 부활 상태가 되었다. 그후 한 국가로서의 실제적인 의미를 잃고 단순한 형체만이 남은 신성로마제국은 나풀레웅 시대의 국제지각 변동의 충돌에 의해 최종적인 붕괴를 하였다. 1804년 프란츠 2세는 단순히 오스트리아 황제라고 칭하게 되었으나, 1806년 16명의 제국의 제후가 라인동맹을 조직하여 제국에서 분리하였기 때문에 신성로마 황제의 지위를 포기하고 제국의 소멸을 선언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은 여황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를 끝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단절되었다. 제국은 800년에 시작하여 1806년 소멸하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7) 산업혁명의 시기 (18세기 중엽~19세기 초)
18세기 중엽(1764년) 방적기 발명부터 19세기 초까지 진행된 산업혁명은 경제적 의미 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 생활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유럽의 산업혁명은 르네상스 운동과 지리적 대발견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1769년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은 가내 수공업식에서 기계공업으로 전환되었고, 공업제품의 소화를 위해 식민지 재발견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8) 19세기
나풀레웅을 퇴위시킨 유럽열국의 대표들은 프랑스 혁명 및 나풀레웅 전쟁이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1814년 9월부터 1815년에 걸쳐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남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기아나의 일부와 실론섬 지금의 스리랑카을 차지하였다. 그 대신 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령인 지금의 벨기에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그 대가로 북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공화국과 밀라노 공국을 차지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1809년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핀란드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 대신 스웨덴은 덴마크 영토였던 노르웨이를 차지하게 되었다.
1815년 빈회의이후 약 60년 동안 유럽 각국은 정치적 자유나 국내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어 국제적으로 팽창을 추구하는 경쟁이 사라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1870년대부터 1914년에 이르는 30~40년간에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등 선진제국들은 경쟁적으로 식민지 확장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아프리카의 대부분을 비롯하여 아시아, 태평양의 많은 부분을 유럽 제국이 분할하여 차지하게 되었고 대영제국은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9) 20세기 이후
1914년~1919년 제1차 세계대전, 1938년~1945년 2차 세계대전 그 후 유럽대륙은 동서로 분열되었다가 독일의 통일과 소련의 붕괴와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 러시아의 옛 냉전형 독자행동의 회귀와 중국의 등장으로 세계는 다시 주도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고 있다.
그리스·로마문화, 그리스도교의 전파,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그리스도교가 지배하였던 중세문화, 르네상스, 종교개혁, 지리적 대발견과 식민지 개척, 시민혁명, 산업혁명, 1․2차 세계대전, 동서 양대 진영의 대립, 유럽 공통체의 출범 등은 오늘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사회적으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역사적 배경이 된다.
8. 더 알고 싶은 유럽 이야기
(1) 스페인 산티아고(Santiago) 순례자 길(Camino de Santiago)
스페인 Santiago 순례자 길 마지막 구간 Arzua지역의 숲길
예수의 제자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려고 걸었던 길이다. 9세기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고 이때 유해에 조개껍질이 함께 출토 되었다. 그 유해를 모신 성당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다. 이후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면서 오늘날 순례길이 되었다.
프랑스 남부국경인 생장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대성당까지 이르는 800km 여정이다. 하루에 20~30km씩 한달을 꼬박 걸어야 한다. 1987년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가 출간된 이후 더욱 유명세를 탔으며, 또한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되자 유럽과 전 세계로부터의 성지순례가 더욱 활발해 졌다.
70일 일정의 유럽여행이지만 이 산디애고 순례자 길을 보다 많이 걷기위하여 스페인에서는 국내항공을 3구간 이용하면서 렌드카를 이용했다. 순례자의 길은 산디애고에서 40km 떨어진 Arzua도시로 이동하여 걸었다. 참 편하고 아름다운 의미있는 풍경을 많이 보았다. 1시간에 4km씩 10시간을 계속 걸어서 산디애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밤 2시경에 도착하여 광장에 두 팔을 펴고 들어 누웠다. 밤중에는 조개비 표시만 보고 걸었는데 순례자의 마지막 구간이라 길이 잘 표시되어있었다.
보통 순례자 길은 산디애고에서 끝이나나, 서쪽 해안도시인 Fisterra까지 또 다른 마지막 순례자의 길이 있어 그곳은 차로 2시간 30분 걸려 그곳에 간다. 성인 야고보의 전도활동의 여정을 조금이나 만 체험하고자 하였다.
스페인 Santiago 순례자 길 마지막 구간 Arzua 도시의 순례자 길 표시판
스페인 Santiago 순례자 길 마지막 구간 Arzua지역의 순례자 관리안내소 간판
스페인 Santiago 순례자 길 Arzua지역의 순례자 숙소의 안들
스페인 Santiago 순례자 길 Arzua지역의 순례자 관리안내소 앞
스페인 Santiago 순례자 길 Arzua지역의 순례자 관리안내소 전경
스페인 Santiago 순례자 길 마지막 구간 Arzua지역의 산과 들판 풍경
스페인 Santiago 순례자 길 마지막 구간 Arzua지역의 길옆 상점겸 휴게소
Camino de Santiago 가는 표시판
스페인 산디애고 순례자 길에서 남긴 글
Camino de Santiago 가는 조개폐 표시
스페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대성당 종착지 도착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Ⅱ
산티아고 순례자 길 800km 루트: 출발지: 생 장 피에드 포르-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또 다른 종착지: 피스테라
예수의 12사도 중의 한명인 성 야곱은 예수 생전에 하나님의 복음을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한다는 사명을 띠고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 지방으로 전도하기 위해 떠난다. 약 7년여의 전도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성 야곱은 헤롯왕에게 참수를 당하여 예수의 12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제자들은 그의 유골을 생전에 그가 전도하던 스페인 북부지방으로 가져와서 묻게 된다.
야고보는 영어권에서는 세인트 제임스(St. James), 불어는 생자크(Saint. Jacques)로 불리며, 스페인어로 산티아고(Santiago)로 불린다.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요한의 형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레아 출신으로 예수의 부름을 받았을 때도 아버지와 함께 겐네사렛 호수에 배를 띄워 물고기를 잡는 어부이며, 베드로의 친구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813년 한 은둔 수도사가 별빛의 인도에 따라 이 유골과 부장물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유골을 안치한 성당을 세웠다. 이 성당을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이라 하였다. Santiago는 성 야곱을 뜻하고, Compostela는 별들의 들판 이라는 뜻이다. 성 야곱의 유골을 안치한 이 성당은 예루살렘과 로마에 뒤이어 가톨릭 세계 3대 성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유럽의 각 지역으로부터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향한 순례길에 나서게 되었다.
1982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산타아고 콤포스텔라를 방문하면서 다시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하였다. 특히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가 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순례자>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진정한 나를 찾고 자신의 삶을 변화 시키고 싶다는 꿈을 심어 주었다. 제주 올레길의 모델이 된 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한국인 여행자들도 많이 늘어났다.
순례의 길의 시작은 순례자 사무소에서 순례자여권(Credential)을 발급받은 후 길을 시작한다. 일정한 거리마다 있는 순례자 숙소(Albergue)에서는 순례자 여권을 확인 후 스탬프를 찍어주고 순례자 숙소를 이용할 수 있다. 숙소에는 여행에 필요한 여러 시설이 갖추어 있어 여행에 불편함이 없다. 길의 곳곳에는 노란 화살표 또는 순례자의 상징인 가리비 조개껍질의 빗살 표시로 빗발이 모이는 곳이 길의 방향을 알려주고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길 전체 구간에 순례자들이 함께하는 경우도 많고, 치안 또한 양호한 편이다. 길을 다 걷고 나서 산티아고 대성당 옆에 있는 순례자 사무소로 가서 순례자 여권을 제시하면 일정구간 이상 걸었다는 사실을 확인 해준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800km 순례자 길에는 강, 들판, 낮은 언덕 등 유럽 자연환경과 유럽의 역사, 유럽의 문화를 접할 수 있다. 현재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종교와 민간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다. 스페인 북부지방은 기원전 2세기부터 5세기까지는 로마제국의 속주로 지배를 받았으며, 그 이후로는 게르만의 침입으로 서고트 왕국이 통치하였고, 8세기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반도 점령 시부터 1492년 이슬람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는 이슬람 문명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따라서 산티아고 순례길이 지나는 지역에는 다양한 건축 양식이 공존하고 있다. 즉 바실리카 양식, 비잔틴 양식, 로마네스코 양식, 고딕 양식, 네오 고딕 양식 등 다양한 건축 양식이 있다.
800km 순례자 길을 마치고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야고보 성인(스페인어로 산티아고)의 무덤을 참배하려는 행렬이 장사진이다. 전 세계에서 연간 20만명 이상이 찾는 길이며,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점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은 그렇게 신앙심과 관광객의 호기심이 공존하는 세계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야고보 성인의 전설과 스페인 사람들의 열정이 만나면서 비롯됐다. 당시로서는 '땅끝'인 이베리아 반도 서북단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갔다가 순교했고, 제자들이 유해를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그 후 800년이 지난 후, 기억에서 사라졌던 야고보 성인은 전설로 부활한다. 이곳에서 주인 모를 무덤과 제단이 발견되자 당시 교회는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 거의 전역을 점령한 이슬람 세력과 싸우던 그리스도교인들은 야고보를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예루살렘마저 이슬람에 점령돼 성지순례가 불가능해지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예루살렘 대신 순례할 수 있는 성지로 부상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오는 순례객들이 북적였다.
대표적인게 프랑스 남부에서 800㎞에 이르는 길은 중세 이후 열기가 식었던 이 순례길이 다시 각광받게 된 것은 1982년 요한 바오로2세 교황이 직접 방문하고, 브라질 작가 코엘류가 이 길에서 겪은 영적 체험을 적은 '순례자'를 발표하면서.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지정되면서 순례객이 급증했다.
순례자 길을 걸으면서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의 길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 중에 잘한 것에 대한 것보다 잘못한 것에 대한 반성과 회계하는 시간이 많았다. 하느님 앞에 용서와 이를 통한 그 당사자에 대한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삶이란 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도 크게 느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삶은 그 반성을 토대로 후해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는 다짐도 하였다.
나는 마지막 순례자 길을 마무리하면서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이 길을 열심히 걸었다.
자연, 진리
예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주님의 자녀로
주님의 도구로 살게 하소서!
2014. 8. 12
서울 Korea, 김진규 이점우
▷ 순례자 길의 주요 도시
① 생 장 피에드 포르
산디애고 순례자 길의 출발지점이 생 장 피에드 포르이다. 이 루트에서 순례자는, 해발 146미터의 생장 피에드포르에서 해발 952미터의 론세스바예스로 가기 위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합니다. 이 구간은 피레네 산맥의 경사면이 남북으로 경계를 이루며 까미노 길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구간입니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구간은 온또(5.6km)- 알베르르게 오리손(2.4km)- 오리손 봉(3.8km)- 론세스바예스(13.3km)의 여정이다.
② 팜플로나
피레네산맥을 넘어서 스페인 지역으로 들어가서 처음으로 만나는 인구 20만의 도시로 높은 성채로 둘러싸인 요새형이다. 도시의 시작은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건설하였다. 대성당과 팜플로나 시청사 등 많은 역사 유적이 있다.
③ 로그로뇨
로그로뇨(스페인어: Logroño)는 스페인 라리오하 주의 주도이다. 고도는 384m 이다. 인구는 16만명 정도이다. 세계 5대 와인 생산지이자 스페인 최대의 레드와인 생산지다. 프랑스 남부와 인접한 덕분에 프랑스 보르도에서 이주한 생산자들에게 양조기술을 전수받아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로 성장한 곳이다.
그리고 로그로뇨는 로마시대에 건설된 성곽도시라는 중세 시대의 건축물들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로그로뇨 대성당은 15세기 고딕양식으로 세워진 입구와 17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완성된 탑이 웅장하다.
④ 부르고스
인구 18만의 부르고스주 주도로 아름다운 고도이다. 스페인에서 첫 번째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된 고딕 양식의 부르고스 대성당과 도시를 둘러싼 성벽의 산타마리아 문, 우엘가스 왕립 수도원, 산 에스테반 성당 등 주요한 유적이 있다.
⑤ 레온
10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서 레온 왕국의 수도로서 번성하였다. 201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딕양식의 걸작 레온 대성당, 산마르코 수도원 등 많은 역사적 건축물이 있다.
⑥ 사리아
사리아는 밀의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입니다.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내려온 보석 같은 예술품과 아름다운 자연환경, 친절한 사람들, 다양하고 풍성한 먹거리가 있다. 아름다운 마요르 길과 평행으로 난 길에는 각종 상점이 있고, 강가의 도로에는 수많은 선술집이 있다. 늦은 가을이나 겨울은 군밤의 계절이다
사리아에는 막달레나 수도원이 있다. 사리아 시내의 언덕 위에 위치해있으며 도시와 근교의 멋진 풍경을 감상하기에 좋다. 이사벨 여왕 시대에 만들어진 고딕 양식 성당에는 플라테레스코 양식 문과 고딕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양식의 회랑이 있다. 현재 탑 하나만 남아있는 성곽 유적이 있다. 그리고 살바도르 성당이 있는데, 13세기에 만들어진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⑦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중세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큰 사거리의 숙소를 찾는데도 미로 같은 골목길 때문에 힘이 들었다. 사도 성 야곱의 유골이 안치된, 12세기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중심으로 한 구 시가지는 세계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아름다운 중세 도시로 손꼽히고 있다.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프랑스 생 자크(Saint. Jacques) 피드포르에서 시작한 800km의 순례여정을 마치고,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도착한 순례자는 대성당의 마당에서 긴 여정의 순례자 길을 마무리하는 곳이기도 한다.
⑧ 피스테라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 지점이다. 야곱의 제자는 팔레스타인에서 순교한 야곱의 유해를 배를 타고 이곳 피스테라 해안으로 상륙하여 육로로 이동해 현재 산디애고 데 콤포스텔라에 묻었다고 한다. 산디애고에서 피스데라까지 약 100km정도이다. 도보는 3일 정도가 소요되며, 버스를 이용하며, 3시간 정도가 걸린다. 해안선으로 이루어진 도로의 경치가 볼만 했다.
피스데라까지 순례하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 산티아고 순례자 길 37간의 일정과 피스테라 순례길
- 대한민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자료 참조
Route 프랑스길
Starting Place 생장 피에드포르
Day 1 생장 피에드포르~론세스바예스: 25.1km/ 10h
Day2 시세 언덕~론세스바예스: 17km/ 6h
Day3 론세스바예스~수비리: 23km/ 7h
Day 4 수비리~빰쁠로나: 20km/ 7h
Day 5 빰쁠로나~뿌엔떼 라 레이나: 25km/ 7h
Day 6 뿌엔떼 라 레이나~에스떼야: 22km/ 6h
Day7 에스떼야~로스 아르꼬스: 21km/ 6h
Day 8 로스 아르꼬스~비아나: 19km/ 5h30
Day9 비아나~나바레떼: 22.5km/ 6h30
Day 10 나바레떼~나헤라: 18km/ 5h
Day11 나헤라~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 21.5km/ 6h
Day 12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벨로라도: 23km/ 6h30
Day 13 벨로라도~산 후안 데 오르떼가: 24km/ 7h
Day14 산 후안 데 오르떼가~부르고스: 29.5km/ 9h
Day 15 부르고스~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21.5km/ 6h
Day16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까스뜨로헤리스: 21km/ 6h
Day 17 까스뜨로헤리스~프로미스따: 25.5km/ 7h30
Day 18 프로미스따~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19.5km/ 6h
Day 19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레디고스: 23.5km/ 7h
Day 20 레디고스~사아군: 17km/ 5h
Day 21 사아군~엘 부르고 라네로: 19km/ 6h
Day22 엘 부르고 라네로~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19.5km/ 6h
Day 23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레온: 19.5km/ 6h
Day 24 레온~산 마르띤 델 까미노: 25km/ 7h
Day 25 산 마르띤 델 까미노~ 아스또르가: 24.5km/ 7h
Day 26 아스또르가~라바날 델 까미노: 24.5km/ 7h
Day27 라바날 델 까미노~몰리나세까: 25.5km/ 7h30
Day28 몰리나세까~까까벨로스: 24km/ 7h
Day 29 까까벨로스~베가 데 발까르세: 26km/ 7h30
Day30 베가 데 발까르세~오 세브레이로: 13.5km/ 5h
Day 31 오 세브레이로~뜨리아까스떼야: 22km/ 6h
Day32 뜨리아까스떼야~사리아: 24.5km/ 7h
Day 33 사리아~뽀르또마린: 22.5km/ 7h
Day 34 뽀르또마린~빨라스 데 레이: 25.5km/ 8h
Day 35 빨라스 데 레이~아르수아: 30.5km/ 9h
Day 36 아르수아~뻬드로우소: 19.5km/ 6h
Day37 뻬드로우소~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 20.5km/ 6h
Day38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피스테라(대중 교통수단 이용): 100km/ 도보는 3일
피니스테라는 피니스(finish)와 테라(terra)로 육지의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야곱의 또 다른 선교의 종착지이며, 스페인 해안선 땅끝 마을이다. 보통 산디애고 순례자 길은 프랑스 생장 피에드포르에서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라고 하지만 피스테라의 구간이 더 있다.
▷ 순례자길에 필요한 것들
① 등산화- 가볍고, 발목을 보호할 수 있는 방수용 등산화.
② 배낭- 45~55 리터 용량으로 비품적재가 용이한 것.
③ 침낭- 1 킬로그램을 초과하지 않는 것.
④ 지팡이- 지팡이는 유용하며, 특히 내리막을 걸을 때 무릎의 충격을 완화함.
⑤ 햇빛 방지품- 색안경, 햇빛 방지를 위해 모자를 착용하고, 햇빛방지 크림.
⑥ 신발- 순례구간 휴식 시 착용하기 위한 편안한 신발.
⑦ 옷 종류- 지퍼가 달린 바지, 짧은 바지, 속옷 3벌, 양말 3족, 면양말 2족
⑧ 우비시 장비- 방수용 바지, 비옷, 플라스틱 샌달,
⑨ 매트- 바닥이나 야외에서 취침을 하기 위해서 고무 절연재질의 매트
⑩ 목욕 용품- 샌달, 수건 등 필수적인 위생품.
⑪ 의약품- 아스피린, 탄력붕대, 살균제, 가위, 거즈, 핀셋 및 롤 테이프 등.
⑫ 밤에 이동 대비- 작은 해드 램프, 야간도로 행보용 안전 옷
⑬ 개인전화기, 스마트폰- 순례 중 위급한 상황 대비.
⑭ 증명서- 신분증명서, 여권, 사회보장 카드, 의료보험 카드 등
⑮ 안내책 및 지도- 인터넷의 유용한 정보.
⑯ 기타- 다목적 용 등산용 칼, 위생용품, 세탁 세제, 배낭에 젖은 옷을 거는 안전핀,
건조용 족집게, 베게, 물병, 티슈, 화장지, 알람시계, 귀마개, 돈, 신용카드 등
또 다른 스페인 북서 해안 땅끝 마을 '피스테라' 종착지 해안 언덕에 있는 예수님 상
또 다른 스페인 북서 해안 땅끝 마을 '피스테라' 종착지 해안 바다
또 다른 스페인 북서 해안 땅끝 마을 '피스테라' 종착지 해안 백사장
또 다른 스페인 북서 해안 땅끝 마을 '피스테라' 종착지 성당
또 다른 스페인 북서 해안 땅끝 마을 '피스테라' 종착지 순례자 표시판
(2) 유럽의 카톨릭 성지
(가) 벨기에 반늬
벨기에 반늬 성모 발현 성지
ME식구의 성지 순례 이야기를 듣고 이번 유럽 여행시 그곳들에 가보기로 하였다. 첫 성지가 벨기에 반늬였다. 성지로 가는 길은 한적하고 아름답습니다. 반늬 성지는 1933년 1월 15일부터 3월 2일 사이에 성모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로 반늬에 사는 마리에트(12세)에게 8번이나 발현하여, 기적의 샘까지 열어주시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치유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후 1949년 성지로 지정되었다.
(나) 이탈리아 아씨시(Assisi)
움브리아 지방의 수바지오 언덕 위에 중세모습 그대로 간직한 마을이 있다. 아씨시는 성 프란체스코와 성녀 클라라가 태어난 곳이다.
‣ 산 프란체스코 성당
이탈리아 아씨시(Assisi)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
성 프란체스코 사후 2년째 되는 해 122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명에 의해 그를 성인으로 올리고 탄생지에 유해를 봉납하는 성당을 건립하였다. 자하에는 프란체스코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 산타 키아라 성당
이탈리아 아씨시(Assisi) 성녀 글라라의 산타 키아라 성당
1257~1265년에 세워진 산타 키아라 성당은 이 지방의 특산물인 분흥색 대리석과 흰색 대리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줄무늬 외벽이 유명하다. 클라라는 1193년 아시시 귀족의 딸로 태어났으나 16세에 성 프란체스코를 만나면서 운명이 바꿔었다.
그를 숭배하면서 그와 똑같은 수도생활을 하고 일생을 하나님께 기도를 하며 생애를 마쳤다. 1260년 이곳에 성녀 클라라의 유해를 안치했다. 키아라는 클라라의 이탈리아식 이름이다.
‣ 성 프란체스코와 성녀 글라라
성 프란체스코는 1182년 아시시에서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사치와 방탕에 빠져 인생을 허비하기도 했지만 27세이던 1226년 성 메시아의 날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되어 그 가르침대로44세로 사망할 때까지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청빈, 복종, 순종으로 대변되는 프란체스코회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던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창립한 인물로 성녀 키아라(클라라)와 함께 이탈이아 수호성인으로 추앙 받고 있다.
클라라는 1193년 아시시 귀족의 딸로 태어났으나 16세에 성 프란체스코를 만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그를 숭배하면서 그와 똑같은 수도생활을 하고 일생을 하느님과 기도을 하며 생애를 마쳤다. 성 프란체스코는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성녀 글라라는 산타 키아라 성당에 그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부부의 본명을 남편은 프란체스코로 아내는 클라라로 하는 경우는 이런 연유에 기인한다.
(다) 스페인 아빌라(Avila)
스페인 아빌라거리 풍경
아빌라는 로마인이 건설하였고 8~10세기에는 아프리카 북서부에 사는 이슬람교도인 무어인이 지배하였으며 1090년부터는 그리스도인이 탈환하여 국토회복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된곳이기도 하다. 스페인 가운데 지역인 카스티야 지방에 있는 아빌라 주의 주도로서 해발 1131m에 있는 전형적인 성곽도시이다.
이곳의 아빌라 성은 총길이 2550m에 높이 12m, 두께 3m의 어마어마한 성벽의 완벽한 성곽도시다. 성벽위에서 바라다보는 아빌라의 모습과 성벽 밖으로 펼쳐진 카스티야 평원은 또 다른 멋과 맛을 주고 있었다.
이곳 아빌라에 성녀 데레사가 1515년 3월 28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데레사는 원래 귀족 가문의 자녀로 신앙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였다. 타락한 중세 가톨릭 교회의 반성을 촉구하며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수도회 개혁자 였다. 19세에 수녀가 되어 많은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는 수도회의 개혁 활동을 하여, 17개의 수녀원과 15개의 수도원을 설립하였다고 한다. 1582년 4월 19일 알바 데 토로메스에서 서거, 1614년에 시복, 1622년에 시성되었고,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고 한다.
성녀 데레사는 세속화되는 것에 많은 회의를 가지면서 수도원을 많이 세웠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도 아빌라 성 데레사 상이 있다. 아빌라에는 그 성녀의 여러 유품들을 전시한 박물관 등이 있다.
‣ 아빌라-성녀 데레사
스페인 아빌라 성녀 데리사 박물관의 데리사 조각상
'태양의 나라'라는 스페인이지만 봉쇄수도원으로 쓰였던 공간은 서늘했다. 지난 8일 찾은 스페인 북서부 고성(古城) 아빌라의 엔카르나시온 수도원.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는 건물이다. 50㎝ 두께는 되어 보이는 돌벽 안의 공간엔 작은 창문 몇 개 외에는 빛도 들지 않았다. 심지어 나무로 만든 출입문도 두툼했다.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나오지 못한다는 봉쇄의 의미가 가슴에 꽂혔다.
실내엔 각종 냄비와 프라이팬 등이 보인다. 주교와 사제들의 제의도 여러 벌 걸려 있다. 수백 년 전 수녀들이 만들어 봉헌하거나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들. 그런데 뜻밖의 물건이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돼 있다. 기타, 북, 피리 심지어 하프도 있다. 작은 실내악단을 구성할 만한 악기들이다. 봉쇄수도원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비감함 혹은 '숨죽이는 공간'만은 아니었다. 엄격할 때는 엄격하되 그 안에서 바깥세상과 똑같이 밥도 먹고, 음악도 연주하며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느님과 만나는 곳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제·수도자들에게 "얼굴 찌푸리지 말라"고 하는 '복음의 기쁨'이란 바로 이런 정신이 아닌가 싶었다. 박물관 마당 건너엔 지금도 수녀 10여명이 봉쇄 수도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엔카르나시온 수도원은 아빌라의 대(大) 데레사(1515~1582) 성녀가 지금도 봉쇄수도원의 대명사로 불리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창립한 곳, 16세기 수도원 개혁운동의 요람이다. 예수회의 이냐시오 성인보다 한 세대 후에 태어난 데레사 수녀는 '펜'과 '맨발'이 트레이드 마크다. 맨발은 수도원 개혁을, 펜은 그의 영성을 상징한다.
아빌라의 부유한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난 성녀의 꿈은 '하느님 만나기'였다. 7세 때 순교자가 되겠다며 오빠와 함께 아프리카로 가출을 감행한 당돌한 소녀였다.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수녀원에서 자란 그는 기도 중 예수님이 매질당하는 환영을 보게 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으며 큰 신심(信心)을 얻는다.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 나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고 한 순간을 연상시킨다.
그런 열정의 성녀에게 당시 수도회들은 초심(初心)을 잃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것으로 보였다. 자신이 몸담은 가르멜회도 그랬다. 이스라엘 가르멜산(山) 은수자(隱修者)로부터 시작돼 13세기 서유럽으로 이주한 가르멜회는 14세기 전성기를 맞았다가 점차 초기 정신이 희미해졌다. 흑사병과 온갖 전쟁 그리고 종교개혁 등 당시의 뒤숭숭한 시대 상황이 수도원 담까지 넘어 수행 분위기를 흐린 것. 데레사 성녀는 청빈, 기도 생활, 침묵과 고독, 공동체 정신의 회복을 외치며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열었다. 맨발은 초심 회복의 상징이었다. 1562년 성녀의 나이 40대 후반의 일이다.
이후 성녀는 스페인 전역을 당나귀 타고 다니며 봉쇄수도원을 세웠다. 모두 17곳에 이른다. 그의 삶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집필하고, 수도원을 여는 것이었다. 마지막도 길 위에서였다. 유언도 "주여 나는 성 교회의 딸입니다"였다. 그의 유해가 모셔진 살라망카 외곽 알바 데 토로메스 수도원 성당. 제대 옆 성녀의 상(像)은 보자기가 아닌 박사모(帽)를 쓰고 있다. 1970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교회학자로 선포된 성녀의 영성을 기리고 있는 것.
엔카르나시온 수도원 마당 바닥, 십자가를 중심으로 새겨진 동심원 7개는 신앙의 열정을 보여준다. 넷째 동심원까지는 자발적인 노력으로 다가갈 수 있지만 다섯~일곱째 동심원은 하느님이 이끌어주셔야 닿을 수 있는 경지다. 그가 남긴 '천주 자비의 길'(자서전) '하느님 사랑에 관한 명상' '개혁 가르멜 창립사' '완덕의 길' '영혼의 성' '영적 보고' '하느님께 외침' ‘수도원 시찰방법' 등의 저술은 일곱째 동심원에 다가서기 위한 노력이었다. - 조선닷컴 기사. 2015.6.1
(라) 포루투칼 파티마(Fatima)
포루투칼 파티마(Fatima) 성모 출현 성지
ME식구의 성지 순례 이야기를 듣고 이번 유럽 여행 시 그곳 성지에 가보기로 하였다. 포루투갈의 파티마 성모 출현 성지였다. 성모님께서 파티마에 발현하시기 1년 전부터 미카엘 대천사가 발현목격증인들에게 나타나 발현에 대한 준비를 특이한 일이 있었다. 3번에 걸쳐서 나타났던 천사는 세 번째 방문 때에는 그들에게 성체와 성혈을 주었다.
천사의 방문 후 1년이 지난 1917년 5월 13일 성모님께서는 세 명의 어린이, 루시아, 히야친타 그리고 프란치스코에게 발현하셨다. 1917년 6월 13일에 루시아는 성모님께 자신들을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성모님께서는 뜻밖에도 루시아는 하느님께서 지상에 오래 남겨 두실 것이며 히야친타와 프란치스코는 곧 천국으로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성모님의 말씀대로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는 말씀되로 성모님 품으로 천국으로 갔다. 역시 병에 걸려 1920년 2월 16일 리스본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 성모님 품에
안겨 천국으로 올라갔다. 루시아는 이후 갈멜 수녀회에 입회하여 봉쇄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2005년 2월 13일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베네치아(venezia)
베네치아(venezia)의 대운하
영어로 베니스(venice)인 베네치아는 바다로부터 분리된 석호 내에 흩어져 있는 78개의 섬을 다리로 연결해 진 것이다. 다리 개수만 400어개, 따라서 베네치아 곳곳은 미로와 수로가 거미줄 처럼 뻗어 있는 물의 도시다.
교통수단이라곤 물 위를 다닐 수 있는 곤돌라의 수상택시와 바포레토라고하는 수상버스가 있다. 고대의 배모양을 본떠 만든 곤돌라는 11세기경부터 시내의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였다.
5세기부터 7세기 경까지 아드리아 해 북쪽의 여러 도시 주민들은 빈번한 이민족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접근이 어려운 석호지에 점차 이주하였다. 6세기 후반 인근 동로마제국의 총독부에 소금 공급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이후 9세기~15세기까지 아드리아해의 해상 패권을 장악하여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글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4)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순식간에 사라진 이탈리아 고대 도시 폼페이
용암이 덮친 고대도시, 로마는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세운 도시국가이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로마제국의 상업도시이자 귀족들의 휴양지인 폼페이는 79년 8월 24일에 일어난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엄청난 양의 용암과 화산재로 도시가 그대로 화석이 결과적으로 온전하게 보존이 되었다.
세상에 빛을 본 것은 18세기에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는 약탈과 다를바 없는 발굴을 시작하였다. 이후 1860년대에 민족 통일을 이룬 이탈리아 왕국이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 대장으로 체계적인 발굴을 하게 되었다.
길이 3.2km의 성벽으로 둘레 싸인 도시였다. 신전과 광장, 포장된 도리, 원형 경기장, 호화로운 주택과 소박한 서민의 집, 대저택의 대형 벽화나 모자이크 장식되어 있었다. 시체는 썩어서 공간만 남아 그 공간에 석고를 붓고 흙을 걷어내어 화산 폭발 당시의 공포와 절망 속에 죽어간 주민의 형체를 상상할 수 있었다.
(5) 피렌체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의 조토 종루
피렌체라는 도시는 시저가 퇴역 군인에게 땅을 분할해주고 로마군의 병참 기지 역할을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르노 강에 걸쳐 보이는 베키오 다리와 강 오른편에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의 흔적이 있는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이 있다.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출신으로 14세 이후 피렌체의 지배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베키오 궁전과 우피체 미술관 바로 옆에 시뇨리아 광장에 코시모 메디치의 동상이 있고, 그들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메디치 가문의 본격적인 출발은 조반니 메디치가 피렌체에 메디치 은행을 설립한 14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439년 피렌체 종교회의를 계기로 동방의 비잔틴 사상과 플라톤 사상이 들어오게 된다. 이 종교회의는 메디치 가문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상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르네상스와도 연결이 된다. 조반니 디 비치네 메디치의 두 아들 중 코시모는 가문의 번영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가 후원하였던 대표적인 에술가가 바로 그의 양아들인 미켈란제로이다
“르네상스에는 피렌체가 있고, 피렌체의 심장에는 메디치 가문이 있다”는 말은 메디치 가문이 열정적으로 예술, 과학, 인문학 등을 후원했다는 의미이다. 메디치 가문의 가계는 코시모 3세의 딸 안나 마리아 루이사(1667~1743)가 죽으면서 단절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4명의 교황을 배출하였으며, 유럽의 왕가와 혼인을 맺어 3명의 왕을 배출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로 가는 시점에서 아주 많은 영향을 준 명가였다는 것이다.
(6) 이탈리아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
이탈리아 반도는 발칸 반도 및 이베리아 반도와 함께 남부 유럽의 3대 반도이다. 순수한 유럽형을 이루고 동시에 지중해 지역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 언어는 주민의 거의 전부(97.7%)가 이탈리아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어는 라틴어에서 유래하는 로만어 또는 네오라틴어라고 불리는 언어의 일파이다.
19세기 초에 차례차례로 사르데냐 왕국에 병합되어, 1861년에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1948년 3월4일 사르데냐 왕국의 헌법이 그대로 이탈리아 왕국의 헌법이 되었다.
1454년 이탈리아는 여러 공국이 있었다. 이때가 동로마가 멸망한 시기(1453년)였다. 이탈리아 북부 서쪽에 사보이아 공국, 북부 중앙에 밀라노 공국, 북부 서쪽에 베네치아 공국이 있었다. 그 아래쪽에 제노바 공화국, 루가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시에나 공화국, 교화국가, 그 아래 로마, 반도 남쪽에 나풀리 왕국이 있어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공국에 의하여 군거할거 상태였다.
그중 북부의 사르데냐 왕국(사보이 왕국) 이후 빅토리아 에마누엘 2세 치하의 사르데냐 왕국이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이 되었다.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 카부르는 국내에서 자유주의적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열강의 대립을 교묘히 이용한 외교에 의하여 롬바르디아를 오스트리아에서 해방시키고, 토스카나 왕국, 교황령 등 중부 이탈리아의 병합을 추진해 갔다.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북동부와 교황이 지배하고 있던 로마를 제외하고 이탈리아의 통일이 대체로 달성되어 1861년 빅토리아 에마누엘 2세를 국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수도는 처음에 토리노, 뒤에 피렌체로 옮겨져가 1870년 로마 점령에 이어 1871년 로마를 수도로 정하였다.
(7) 스페인
스페인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그리스도 수난쪽 파스트 주출입구
15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는 서쪽에 포르투갈이 있었고, 지금 스페인 영토에는 중앙에 카스티야가 대부분의 영토를 점하고 있었고 동쪽해안으로 아라곤, 남쪽에 그라나다가 있었다.
1451년 카스티야 왕국의 새왕비가 예쁜 딸을 낳았다. 아이는 어머니 이름을 따 이사벨이라고 했다. 세살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자 오빠인 엔리케 왕자가 등극하여 엔리케 4세가 되었다.
이사벨과 포르투갈 왕 사이에 결혼이야기가 있었다. 15세기의 이베리아 반도는 가톡릭을 믿는 포르투갈, 카스티야, 아라곤 그리고 이슬람을 믿는 그라나다 왕국이 있었다.
이때 프랑스왕은 나약하고, 포르투갈 왕은 나이가 많았다. 아라곤은 멋진 외모와 좋은 성품을 지닌 페르난도 왕자가 있었다. 당시 열여덟 살이던 이사벨은 열일곱 살인 페르난도에게 편지를 써서 먼저 청혼을 하였다.
1469년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결혼하였다. 1474년 엔리카 4세가 죽자, 이사벨은 내란을 이겨내고 이사벨 1세 여왕을 즉위했다. 1479년 남편인 페르난도 1세가 아라곤의 왕에 즉위하자 연합군으로 편성하여, 그라나다를 공격하여 이베리아반도는 로마제국 이후 가톡릭을 믿는 지역으로 되었다.
1492년 1월2일 그라나다 마지막 왕인 보아빌은 스스로 알함브라 궁전 열쇠를 넘겨주며 항복하였다. 무려 800년에 걸친 가톡릭과 이슬람세력의 싸움에서 가톡릭이 승리하였다. 이시기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시기(1492년)였다.
이시기 이후의 중요 유럽사는 1492년 콜롬버스의 신대륙발견, 1498년 바스코다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1500년 포르투갈이 인도 경영 시작,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1519년~1522년 마젤란이 세계일주 항해, 1530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이시기의 우리나라는 1470년에 성종이 즉위하였고, 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난 시기로 우리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나라발전의 모습에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 언덕에서 본 풍경
프랑스 파리 에펠탑 옆 센 강
이탈리아 소렌토 앞바다- '돌아오라 소렌토'
스페인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내- 가우디 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