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내적인 침잠을 통해 영혼의 힘을 집약시킬 수 있고, 그렇게 집약시키는 동안 그 힘(영혼)은 더 강해진다(인간 자아인식으로 가는 하나의 길, 2018, 97)."
사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삶으로부터 오는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어서 더 편안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인데, 하지만 닥쳐오는 어려움을 이긴다고 해도 계속해서 어려움이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어려움을 이겨낼까가 질문이다. 사실 어려움이 오는 이유가 어려움을 통해서 정신을 파악하라는 메세지이다. 따라서 정신을 파악하면 어려움을 이겨낼 수가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고 해도 우리가 어려움을 이겨내기 어려운데, 그 이유가 바로 정신의 속성에 있다. 정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파악할 수가 없는, 여기에 모든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비약하면, 정신의 속성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정신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언제나 '왜 그럴까'란 질문을 했었는데, 그것 역시 정신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정신을 파악하고 알게 되었다. 그 이유가 모든 물질의 이면이 정신이고, 인간 역시 정신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신을 파악할려면 질문을 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신을 조금이나마 파악하게 되었고, 알게 된 사실은 어떤 경우라도 정신을 파악해야 어려움을 이겨낸다는 것이다. 조금 과장하면 이 과정에 거의 평생을 걸렸다고 해도 된다.
필자가 한 '왜'라는 질문에 당시에도 지금도 마찬가지로 누구도 답을 해주지 않았지만, 슈타이너 책에 그 모든 답이 나와 있었다. 처음에는 무척 신기해서, 내가 한 질문에 슈타이너(100년 전 사람)가 '어떻게 답을 해 줄까'란 생각도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정신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모든 존재에게는 정신(본질)이 있고, 또 시간과 공간에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의 성인들 역시 그렇게 인간을 파악했기 떄문에 그들은 종교를 탄생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 정신의 파악이 그들의 주장으로 말하면 '구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정신의 속성은 인간의 발달과정에 그대로 들어있다. 그래서 인간의 발달과정을 충실히 지내야 정신의 발달이 이루어진다. 다음은 그 예이다. 사춘기 아이들 교육에서 한 슈타이너의 주장인데, "이 아이들은 내면에 피지않은 꽃같은 것을 간직하고 싶어합니다(청소년을 위한 교육예술, 2023, 141)." 피지 않은 꽃이란 아주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꽃을 이 시기 아이들이 내면에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을 해 주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최소한 그 꽃을 꺽지 않고 피우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랬겠지만, 필자 역시 내면에 꽃같은 것을 간직하기는 했는것 같은데, 거기에 대한 도움을 받은 기억은 없다. 만약 받았다면 어땠을까. 물론 이렇게 받는 도움은 씨앗으로, 내가 그 씨앗을 꽃피워야 하므로 스스로의 노력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이 시기 아이들은 이런 상황을 희미하게 감지하기 때문에 스스로 하기는 거의 어렵다. 무의식에서 올라오기 때문인데, 문제는 이 시기 아이들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간섭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의 시선이 현실세계에 고정되어서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그 소리에 따라서 나아가 자신의 꿈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현재 청소년들이 의지가 없고 스스로 뭔가 하지 않는 것은 이렇게 정신의 발달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는 '복제인간', '자동인간'이 되는 것이다. 슈타이너의 제안은 이 시기 아이들에게는 '이상'을 간직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은 역사속 인물도 되고, 현실에서의 인물도 가능하다.
두 번째 예이다. "먼저 하나의 전체를 주시한 다음에 그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도록 하면 아이가 살아있는 것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7-14세를 위한 교육예술, 2022, 97)." 인류가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선택하기 전에는 물질을 나눈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질을 분자, 원자로 나누는 것은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선택되고 부터이다. 필자도 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때 선생님이 전체를 보여주지 않고 부분만, 에컨대 그 수업의 차시만 가르쳐주어서 늘 불만이었다. 물론 그 당시는 불만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다만 공부가 재미가 없고 뭔가 충족되지 않는 불만이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구체적으로 그 이유가 분자, 원자로 나누는 것이 인간 정신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은 먼저 전체를 보고 부분으로 다가가야 한다. 전체를 보지않고 부분을 보면 아이들의 정신은 뭐가 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러면 점점 인간 정신은 반응을 하지 않게 된다. 인간 정신은 인간 몸과 하나가 되어있기 때문에 그 속성에 맞으면, 맞아야 온 몸이 반응한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놀랄 때 몸 전체가 깜짝놀라는 것은 이와 같이 인간 정신이 몸 전체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아이들이 전체를 본다면, 이와같이 몸 전체가 반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동도 짐작할 수가 있을 듯하다. 이렇게 한번이라도 반응한다면, 아이들은 어쩌면 평생 그 길을 갈 수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의 머리만 움직이므로 아이들의 정신은 재미가 없고 지루하다.
이 시기에 아이들에게 머리만 움직이는 교육을 하면, 육체가 경화되어서 50세 정도가 되면 경화증에 걸린다는 것이 슈타이너의 주장이다. "현시대에 병적으로 존재한 많은 것은 이갈이와 사춘기 사이에 있는 아이가 물질주의 사조에 따라 지성적인 것을 많이 배운다는 데에 기인합니다 (7-14세를 위한 교육예술, 2022, 209)." 이렇게 이갈이와 사춘기 사이의 교육이 중요한 것은 그 시기에 정신발달의 중요한 변곡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중요성 첫 번째, 에테르체가 탄생해서 자유롭게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에테르체의 속성에 맞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두 번째 아스트랄체가 탄생할려고 하므로 이 시기 교육에 그 준비를 해줘야 한다. 아스트랄체의 탄생은 사춘기무렵이다. 세 번째, 아이들의 자아가 탄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무엇을 할 수가 없다. 아이들이 권위를 따르는 존재가 아이들의 자아를 대신한다. 이 존재를 슈타이너는 교사로 말했지만, 지금은 교사의 권위가 존중되지 않으므로 아이들의 자아는 갈팡질팡할 것이다란 생각도 든다. 결론은 인간 정신이 발달해야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인간 정신이 올바르게 성장- 발달하지 않으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가기 어렵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필자 포함 이렇게 질문을 하고 그 이유를 찾았던 것은 인간 정신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 과정에서 영혼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한 행동이 내적인 침잠이었던 것이다. 만약 현실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면 가만히 내적으로 침잠해보기를 권유한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혼의 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나아가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영혼의 힘이 지금 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나는 힘들어', '어려워'하는 것은 영혼이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도 영혼의 힘을 키워야 한다. 이것은 인간 존재가 지속되는 한 영원한 진리일 것이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 조금 더 발달하고, 조금 덜 발달한 정도, 그 차이가 있을뿐이다. 힘이 들때는 가만히 자신의 내부로 침잠해서 영혼의 힘을 키우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