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교실 - (336) 인사이더, 나도 그들이 되고 싶다 - ⑤ 자신의 거짓을 사랑하는 법/ 시인, 한양대 교수 정재찬
인사이더, 나도 그들이 되고 싶다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youknow0203/ 나를 사랑하는법 격려의 말
⑤ 자신의 거짓을 사랑하는 법
예술 같은 모든 창조적 허구의 국면에는 거기에 어울리는 페르소나가 필요합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에서 작품 속의 화자인 ‘나’와 작품 밖의 ‘나’인 시인은 다른 존재입니다.
이 둘이 가까우면 담백하고 진실된 목소리를 듣게 되지만
너무 가까워지게 되면 시의 긴장이 느슨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때로 시인은 마치 연극배우가 극중 인물에 어울리는 분장을 하고 무대에 서는 것처럼
시에 어울리는 화자를 등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남성 어른인 시인이 소녀 화자를 내세워 앳된 목소리를 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가면 속의 자아는 쉬지 않고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고. 너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느냐고.
이 질문을 거듭하며 예술가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통합한 인격체로서 성숙해가는 것이죠.
즉 시인의 개성은 타고난 자연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내고 초월해내는
과정에서 획득하게 되는 선물인 겁니다.
그러므로 방탄소년단 노래 〈페르소나〉의 화자는 앞으로도 평생토록 나는 누구인가 질문할 것 같습니다.
살면서 수많은 페르소나 가운데 어느 것은 버려질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아예 평생 쓰고 살고픈 그런 페르소나를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자기 반성과 변혁과 초월의 과정이 그의 생과 그의 음악을 완성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다만 그게 그저 될 리가 만무합니다. 시간이 간다고, 저절로 시인이 되고, 스타가 되고,
하늘의 별이 될 수야 있겠습니까.
그대는 별인가 –시인을 위하여
정현종
하늘의 별처럼 많은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모래
반짝이는 건 반짝이는 거고
고독한 건 고독한 거지만
그대 별의 반짝이는 살 속으로 걸어들어가
“나는 반짝인다”고 노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대의 육체가 사막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밤이 되고 모래가 되고
모래의 살에 부는 바람이 될 때까지
자기의 거짓을 사랑하는 법을 연습해야지
자기의 거짓이 안 보일 때까지
―《고통의 축제》(민음사, 1974)
별은 저 하늘에 쌔고 쌥니다. 바닷가 모래는 차고도 넘칩니다.
하지만 반짝인다고 다 황금이 아니듯, 정말 내 스스로 떳떳이 “나는 반짝인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려면,
죽음 같은 고독 속에서 오래도록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내가 밤이 되고 모래가 되고 바람이 될 때까지 자기의 거짓을 사랑하는 법을 연습해야 합니다.
지나친 정직은 성장에 방해가 됩니다.
지금 현재의 ‘흠’과 ‘서두름’에만 정직하게 절망한다면, 나는 모래가 될 수 없고 별이 될 수 없습니다.
진짜 정직한 것은 현재의 내가 꿈꾸는 미래의 나까지,
나의 수많은 분신, 나의 수많은 페르소나까지 나 자신이라고 믿으며 사랑하는 겁니다.
왜 이 시의 부제가 ‘시인을 위해서’일까요.
아마도 겸손한 것이 정직이라 지나칠 정도로 믿는 시인들에게 들려주기 위함이 아닐까요.
우리가 바라는 이상이란 것도 어쩌면 자기의 거짓일 겁니다.
그런 거짓을 사랑하는 법을 오랫동안 고독하게 연습하게 되면,
그리하여 종국에 자기의 거짓이 거짓으로 아니 보이게 되면, 그
것은 곧 이상이 현실이 된 터인즉, 그게 바로 자기완성의 경지,
곧 궁극의 시인의 자리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요.
이는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빌려 자기 발전을 꿈꾸는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내 영혼의 지도 방향의 척도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 사는 만큼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나쁜 건 아닙니다.
인간은 본래 남을 모방하며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좋게 말해 롤모델이라고 부르죠.
그래서 우리는 현실세계의 네트워크는 물론, 소셜네트워크에서 그런 인사이더를 찾아 그를 모방하고,
그로부터, 대중으로부터 자신도 인싸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겠죠.
소셜 미디어에는 정말이지 ‘하늘의 별처럼 많은 별’이 있습니다.
도처에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 투성이지요.
하지만 반짝이는 것은 별이 아니라 모래일 수도 있습니다.
모래가 별이 되려면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별이라 믿으며 견뎌야 하는데,
그러다간 자칫 리플리가 되기 일쑤라는 데 함정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짓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리플리’와 ‘방탄소년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전자는 타인이 기준이 되는 것,
후자는 자신이 기준이 된다는 데 차이가 있습니다.
타인을 모방하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오히려 자유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는 것, 그것이 진짜 ‘인싸’의 삶 아닐까요.
내가 만난 시인들은 하나같이 다른 시인을 의식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그려나가고 있는 좌표에 충실할 뿐 다른 이들의 동선을 염탐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당연히 누구와 비교되는 것도 마뜩찮아 했다.
그것은 부단히 자기 부정과 자기 갱신을 감행해본 자들이 가닿은 자유로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김도언, 《세속 도시의 시인들》(위즈덤하우스, 2016) 중에서
이 늙은 교수도 스무 살 먹은 제자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될 때가 있습니다.
젊을 땐 질투와 부러움이 넘친 나머지,
정작 저야말로 그들의 젊음을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서 말이죠.
그럴 땐 부러 이렇게 너스레를 떨어보곤 합니다.
“나를 질투하는 건 마땅하다. 하지만 질투하되 나를 닮지는 마라.”
누군가를 모델로 삼는다는 것과 그 사람을 닮는다는 건 다른 말입니다.
그 사람을 모델로 자기 자신을 조각해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의 인사이더들을 닮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똑같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거면 내가 왜 존재해야 합니까?
그럴 양이면 신께서 그 수많은 아름다움을 다 만드시진 않았겠지요.
삶의 기준은 나 자신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고독하게 자신을 사랑하며 가꾸어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그 기준이야말로 얼마나 혹독한지를 말입니다.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정재찬, 인플루엔셜, 2020)’에서 옮겨 적음. (2022. 7. 5. 화룡이) >
[출처] 시창작교실 - (336) 인사이더, 나도 그들이 되고 싶다 - ⑤ 자신의 거짓을 사랑하는 법/ 시인, 한양대 교수 정재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