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37) 행과 연을 매우 특별하게 모셔라 - ①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 시인, 우석대 문창과 교수 안도현
행과 연을 매우 특별하게 모셔라
Daum카페 http://cafe.daum.net/insungheon/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 15. 행과 연을 매우 특별하게 모셔라
①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김소월, 「가는 길」 부분
이렇듯 절묘하게 우리의 전통적 율격인 3음보를 활용하던 시절은 차라리 행복했다.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 「윤사월(閏四月)」 전문
간략한 7·5조에 기대어 봄날의 애틋한 정취를 짧게 노래하던 시절도 먼 옛날이 되었다.
시를 쓰게 되면 누구나 행과 연을 구분하게 되고, 그에 따른 리듬의 변화에 민감해진다.
문학수업시간에 귀가 닳도록 듣게 되는 그놈의 내재율이 항상 문제인 것이다.
내재율은 정형시의 율격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시의 내부에 숨어 있는 리듬을 말한다.
이 보이지 않는 리듬은 시와 시 아닌 것을 구별하는 중요한 형식적 잣대가 되기도 한다. 독
자의 입장에서는 다만 모든 자유시가 내재율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창작자의 입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김우창은 어느 시대에서나 진정 잘된 시에서 적절한 음악의 형식은 발견되어야 한다고 했고
(「시의 리듬에 대하여」, 『세계의 문학』, 1999년 봄호.),
이형기는 일상에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소리를 예술적으로 조직한 구조물이 시라면서
시의 음악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의미(내용)와 소리(형식)의 유기적 결합이 운율의 핵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두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근대 이후 대부분의 창작자는 음악성보다는 회화성을 확보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그래서 주제나 소재와 같은 내용의 형상화를 고심하는 동안 리듬에 대한 배려는 뒤로 밀쳐두는 일이 빈번해진다. 시인들은 형식을 낯설게 변화시키는 일을 내심 두려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설혹 과감하게 기존의 형식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한다 하더라도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한다.
그렇게 현재의 형식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과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 낀 존재,
그가 시인이다.
시의 리듬이 발생하는 지점은 행갈이, 연의 나눔, 음절과 음운의 반복·고저·장단·강약, 문장 부호의 배치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서 시의 행과 연은 외형적으로 시와 산문을 가장 잘 구별해주는 요소이다.
행과 연을 활용해 무엇을 쓴다는 것은 시인의 특권이자 시인에게 내린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시에서 이처럼 중요한 행과 연을 매우 특별하게 모시지 않으면 시인으로서 낙제다.
당신이 시를 쓸 때 아무 의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행과 연을 바꾸었다면 지금부터 자중하라.
관습적인 행갈이는 당신이 쓰는 시의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관습화한다.
시의 호흡에 따라 적당히 행을 바꾸면 된다고,
행갈이에 특별히 규정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빨리 그 나쁜 생각을 버려라.
행갈이에 ‘적당히’란 없다.
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은 한 채의 집을 짓는 일과 같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즉흥적으로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계도면이 있어야 하고, 그 일을 수행할 인부와 집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확보해야 하고,
충분한 공사기간이 있어야 한다.
시가 하나의 유기체적 구조물임을 염두에 둔다면 행을 바꾸거나 연을 나눌 때에도
시인의 의도가 충분히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계획과 의도 없이 절대로 행을 당신 마음대로 바꾸지 마라.
시의 리듬을 고려해 행을 바꾸었다고 구차하게 변명 좀 하지 마라.
예컨대 최근에 당신이 10편의 시를 썼다고 치자.
그 시행의 길이가 다 고만고만하고, 각각의 시의 길이가 모두 비슷비슷하다면
당신의 시작 행위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라.
그때 당신의 리듬은 기계적인 리듬이어서 아무도 당신의 리듬에 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리듬뿐만 아니라 시의 내용도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은 백번 옳다.
<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2. 7.12.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37) 행과 연을 매우 특별하게 모셔라 - ①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 시인, 우석대 문창과 교수 안도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