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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답게 빛답게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장)
산 위에 있는 동네(14절) : 교회
산상수훈이라고 알려진 마태복음 5-7장은, 예수께서 “산”에서 하신 말씀입니다(5:1). 말씀하시는 예수뿐만 아니라 듣는 제자들도 그 산에 함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장소인 동시에 제자들이 말씀을 듣는 장소로서의 “산”은 마태복음에서 각별한 상징입니다. “잃은 양 비유”에서, 목자는 길 잃지 않은 양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8:12). 부활 이후,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뵙고 경배하는 장소가 “산”이라고 적시됩니다(28:16).
이 정도라면, 산은 우연한 장소가 아니라,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하고, 말씀이 선포되고, 예배(경배)하는 자리,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예수께서는 산 위에서 말씀을 듣는 청중을 가리켜 “너희”라고 부릅니다. “너희”는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에 모인 이들이며, ‘구별된 모임’이라는 뜻을 지닌 교회(에클레시아)의 정체성에도 부합합니다. 그렇다면 14절에 나오는 “산 위의 동네”는 마태복음이 그리는 교회에 가장 어울리는 명칭입니다.
산상수훈의 서두를 구성하는 여덟 개의 복은 “그들의 복”으로 선언되었습니다. 이어 11-12절은 “너희의 복”을 선언함으로써, 예수의 말씀은 “너희”에게로 전환됩니다. 여기에서 교회를 가리키는 “너희”는 ‘예수 때문에 박해를 겪고 거짓 모함을 당하고 미움을 당하는 이들’(11절)입니다. 그런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너희는 소금이다 … 너희는 빛이다”는 선언을 이어가십니다(13-16절).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소나 돼지에게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곰이 동굴 속에서 백일 동안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신화일 뿐이지, 실제로는 어떠한 각고와 인내로도 짐승이 사람이 될 길은 없습니다. “사람이 되라”는 말은 사람을 향해서만 발설되는 언명으로서, “너는 사람이다”는 말과 같으며, 더 나아가 “당신은 사람이니, 사람답게 살라”는 권고를 담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되라”는 말은 곧 “너는 사람이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되라”는 말이 “너는 사람이다”는 언명이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말 역시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는 선언입니다. 마치, 사람이 된 것이 어떤 노력이나 능력에 의해 취득한 결과가 아닌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 됨’도 그러합니다. 자녀라는 신분이 어떠한 조건과 자격을 불문하고 주어진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됨도 특정 수준의 거룩함이나 의로움이나 헌신 등의 기준과 무관합니다. 16절에서, 하늘 아버지(16절)의 자녀로 일컬어지는 “너희”는 착한 행실의 결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착한 행실을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산다는 취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는 예수의 말씀을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읽더라도, 빛이 되고자 힘쓰고 소금이 되고자 애쓰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빛이니 빛다울 것이며, 소금이니 소금다우라는 뜻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말씀이 아니라, 빛과 소금인 이들(너희)에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너희”(13, 14, 16절)는 산 위에 있는 동네, 즉 교회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요(13절), 세상의 빛이다(14절)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는 말은, 빛과 소금이 세상으로부터 말미암았다거나 세상에 속하였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세상을 위한 소금이고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빛이라는 말입니다. 그 세상은 ‘너희’를 박해하고 모욕하며 고통을 주는 원수로서의 세상입니다. 바로 그 세상 가운데에서 세상을 위하여 소금과 빛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5:45-47)는 말씀과 연관됩니다. 즉, 형제(교회)들에게만 소금과 빛의 혜택을 나누고, 원수(세상)에게는 냉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너희(교회)’를 싫어하고 박대하더라도, 소금과 빛으로서의 소명은 세상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소금이니, 짠맛을 잃지 말라(13절)
“세상의 소금”인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은 ‘짠맛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짠맛은 소금의 본질이요 정체성입니다. 세상이 단맛을 요구한다고 해서 소금이 짠맛을 버리고 단맛을 내려한다면, 이는 본질의 상실입니다. 소금은 짠맛으로서만 세상에 봉사합니다. 단맛, 신맛, 매운맛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면 그것은 감미료이지 소금이 아닙니다. 설탕을 섭취하지 못한다고 해서 생명이 죽는 법은 없지만, 소금을 먹지 않는 생명은 살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맛을 다 갖추고도 짠맛이 없다면 맛이 될 수 없지만, 다른 조미료가 없어도 소금 한 가지로만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소금은 생명의 물질이요, 모든 맛의 원천입니다.
복잡해진 세상에서 교회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맛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교회는 짠맛 한 가지로만 존재해야 합니다. 그 짠맛이란 없어서는 안 되는 맛 곧 사랑입니다. 세상이 생명력을 잃은 것은 온갖 풍요와 발전을 이루고도 사랑을 상실한 까닭이요, 교회가 버려짐을 당하는 것은 팔색조의 맛을 갖추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 하나의 맛을 잃어버린 까닭이 아닐까요? 다채로운 맛을 갖는 순간 소금은 소금이 아니듯, 매력적인 여러 풍미를 갖춘 교회와 그리스도인 역시도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
소금은 맛을 내는 이외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변질을 막는 것입니다. 냉장 시설이 없던 고대에, 양식의 부패 방지는 매우 긴요한 과제였습니다. 양식 없이 생명이 유지될 수 없기에, 양식의 부패를 막는 소금의 역할은 곧 생명 보전과 직결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는 언약의 제물에 소금을 넣어야 한다는 율법의 규례(레2:13)는, 변질을 막는 소금의 특성과 관련됩니다. 이 외에도, 더러움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만드는 방편으로 소금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출30:35; 겔16:4). 맛을 내고 부패를 막고 깨끗하게 하는 기능들은 각각 다르지만, 이 모든 역할은 “짠맛”이라는 한 가지 소금의 본성에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짠맛 하나를 잃지 않으면 됩니다.
마치 금이나 석유처럼, 인간은 오랫동안 소금을 귀중한 재산으로 여겨왔습니다. 소금을 모은 자가 부자가 되고, 소금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값을 소금으로 지불하기도(Salary) 했습니다. 예수 시대의 로마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도 소금 무역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고에 쌓아놓은 소금은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습니다. 재화로서 존재하는 소금은 소금이되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부뚜막 위의 소금도 넣어져야 짠맛을 냅니다. 소금이 녹는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맛이라는 새로운 존재와 역할로의 변화입니다. 소금은 녹아듦으로써만 썩음이라는 죽음으로부터 양식을 보존해내고 정결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금이 짠맛을 잃지 않는 길은 하나, 녹는 것입니다.
빛이니, 빛을 감추지 말라 (14-15절)
요한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빛이라고 했거니와(요8:12), 오늘의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빛이다”고 말씀하십니다. 햇빛을 받는 달이 빛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빛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너희(제자들)”는 빛입니다. 어쩌면 세상은 빛인 존재와 빛이 아닌 존재로 구분되지 않고, 자기가 빛임을 아는 존재와 내가 빛인 것을 모르는 존재로 구분됩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그분의 생기가 자신의 몸속에 있음을 아는 이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자체로 빛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빛인 “너희”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명령은 모든 사람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더 밝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감추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빛을 감추지 않음이 빛답게 존재하는 길입니다. 세상이 악하여 빛을 싫어하더라도, 자신의 빛을 됫박 아래나 이불 속에 감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빛의 소명은 더 밝아져야 함에 있지 않고, 자신을 숨기지 않음에 있습니다.
“너희는 빛이다”는 말씀이 선포되고 듣는 이 공동체(교회)는 그 자체로 빛인 동네입니다. 그리고 그 동네는 지금 산 위에 자리한 까닭에, 그 동네의 빛은 감춰지지 않습니다. 동네(교회)의 빛이 눈부시게 강렬하여 모두에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산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해안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등대처럼, 산 위 동네의 불빛은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등경 위에 올려둔 불처럼(15절), 감추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빛다움의 본질입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비추어라 (16절)
도적이나 강도처럼, 요한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고 말합니다(요3:19). 모든 죄는 어둠 속에서 자행됩니다. 그렇기에 악한 이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빛이신 예수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세상이 싫어하고 욕하고 핍박하고 모함하는(5:11) 이유는, 세상이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빛을 숨기도록 강요당하는 상황을 교회는 무수히 겪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께서는 죽임을 당하셨고, 제자들도 박해와 순교를 당했습니다. 빛을 숨기지 않으면 미움을 받는 경험은 이 시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빛인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단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감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정황이 있습니다. 보통,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합니다. 친구에게는 빛을 드러내고 이방인에게는 빛을 감춥니다. 의인에게는 자비로운 빛의 얼굴을 보이고, 악인에게는 그늘진 표정을 짓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는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빛을 비추시는 분입니다(6:45). 빛의 관계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과 어둠 속에 방치하고 싶은 사람들이 병존하는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주님은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6:48). 언제나 누구에게나 변함없이 빛을 비추는 것이 빛이신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 된 이들의 온전함 역시 누구에게나 빛을 감추지 않음입니다. 우리와 너희, 내 편과 상대편, 사랑하는 이들과 원수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착한 행실로 대할 때,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16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배타와 차별을 정당화하곤 하는 “너희(교회)”를 향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https://www.youtube.com/live/L82RQ6xIbH0?feature=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