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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은 초막에 머물지 않고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마태복음 17장)
엿새(1절) 전에 있었던 일 (16:13-28)
변모 사건이 있기 엿새(1절) 전,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6:16)라는, 저 유명한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 사건입니다. 이는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적확한 대답이 드디어 제자의 입에서 발설된 기념비적 순간으로서, 예수께서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16:17)고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고백한 베드로(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질 것이라 선언하심으로써(17:18), 교회의 신앙이 베드로의 고백에 뿌리를 두었음을 천명하십니다.
이어,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장차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수난과 죽음을 당하게 되리라고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16:21). 이 수난 예고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승리를 기대하던 제자들의 염원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됩니다. 반발하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는 예수와 격하게 맞서 항변하고(16:22), 이에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사탄’으로 부르시면서 “네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꾸짖으시는 소동으로 번집니다(16:23).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 모두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만(16:24), 이 말씀이 제자들의 귀에 들릴 리가 만무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변모하시다 (1-6절) : 하나님 아들의 영광
수난 예고로 인해 분란이 촉발된 상황 말미에, 예수께서는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16:28)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엿새’가 지나, 베드로는 다른 두 동료(야고보, 요한)와 함께 예수께 이끌려 높은 산에 올랐다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황홀한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예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이 희게 변모된 가운데, 엘리야와 모세가 난데없이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지요. 그야말로 왕권을 지니신 예수의 모습입니다.
눈부신 빛(2절)은 하나님이 현현하시는 모든 순간에 수반됩니다(계3:4; 골1:12; 히1:3). 여기에 언급되는 엿새 후(1절, 출24:16), 빛나는 얼굴(2절, 출34:29-35), 구름이 덮음(5절, 출40:35) 등은 구약성서에서 신현현을 묘사하는 표현들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한 장소가 시내산(호렙산)이었듯이(출3장, 왕상19장), 여기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발현되는 곳 역시 높은 산입니다(1절).
이 광경을 보고 소리를 들은 제자들이 “엎드려 심히 두려워했다”(6절)는 반응을 보이는 대목은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사6장)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영광을 본 이사야가 ‘나는 부정한 사람인데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으니 죽게 되었다’(사6:7)고 두려워하던 장면과 겹칩니다. 변모하신 예수로부터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3절) : 그리스도의 영광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있다는 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증언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죽음 없이 하나님이 데려간 인물이면서, 주의 날 혹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보내어질 예언자로 알려져 있습니다(말4:4-6). 이런 전설적 인물들을 거느리신 예수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서의 율법인 오경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친 선지자들을 대표합니다. 성경이 확정되지 않았던 예수 시대에, “모세와 선지자의 글”(눅24:27)은 성경(구약)을 부르는 명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구약)의 모든 약속은 메시아(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수렴되고 성취된다고 알려졌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한다는 것은, 성서의 모든 약속이 예수를 가리키고 있으며, 예수를 통해 완성됨을 증언하는 장면입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으니 초막 셋을 짓겠나이다 (4절)
이 광경은 제자들 모두가 보기 원했던 영광이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가 궁극적으로 꿈꾸던 이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반사적으로,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4절)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순간을 영구히 지속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초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합니다. “초막(skene)”은 ‘임시 거처(shelter)’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의 경험 속에서는 이동 신전인 “성막(tabernacle)”을 일컫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거처를 짓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의 첫 번째 의무이자 비길 데 없는 축복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유대인의 삼대 명절 중 하나가 초막절입니다. 모든 추수가 끝난 후, 일곱째 달 보름이 되는 날부터 칠일 동안 지키는 절기입니다(레23:39-43). 이 절기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을 치고 초막에 거주합니다. 먼 옛날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사십 년간 광야를 지나며 초막에 거주했던 것을 회상하기 위함입니다. 광야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비상한 방식으로 영광을 드러내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거하실 초막도 지어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말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의 영광이 실제가 되는 순간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 영광을 영원히 보존하고 기리고 싶다는 간절함이 초막을 짓겠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는 주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칭송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요, 주님을 섬기는 이들의 책무이자 열망이며 기쁨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허락만 된다면, 온 마음과 힘과 소유와 목숨을 다해 초막을 지음이 베드로의 소원이었겠지요.
하늘이 베드로의 말을 가로막다 (5절)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도중에(5절)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이 는 베드로의 제안을 하늘이 반박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온 힘과 뜻을 다하여 초막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충정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반대하고 나서던 베드로의 충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대신에 초막의 영광을 누리시길 원하는 베드로의 간곡함이 거절당한 셈입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난 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적이 있었지요(마태 4). 그 세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예수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세상의 모든 영광을 보여주면서, 그 영광을 차지하라고 예수께 권유합니다(4:8-9). 이번에는, 영광을 가지라는 시험이 있었던 장소였던 산꼭대기에서 베드로는 영광을 세세토록 보존하고 기념할 초막을 짓겠다고 말합니다. 영광을 취하시라는, 충직한 제자의 지당한 헌사로 들리는 이 초막 발언은 사실상 시험입니다. 이는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시겠다는 예수를 만류하던 엿새 전 베드로와 이어집니다. 예수께서는 그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꾸짖으셨지요(16:23). 사람의 도리는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도리(뜻)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기뻐한다” (5절)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는 말은 엿새 전에 베드로가 했던 고백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늘이 직접 그것을 선언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셨을 때도, 하늘이 열리고 같은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습니다(3:13-17). “내가 그를 기뻐한다”는 말도 세례 때와 똑같이 여기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일개 예언자인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견해를 뒤집고,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자”(3:14)고 세례를 받으신 예수의 결정을 하나님이 기뻐하셨지요. 여기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고난이나 죽음은 합당치 않다는 제자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예수의 결정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절)
하늘의 소리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명령으로 귀결됩니다. “들어라, 이스라엘!”(신6:4) 율법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모든 계명은 “들어라”는 한 명령으로 수렴합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언명합니다(롬10:17). 예언자들은 그 어떤 제사나 향기로운 제물보다 “말씀을 청종함”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신앙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고 고백하며 예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가는 이들이며,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초막을 지어드린다고 주님의 영광이 오래오래 빛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의 영광은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고난과 죽음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예수께서 받아들였을 때, 하늘은 그가 하나님의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합니다. 아버지인 하나님을 향한 복종, 그것이 예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제자들에게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입니다. 빛나는 순간을 보존함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광입니다. 주님의 영광은 우리 손으로 지은 집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뒤를 따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는 길에서 나타납니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7절)
보고 들은 것들로 인해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6절). 공포에 빠져 엎드린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오십니다(7절). 대개 병든 자들이나 무리나 제자들이 예수께 온 경우는 많지만,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신 일은 드뭅니다. 두려워해서 도망하거나 숨은 제자들에게 오시는 예수의 모습은 부활 이야기들에서 집중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을 대십니다. 손을 대심은 예수께서 죽은 이를 살리고(막9:25) 병든 자를 고칠 때(마8:3, 5)의 행동입니다.
“일어나라(egeiro)”는 말은 죽은 사람을 살릴 때 하신 말씀인데(막5:41), “살아남”을 의미하는 동사로 사용됩니다(10:8; 11:5; 14:2; 20:19; 26:32; 27:52, 63, 64, 28:6, 7).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전에”(9절)라는 구절에서의 ‘살아나다’는 동사 역시 이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아담과 하와의 상태가 죽음이었듯이, 두려움으로 죽은 것과 같은 제자들을 예수께서 만지시고 살리십니다. 결국 변모산 사건은 예수의 변화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변화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죽음에서 살아남으로, 두려움에서 평안으로 변화합니다.
제자들을 고치시고 살리시는 예수는, 모세와 엘리야를 거느린 영광스러운 예수가 아니라, 모든 영광이 사라진 후의 예수이십니다. 그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 십자가 좌우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아니라, 강도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강도들에 둘러싸인 예수, 그리하여 아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지 않는 예수께서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변모산에서 예수의 영광을 보았던 세 제자는 십자가의 현장에는 없을 것입니다. 대신에 세 여인(막달라 마리아, 마리아, 살로메)이 거기에 있겠지요(27:56; 막15:40). 천상의 영광을 봄이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보증이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 십자가 길을 가는 사순절이 이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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