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주체로서 인간은 외적인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의식상태나 의식의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12감각, 2016, 343)."
모든 것은 자신의 자아에 달려있다. 이렇게 말하면 약간 반감이 들 수 있겠지만 사실이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이 자아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가만히 자신에게 발생한 문제를 생각해 보면 안다. 그 문제가 나로 인해서 생기며, 그리고 나의 자아의 상태, 의식상태에 따라서 발생되는 문제라는 사실이다. 결과 역시 이런 상황에 연결되어 있다. 이런 상황을 대부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잠에서 깨는 순간 자아가 상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 부터 선지식들이 하신 말씀, 모든 문제는 '인연 과보'이지만 그 인연 과보를 만드는 것은 나인 것이다. 즉 나의 자아의 의식상태이다. 그리하여 문제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 번째, 자아가 깨어있는 의식 상태에서는 상속에 들어가므로 깨어서 생각하는 자아는 나의 본래의 자아가 아니다. 그래서 이 자아를 어떻게 내가 만들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상속에 들어간 자아는 평소 내가 생각해서 만든 자아이기 때문이다. 약간 비약하면 이 의식수준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필자 동창이 있는데 다재다능해서 초등교사로서는 굉장히 유능하다. 그래서 자신이 굉장히 머리가 좋고 똑똑하다고 자부를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요컨대 자신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해되는데, 자신의 그 생각에 다른 사람을 간섭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타인에 대한 간섭에는 사랑이 내재된 조언이 있고,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하기 위한 간섭이 있다. 조언이 어렵기 때문에 사실 간섭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문제는 이 친구가 스스로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간섭이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자아가 이런 수준의 의식상태에 머물기 떄문에 자신에게 오는 어려움을 감지하거나 해결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어려움이 오는 것은 정신이 발달하기 위함도 있지만, 더 큰 어려움에 빠지는 것을 경고하기 위함도 있다. 즉 더 큰 어려움에 빠지지 말라고 오는데, 이것을 감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타인을 간섭하면 자신 또는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과 자신이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어려움이 자신의 의식상태로 인함이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형적 삶을 끊임 없이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자아의 의식 상태이고, 또한 이렇게 자신이 만든다.
두 번째,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자아를 파악해야 한다. 즉 상속에 들어간 자아에 대한 이해이다. 첫째, 인간의 자아가 깨어 있는 의식 상태에서는 언제나 상속에 들어있으므로 이 자아를 바깥의 '내'가 이끌어야 한다. 그 방법이 영혼이 활동할 때 내가 원하는 활동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영혼활동은 사고하고 느끼고, 행동하기이다. 예컨대 내가 어떤 사고를 한다면, 그 사고가 진리에 근거하고 있는지, 감정,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과거 이런 사실을 몰랐을 때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는 가만히 자신의 느낌,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느낌에 집중했다. 그러면 무의식에서 어떤 느낌, 그렇게 하면은 결코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어서 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둘째, 이런 영혼활동을 파악했다면, 나의 이상에 맞게 영혼활동을 이끌어야 한다. 통상 상속에 내재한 자아로 부터 답을 듣기 어려우므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서 거기에 맞도록 영혼활동을 이끄는 것이다. 그러면 타인에 대해서 간섭할 여지가 생기기 어렵다.
셋째, 만약 어떤 답을 듣고자 한다면, 즉 본래 자아로부터 답을 들을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오직 이 일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 자신의 모든 것을 한 문제에 집중할 때 자아로 부터 대답을 들을 수가 있다. 그 이유를 말하면 먼저 인간의 본성에 따른 이유이다. 처음 인간이 물질 육체를 입을 때 에테르체가 신경기관을 만들고 만들어진 신경기관이 본래자아를 거울과 같이 비추게 된다. 즉 생명활동이 시작됨과 동시에 자아가 상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활동이 멈추어야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테르체의 이런 활동을 멈추게 하는 방법은 죽음뿐이다. 하지만 죽을 수는 없기 때문에 그 방법이 죽음과 버금가는 목숨을 거는 행위인 것이다. 자신의 전 존재를 걸어야 하는 이유 두 번째는 정신이 온 몸에 분포가 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정신을 깨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걸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그나마 자신의 정신을 파악해서 자신의 정신을 자신을 위해서 활동하게 할 수가 있다.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들, 특히 음악가들은 자신의 이런 정신을 활용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요컨대 자신의 정신을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방법은 스스로가 위와 같은 방법으로 찾아야 한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자신의 의식수준에 따라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가 있다.
결론은 인간의 자아는 외적인 공간에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특정한 의식상태나 의식의 공간에 존재해서 인간의 삶을 이끈다. 그러므로 내가 -바깥에서- 나의 자아가 존재하는 특정 의식상태를 파악해서 -바깥에서- 내가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슈타이너의 주장에 따르면, 영혼, 오성혼은 진리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고 했다. 즉 오성혼은 오류를 범하는 존재이다.역시 바깥에서 내가 나의 의식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말과 부합한다.
문제는 이런 사실보다는 자신의 자아가 상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만약 자신의 자아가 상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어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자아가 상속에 있다는 사실을 감지해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특정 자세나 특정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내부,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모두 명상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에 집중, 전 존재를 다해서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간섭하는 상황이 최악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습관이 되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상황이 되어서 자신의 정신의 발달이 점점 어려워진다. 여기에서 첨가한다면 정신의 속성에 맞게 겸손하고, 사랑하고, 침착하게 인내심을 갖는 것이다.
이런 명상을 하면 먼저 자신의 영혼과 맞닥뜨리게 된다. 구체적으로 영혼은 내가 생각하는대로 반응한다. 예컨대 내가 슬퍼하면 영혼도 슬퍼하는 것이다. 문제는 영혼은 슬퍼하는 그 자체이기 때문에 내가 감지하기가 어렵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감정, 사고, 행동에 매몰된 영혼을 내가 컨트롤해야 한다. 이것이 출발이다. 영혼이 슬퍼하면 슬퍼하는 감정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힘이 들면 힘이 드는 자신을 내려놓는 연습이다. 그러면 차츰 영혼을 내가 컨트롤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 나아갈려면 정신세계는 물질세계의 감정을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자신을 마치 타인을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냉혈인간이 되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감정에 놀아나지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에 놀아나지않는 단계가 되면 감정을 감지할 수가 있다. 이 감정이 아스트랄체이다.
아스트랄체는 감정체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인다.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이 아스트랄체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필자도 아스트랄체가 어떻게 전달이 되는지 의문을 가졌는데 이에 대한 슈타이너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현들이 울리는 가운데 인간이 무언가를 느낄 때 그것은 인간의 신경가닥과 혈류의 구조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천체의 신비, 인간의 신비, 2021, 47)." 거기, 인간의 신경가닥과 혈류에 아스트랄체가 연결되어 감정이 전달된다.
만약 음악을 연주하는데 감정 표현이 미흡하다면, 아스트랄체의 발달이 부족하거나 정체되었다는 의미이다. 아스트랄체는 촉수를 가지고 대상에 부딪히지 않을 때까지 뻗어나간다고 한다. 영혼을 컨트롤 할 수있으면 영혼의 바탕체가 아스트랄체이므로 아스트랄체를 감지할 수가 있다. 아스트랄체의 발달 역시 결국은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죽으면 '무엇이 남는가'에 대한 슈타이너의 주장이다. 인간이 죽으면 영혼에 남은 사랑. 또는 자아에 남은 사랑만을 가지고 다시 정신세계로 간다고 한다. 이 사랑은 물질세계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정신세계의 사랑으로 대상을 나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사랑이다. 하지만 물질세계의 사랑이 이런 사랑을 일으키는 존재, 도움을 주므로 여전히 사랑은 중요하다.
결론은 나의 의식 상태에 나의 자아가 존재하고 이런 자아에 의해서 나의 삶이 이끌린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자아를 파악해서 나의 이상을 향해서 나아가거나, 최소한 나의 정신을 해치지는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