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42) 아웃사이더, 바깥에 길이 있다 - ② 청산에서 잠 못 드는 밤/ 시인, 한양대 교수 정재찬
아웃사이더, 바깥에 길이 있다
Daum카페 http://cafe.daum.net/mukhae/ 청산별곡
② 청산에서 잠 못 드는 밤
인생의 굽이에서 마주치고 발견하게 되는 자연인의 삶, 그에 관한 역사는 자못 긴 편입니다.
고려시대의 ‘나는 자연인이다’를 들어보실래요? 오랜만에,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청산별곡〉의 주인공을 소개합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靑山)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靑山)에 살어리랏다
살겠노라 살겠노라 청산에 살겠노라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겠노라
이분이 왜 청산에 들어갔는지 자세히 알 길은 없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유랑민, 몽고 침략 등으로 인해 산과 섬으로 들어간 이주민,
무신의 난으로 밀려나 은둔의 삶을 찾는 지식인,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 등등 다양하게 추측해봅니다만,
그 어느 쪽이든 기꺼이 청산을 찾아 들어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청산은 절대적인 이상향이라기보다는 지금 당장의 현실세계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을 거라는 기대감에 찾아간 곳입니다.
관건은 어떤 점에서 청산이 속세보다 나아 보였을까 하는 겁니다.
속세에서는 굶어죽을 판이라 머루 다래 같은 먹거리가 풍성한 청산에서 살겠노라고 노래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머루 다래 따위를 먹으면서라도 청산에서 살아가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투박하게 말해, 물질이냐 정신이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죠.
청산에 잔뜩 기대를 안고 들어왔건만, 사정이 별로 나아 보이질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우울해 보이거든요.
우러라 우러러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리노라
울어라 울어라 새여 자고 일어나 울어라 새여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 우노라
이 대목은 대부분 이렇게 배웠을 거예요.
“울어라 새야, 종일토록 울어라 새야,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하루 종일 운다.”
그러니 새는 나의 감정이입의 대상, 화자의 분신이라고. 그럴 듯한데 제 해석은 다릅니다.
만일 “울어라 하루 종일 울어라 새야.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하루 종일 운다”라고 해석한다면
굉장히 이상하고 어색한 문장이 되고 맙니다.
“외제차 사라. 너보다 돈 많은 나도 산다”라든가,
“서울대 지원해라. 너보다 공부 잘하는 나도 지원한다.”라고 말하면 되게 기분 나쁘지 않으세요?
이런 오류는 ‘자고 니러’를 ‘자나 깨나’, 즉 ‘늘’처럼 해석한 데 기인합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나서’로 봐야 합니다. 그럼 이렇게 되겠죠.
“울어라 새야, 자고 일어나서 울어라.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서 운단다.”
말을 바꾸면 “울지 마라 새야, 자고 일어나서 울고 지금 이 밤엔 울지 마라 새야.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이 밤엔 울지 않고 자고 일어나서 운단다.”
아마도 주인공은 물질의 풍요를 찾아 청산에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아왔겠지요. 그런데 청산에서 맞이한 밤, 산새가 하염없이 울어댑니다.
산새가 슬퍼서 우는지 짝을 찾아 노래하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내가 슬프니 우는 소리로 들리는 거겠죠. 그런 점에서는 감정 이입이 맞습니다.
다만 주인공은 저 산새 때문에 잠이 들 수 없고 수심(愁心)이 더 깊어만 갑니다.
그 때문에 속새를 벗어나 청산에 들어온 건데 더 심각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새에게 호소하는 겁니다.
너보다 더 시름 많은 나도 이 밤에는 울음을 참고 잠들려는데 네가 계속 울어야 하겠느냐고 말이죠.
이조년(李兆年)의 시조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고 말이죠. 맞습니다. 다정도 병입니다.
‘센티멘탈(Sentimental)’이란 말이 본래 감정의 과잉을 뜻하듯이,
감정도 지나치면 우울증 같은 병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슬퍼도 사람이 잠은 자야지요.
그렇게 호소했는데 웬걸, 아침에 일어나보니 산새는 훌쩍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허탈감과 배신감을 주인공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아래 가든 새 본다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아래 가든 새 본다
가던 새 가던 새 보았느냐 물 아래 가던 새 보았느냐
이끼 묻은 쟁기 가지고 물 아래 가던 새 보았느냐
나보다 시름이 많지도 않던 녀석이 밤새 그리도 섧게 우는 바람에 제대로 잠도 못 잤건만,
정작 아침이 되자 녀석은 훌훌 내가 떠나온 곳, 나는 쉽게 돌아갈 수 없는 곳,
바로 물 아래 속세로 날아가 버린 겁니다.
예전 가수 중에 김태곤이란 사람이 있었어요.
삿갓을 쓰고 나와 국악 풍의 대중가요를 부르곤 했던 싱어송라이터로,
히트곡은 〈송학사〉와 〈망부석〉 두 곡이었죠. 그도 청산에 들어갑니다.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무얼 그리 갈래갈래 깊은 산속 해매나/ 풀벌레의 울음 계속 별빛 곱게 내려앉나니 그리운 맘 임에게로 어서 달려가보세.” 하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간밤에 울던 제비 날이 밝아 찾아보니 처마 끝엔 빈 둥지만이/ 구구만리 머나먼 길 다시 오마 찾아가나 저 하늘에 가물거리네.” 그런 겁니다.
속세가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문제였던 것.
속세에 마음이 묶여 있으니 청산에서도 평안을 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링공 뎌링공 하야 나즈란 디내와손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또 엇디 호리라
이럭저럭 하여 낮은 지내왔건만
올 이도 갈 이도 없는 밤은 또 어찌할꼬
그래도, 어떻게 찾아들어온 청산인데 꿋꿋이 살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럭저럭 낮은 버틴 모양입니다.
자연인도 지금 보니까 도인인 듯하고 생활력도 강해 보이지만 처음에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 빈둥빈둥 좌불안석하며 지냈을 겁니다.
‘이링공 뎌링공’은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청산의 하루는 왜 이리 짧은 겐지요. 금세 밤이 찾아듭니다.
깊은 산 한밤중에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습니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밤은 또 어찌하겠습니까. 이때 ‘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반복의 부사입니다.
또 저 새가 다시 돌아와 밤새 또 울어댈 테고 그러면 나는 또 설움에 잠겨 또 잠들지 못할 겁니다.
불면의 밤도 하루 이틀이지, 이러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 노래의 주인공은 청산을 떠납니다. 산문(山門)을 나서 바다로 향합니다.
허나 청산에서 평안을 구하지 못한 이가 바다로 간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막상 바다로 가면, 이번에는 또 갈매기가 운다는 둥, 정 핑계 댈 게 없으면
소라, 고동, 심지어 멍게 울음소리에 잠 못 든다 할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이상향이 아닌 이상, 해결은 공간과 처소에 달려 있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산에서 바다로 가는 도중에 거쳐야 했던 된 속세에서
해금 소리 들으며 술 마시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어디 간들 설움이 사라지랴.
번민과 고뇌는 술에 취해 잊으면 그뿐.
정신의 자유를 찾아 청산에 들어가도 바다까지 헤매던 그가 선택한 것은 허무와 퇴폐였습니다.
하지만 속세에 밀려나고 청산에도 밀려난 그를 현실의 루저, 실패한 자연인이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으니까요. 속세에서도, 청산에서도, 그는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아닌 걸 아니라 할 수밖에 없지만 아닌 걸 바로잡을 수는 없었던 유약한,
혹은 진짜 강골일지 모를 아웃사이더였던 것 같습니다.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정재찬, 인플루엔셜, 2020)’에서 옮겨 적음. (2022. 7.28.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42) 아웃사이더, 바깥에 길이 있다 - ② 청산에서 잠 못 드는 밤/ 시인, 한양대 교수 정재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