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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시험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그때에 …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다(1절)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려고 성령이 예수를 이끌어 광야로 데려갔다(1절)는 말씀은, 하나님과 사탄이 함께 공모하여 의인인 욥을 시험했던 이야기(욥기 1-2장)를 생각나게 합니다. 욥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마귀(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그 시험을 용인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시험을 계획하는 존재는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받으시는 시험은 ‘마귀의 시험’이면서 동시에 ‘성령(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시험하는 존재는 마귀만이 아닙니다. 성서는 시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여러 실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진심을 알아보기 위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시험하신 적이 있고, 만나를 내려 광야의 이스라엘을 시험하셨으며, 시험을 통해 이스라엘을 단련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시험과 하나님의 시험이 따로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시험 안에 하나님과 사탄의 의도와 작용이 함께 공존합니다.
예수께서 시험받으시던 “그때”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때(3:13-17)를 가리킵니다. 세례를 받으시던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 위에 임하였고”(3:16), 예수를 지목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늘의 선포가 있었습니다(3:17).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가장 충만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늘 스스로의 선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절정의 때였던 “그때”,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광야, 사십일, 금식, 시험 (1, 2절)
시험을 받기 위해 예수께서 가신 곳이 광야요, 사십일을 광야에서 계셨으며, 금식을 하셨습니다. 광야는 모세의 피난과 엘리야의 도피, 이스라엘 백성의 방랑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들은 각각 사십 년 혹은 사십 일 동안 광야에 있었고, 그 시간 동안 고난과 굶주림과 시험을 겪었습니다. 이는 기독교 사순절기의 배경을 이룹니다. 교회가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사순절을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광야로 이끌려 들어가 어려움과 시험을 겪었을 뿐 아니라, 또한 비상하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진입한 사순절은 바로 그 시기입니다.
“시험하다(peira,zw)”는 말에 부정적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험으로 인해 죄를 짓거나 무너지기도 하지만, 시험을 통해 굳건해지고 순전해지는 유익도 있습니다. 뜨거운 풀무 속에서의 담금질을 거치면서 불순물과 껍데기는 태워지고 소멸하는 반면, 참된 부분들은 온전해집니다. 시험을 겪으면서, 비로소 그 사람의 진정과 중심이 드러납니다. 이와 같은 시험의 뜻이 신명기에 표명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2)
시험하는 자(3절)
예수께서는 요단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이어 광야에서 사십일 간 금식하셨습니다. 어쩌면 영적으로 가장 에너지가 충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때, 시험하는 자가 예수를 찾아옵니다. 시험하는 자, 즉 사탄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시험하는 자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3, 5절)이라는 말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두 번에 걸쳐 확인합니다. 그는 “마귀(dia,boloj,1절)”라고도 칭하고, “사탄(Satana/j, 10절)”으로도 불리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정하지도 않고 예수를 대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시험하는 자는, 예수의 길을 훼방하기는커녕, 둘도 없는 길벗이 되어주려는 듯 보입니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상이 인정하도록 만들 최상의 방법들을 제안합니다. 그의 세 가지 제안은 예수의 성공을 위한 놀라운 묘안들입니다. 그가 제시한 방안 중 어떤 것도 죄짓는 행동이 아니며, 도리어 의로운 일로 칭송과 환호를 받을 만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행할 만한 충분한 이유와 가치를 지닌 표적들입니다. 이런 묘수를 제공하는 이라면 옆에 두고 신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 고백하면서 예수를 위한 충성심을 보이던 베드로가 연상됩니다(16:13-22). 또한 그는 높은 산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를 위해 초막을 짓겠다는 열정을 보였지요(17:4). 스승을 진정으로 걱정하면서 예수를 위해 위험이라도 무릅쓰겠다고 말하는 베드로를 가리켜 예수께서는 “사탄”이라 하셨지요(16:23). 그러고 보면, 가장 친밀하고 충직한 존재가 진정한 사탄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돌들로 빵이 되게 하라(3-4절)
돌들로 빵을 만들어선 안 될 이유가 있을까요? 금식으로 주리신 예수께도 빵이 필요하고, 식민지 백성으로 사는 가난한 유대 민중들에게도 빵은 절실합니다. 모세는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였습니다. 엘리야도 신비한 일용할 양식을 가난한 과부 가족과 함께 먹었습니다. 양식을 제공함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일이요, 배고픈 이들을 먹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행하실 시급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광야의 많은 돌을 빵으로 만듦으로써 굶주린 이들을 먹인다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세상이 인정하리라는 말에는 어떤 거짓이나 오류가 없습니다. 그 일 자체로 절대적으로 옳고 선하고 마땅하며 절묘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제안을 물리치십니다. 오래전 40년간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먹이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에게 빵을 먹이는 것은 자비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관심사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예수께서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급식 이적을 행하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비와 긍휼의 동기에서 비롯된 결과이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거나 군중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의도와는 무관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빵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거래이지 생명의 일이 아닙니다. 살게 됨, 즉 생명은 떡의 풍성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왔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신8:3)는 성서의 말씀으로 마귀의 제안을 물리치십니다. 이후에 두 차례 더 이어지는 시험들에 대해서도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대하십니다.
거룩한 성전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5-7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예수의 대답이 나오자, 시험하는 자는 말씀을 성취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91:11-12)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담대하게 뛰어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다운 행동입니다. 이런 믿음과 능력을 보여주기에는 성전 꼭대기가 안성맞춤입니다. 매일 기도를 바치며 메시아(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의인들이 늘 성전에 모여 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천사들의 손에 받들려 성전 꼭대기로부터 내려온다면, 거룩한 이들은 만장일치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를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동’(7절)으로 보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함이지 시험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이나 말씀을 동원하는 작태(作態)입니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그분을 시험함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함과도 같습니다. 사사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한 적이 있었습니다만(삿6:36-40), 이는 그가 믿음이 없었던 탓이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린다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겠다는 요구가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할 따름이지, 아버지의 능력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신6:16).
내게 절을 하면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겠다 (8-10절)
시험하는 자는 예수를 높은 산으로 데려가 세상의 모든 영광을 보여주면서 그 영광을 다 차지하라고 권합니다. 후에 이와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영광으로 가득 찬 높은 산에서, 베드로는 ‘초막을 지어 이 영광을 영원히 기리기며 바치겠다’고 말을 합니다(17:1-7). ‘나(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면’이라는 조건이 걸리긴 하지만,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다 주겠다는 약속은 그 모든 석연찮음을 덮고도 남습니다. 천하만국을 얻는다는 것은, 세상을 구속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예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사탄의 손아귀로부터 되찾아 하나님께 바치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위해 예수께서 오셨고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는데, 단 한 번 절하는 짧은 순간의 굴종을 마다할 것까지 있을까요?
그러나 이 역시도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신6:13)는 말씀으로 거절하십니다. 예수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구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다 보니 그분의 뜻을 따라 구원 사역에 매진하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제아무리 가치 있는 목적이라고 해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 섬김은 하나님 섬김이 아닙니다. 빛나는 영광이든, 거룩한 뜻이든, 고귀한 사랑이든, 숭고한 구원이든, 그것을 얻기 위해 엎드려 절하는 것은 ‘우상’을 섬김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른 것도 추앙함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이들의 신앙행태가 우상숭배가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탄으로부터 세상 모든 것을 넘겨받아 일거에 구원 역사를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예수께서는 단칼에 거절하십니다. 어떤 고귀한 명분에 헌신하는 것이 예수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섬기는 것이 예수께는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떠나다 (11절)
마귀는 아무것도 강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자극하고 현혹하고 떠볼 뿐이지, 사람의 의지와 결정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선악과를 먹어보라고 권유하는 정도가 사탄의 한계이며, 선악과를 딸 것인지는 인간의 선택입니다. 광야에 시험에서 마귀가 실패하고 떠난 것은 상대가 예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기까지가 마귀가 할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정당하며 절묘한 방안들을 예수에게 제시했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대했습니다. 시험하는 자의 논리는 옳고 틀림이 없었지만, 그의 말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 혹은 어떤 탁월한 가르침으로 시험에 맞서지 않고, 세 차례 모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통해 올무에서 벗어납니다. 사탄의 시험을 이기려는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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