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테르체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기류이며 아스트랄체의 다른 부분을 통해 에테르체 안에서 앞을 향해 흐르는 것을 비출때 자아심상이 생겨납니다(인간, 혼 ,영에 관한 지혜, 2023, 198)."
인간은 태어나서 똑같이 삶을 사는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을 개척해서 살고, 어떤 사람은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살아간다. 왜 그럴까? 여기에서 문제는 어떤 삶이라도 자신이 선택, 개척해서 살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생기는 걸까? 나아가 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걸까? 그렇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등등. 이런 질문은 필자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늘 가슴에 품고 있었던 질문이다.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아이들이 그렇게 살았으면 해서 나름 노력을 한듯도 하다.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가 질문이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강남 근처 역에서 중학교 3학년 아니면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여러 명 들어왔다. 아이들은 뭔가에 몰두한 듯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이런 얼굴은 공부를 하면서 '왜 그럴까', 또는 '참 신기하다'고 할 때의 얼굴이다. 그렇기에 몸 전체에서 뿜어나오는 에너지는 활기찼고 의욕도 넘쳤다. 우리도 살면서 정신이 충족되었을 때의 기쁨, 또는 정신이 뭔가에 자극받았을 때의 기분을 기억할 것이다. 짐작하기에 이 아이들은 자신의 정신이 자극받았고, 그래서 그 정신에 집중, 몰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 정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아이들은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약간 비약하면 이것이 '저절로'라는 의미이다.
반면 얼마 전에 필자가 사는 동네 버스 승강장에서 예전에 가르치던 아이들, 아마 중학교 3학년이거나 고등학교 1학년쯤 되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서 훌쩍 컸지만, 예전 모습은 남아 있어서 알아볼수가 있었다, 또 아이들도 필자를 알아는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 얼굴에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유심히 살펴보고 또 살펴봤지만 역시 그렇다. '이상하다. 왜 그럴까' 예전에 본 강남역 근처 아이들과 비교해서도 살펴 보았다. 그리고 필자는 아이들의 정신이 잠을 자기 떄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들의 정신이 이렇게 잠을 자는 것은 아이들의 정신에 그동안 어떤 자극도 없었기 떄문이다. 정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알기 어렵고, 또 누가 말을 해준다 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아이들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좋은 학군을 따라서 이사를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학군이 중요하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그 이유이다. 정신이 보이지는 않지만, 정신은 움직이기 떄문에 아이들의 정신은 서로 서로 통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해 봐도 술집과 도서관의 분위기가 다른 것처럼. 이렇게 정신이 움직이기 때문에 학교 전체의 분위기에 따라서 아이들은 거기에 끌려가게 된다. 좋은 학군이란 이렇게 정신이 깨어서 학습에 정신이 몰입되어 있는 곳이다. 되풀이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정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또 정신은 육체를, 물질을 안내하고 이끈다. 정신이 깨면 이런 정신의 속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므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이는 모든 것, 공부에도 해당이 된다. 그러므로 정신을 깨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왜 정신을 깨우지 못할까? 먼저 말하면 정신을 깨우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정신이 보이지 않기 떄문에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해도 안된다. 그 방법이 있다면 다만 '사랑'이다. 즉 정신은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만 전달된다. 이것도 무의식에서의 사랑, 아기를 기르는 엄마와 같은 그런 사랑이다. 또 아이 역시 자아가 형성되기 전, 온전하게 모방하는 그런 시기에 이런 사랑을 받아야만, 정신이 전달된다. 그 시기가 태어나서 3 세까지이다. 그리고 3세 이후부터는 정신이 발달하는 과정에 맞아야 올바르게 발달한다. 그래서 정신이 발달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더불어 정신은 경험해야 비로소 이해하므로 자신의 정신이 발달하는 과정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학군이 좋은 곳으로 아이를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담으로 정신이 경험해야 비로소 이해하는 그 속성에서 비롯된 성인의 말씀이 '인연과보'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가 어떤 과보를 지은 것이므로, 내가 받아들여서 참회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은 정신이 깬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한 마디로 하면 '위 제목'이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정신과학적 요소는 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자아이다. 육체는 보이는 부분이고, 다른 세 가지는 보이지 않는다. 일단 먼저 말하면 자아가 심상을 만들어야 한다. 자아가 심상을 만들어야 그 심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론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아가 심상을 만들지 않으면, 그 문제에 대해서 나는 사고, 판단, 결론의 일을 하지 않는다. 즉 나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앞에서 예로 든 아이들처럼,
다음은 자아가 심상을 만드는 방법이다. 인간의 에테르체가 신경체계, 생명체계를 만들면, 그러면 에테르체가 거울과 같이 비추고 자아가 그 속에 들어간다. 즉 인간이 잠에서 깨면 자아는 에테르체 속에 들어간다. 이는 에테르체는 시간 속에 끊임없이 흐르고, 그 흐름에 자아가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가지 영혼의 활동이 있다. 에컨대 호불호, 심상 등등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오면 호불호가 생기고 또 여러가지 심상도 만들어진다. 심상은 에테르체에서 생긴다. 이때 아스트랄체에서 어떤 감정이 생기고, 자아는 아스트랄체의 감정에서 생긴 그 문제를 붙든다. 즉 아스트랄체가 궁금해하고 호기심이 생기면, 자아가 그 문제를 붙들고 그러면 에테르체에서 자아 심상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영혼이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영혼의 바탕은 아스트랄체로, 아스트랄체는 감정체이다. 아스트랄체의 감정, 내가 궁금해하거나, 호기심, 열정, 등등과 같은 감정이 아스트랄체에 생기면, 자아가 그 감정을 붙들고, 이때 에테르체에 자아심상이 생기는 것이다. 즉 심상은 에테르체가 만들지만, 자아 심상은 자아가 이렇게 어떤 문제를 붙들 때만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자아가 상속에 있어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가 흐릿하게 감지되는 상태에서 자아가 심상을 만들게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에테르체 역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에테르체가 만든 심상도 우리는 알기 어렵다. 정신은 한번이라도 경험해야 그 경험을 한다. 그래서 앞에 든 아이들처럼 정신이 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가 심상을 일으키는 방법이 있을까? 아이들의 정신이 올바르게 성장, 발달하는 것이 가장 먼저이다. 다음이 아이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켜 호기심이 생기게 하는 일이다. '왜 그럴까'하고 궁금증이 생기면, 아스트랄체가 '의지'를 낸다. 뭔가 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음악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면 음악에 대해서 의지가 생기는 것과 같다. 감동이 곧 사랑이고 흥미이기 떄문이다. 나아가 아스트랄체에 의지가 생기면 자아가 드디어 등장한다. 왜냐하면 의지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인데, 그 행동은 반드시 자아가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물을 먹을려고 한다면, 내 손과 발이 움직여야 한다. 이때 손과 발이 움직이는 것은 자아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아스트랄체에 의지가 생기게 하는 일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의지를 내서 그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요컨대 내가 의지를 내서 어떤 일을 열심히 하면, 그 일을 할 때면 언제나 자아가 함께 한다. 문제는 성인은 스스로 자신을 다스려서 열심히 할 수가 있는데,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정신이 어떤지도 알지 못하므로, 누군가 아이들의 정신을 깨워줘야 하는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요즘같이 교사의 권위가 무너진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예전(1960년대)에는 이렇게 하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를 한 것은 사회적으로 교사의 권위가 인정되었고, 부모님들도 자식들에게 무의식에서의 사랑을 주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런 사랑이 그 당시에는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역시 중요한 것은 정신을 깨닫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성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