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 강지희
즐거운 장례식 / 강지희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壽衣 위에
한 겹 더 나무그늘 옷을 걸치고
그 위에 햇살이불 끌어당겨 눕는 당신
이제 막 새 세상의 유쾌한 명찰을 달고
癌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린다
향 같은 생전이 다시 주검을 덮을 때
조카들의 두런대는 추억 사이로
국화꽃 향기 환하게 건너온다
[당선소감] 당선!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막막하다
기찻길 옆 우리 집은 탱자나무가 담장이었다.
손에 상처가 생기는 줄도 모르고 울타리가 낳은 노란 전구알 같은 탱자에
경부선 기차 소리를 받아 적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자주 내가 쓰는 언어로 세계의 결을 환하게 열고 싶었지만
제 몸을 가시로 감싼 탱자나무처럼 가시 속에 숨은 시의 언어들은 좀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잡았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빠져 달아나는 언어의 꼬리, 그 미끄러짐들.
그때마다 나는 네모난 종이로 학을 접었다.
일곱 번 몸을 접고 마지막 날개를 펴주어도 날아가지 못하는 새,
내 언어를 들고 푸른 신호등을 따라 삼각지 로터리를 도는데 어떤 목소리가 내 옷깃을 파고 들었다.
갑자기 마른 몸을 털며 종이학이 날아오르고,
갖가지 색깔로 접었던 물고기들이 별로 살아나 파닥이기 시작했다.
당선!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두렵고 막막했지만 가시가 심장을 찔러대도
모든 아픈 몸들을 보듬으며 나아갈 것이다.
칠년 만에 보내준 화해의 품 안엔 가시가 있을 테지만 사랑하는 이들을 믿듯 나의 시를 믿기로 한다.
부족한 제 시에 손을 들어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언어를 빛나게 갈고닦아 시에 부려 놓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이기철 교수님,
시어가 대상과 나를 만나 어떻게 새로운 몸과 현실을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신
손진은 교수님 두 분께 두고두고 감사의 마음을 전해도 모자라는 느낌이다.
늘 바쁘게 쫓기는 시간들을 불평 없이 뒷바라지해준 남편,
수능으로 고생하는 딸 지수가 고맙고 당선 소식에 가장 기뻐해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함께 보듬고 격려해준 영남대와 경주대 사회교육원 문창반 문우들이 떠오른다.
지면을 빌려 따뜻했던 마음들에 손을 내민다.
저를 알고 있는 모든 분들과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다.
[심사평] 죽음에 대한 생각 뒤집는 역설의 묘미 탁월
최종심까지 올라온 8명의 작품 중에서 마지막 남은 작품은
이강해씨의 ‘집들이’,
강지희씨의 ‘즐거운 장례식’ 2편이었다.
‘집들이’는 탄탄한 내적 구조를 지니고 있으나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점이 먼저 단점으로 지적됐다.
‘사랑은 시작하기도 전에 슬프고/ 살아보기 전에 무덤이다’ 등의 표현
또한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멋에 머물러 있다고 여겨져 자연히 ‘즐거운 장례식’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됐다.
‘즐거운 장례식’ 또한 단순한 면이 없지 않다는 점이 지적됐으나
그러한 단점보다는 죽음을 보는 눈이 새롭다는 장점을 더 높이 샀다.
누구의 죽음이든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럽다는 기존의 생각을 즐겁게 뒤집는
역설적 묘미가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나름대로 높은 시적 성취도를 이루고 있다.
‘관을 들어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작은아버지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긍정성과 순응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자 기쁨의 축제다.
작은아버지는 ‘암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릴’ 정도로
오히려 남은 가족들을 위로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위로하는 이 반어적 발상을 통한 시적 구현은
이 시인의 앞날에 대한 신뢰의 깊이를 더해준다.
앞으로 한국시단을 빛내는 시인으로 대성하길 바란다.
-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