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부를 때 전개되는 본질적인 것은 에테르체의 활동입니다(청소년을 위한 교육예술, 2023, 75)."
클래식 성악이나 가요 등등의 노래를 들으면 '잘 부른다' 등 어떤 느낌이 있다. 그런데 내가 부르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왜 그럴까'라는 궁금증이 늘 있었다. 당연히 몸이 악기가 되지 않았기 떄문에 그렇다고 생각은 한다. 그렇다면 몸이 악기가 된 사람들은 다 잘 불러야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노력과는 다른 뭔가가 있는 듯하다. 그것이 뭘까가 질문이다.
어느 날 유튜브를 보다가 유채훈 테너의 팬텀싱어를 보게 되었다. 김문정 선생님이 심사평에서 고음에서 키를 두번이나 바꾸어서 노래를 불렀다고 굉장한 실력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필자는 소리에서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 궁금함이 필자의 자아에 전달이 된 듯하다. 그러면 에테르체가 가지고 있는 우주 정보, 직관을 자아가 얻을 수가 있다.
그 방법이 지나가다 라디로오 방송에서 듣기도 하고, 또 책을 보다가 얻기도 해서 마치 우연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의식 속의 '나'가 또는 슈타이너가 주장하는 천사가 정보 가까이로 이끌어준다. 이를 통상 우리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 준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우연이 아니고, 자아가 받아들여서 이끌어 준다. 문제는 자아가 받아들여야 하므로, 현실의 삶에서 상속의 자아가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필자가 얻은 직관의 방법은 슈타이너의 책이었다. 위 문장, '노래를 부를 때 전개되는 본질적인 것은 에테르체의 활동'이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유채훈 테너의 노래를 들으면서 가졌던 궁금증이 순식간에 풀렸다. 사실 그 전에 위 문장을 읽으면서 궁금해 하기는 했었다. 즉 노래부르는데 에테르체가 '어떻게 활동할까'란 궁금증이 먼저 있었다.
다음은 필자가 얻은 직관이다. 유채훈 테너는 에테르체에서 노래(소리)가 나왔다. 에테르체는 인간의 생명을 움직이는 힘, 에너지이다. 에너지는 어떤 리듬, 파동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서로 당기기도 하고 서로 밀어내기도 한다. 그 힘이 삼라만상에 작용, 삼라만상은 그 힘에 의해서 생명을 영위한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나의 생명도 이 힘에 의해서 생명이 유지되지만, 무의식에서 이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다만 알지 못할 뿐이다.
구체적으로 음악에는 리듬(박자, 강 약 등등)이 있다. 인간의 생명체계인 심장, 혈액, 맥박 등등에도 리듬이 있고, 이 리듬은 에테르체로 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이 리듬을 따라가면 에테르체를 만날 수가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음악에도 리듬이 있다. 만약 자신의 에테르체에서 나오는 리듬에 음악을 나오게 한다면 어떨까? 내가 부르는 노래의 리듬이 삼라만상이 자라는 리듬과 같다면, 삼라만상을 움직이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유채훈 테너의 소리에 힘, (이 힘이 에테르체에서 비롯되었다)이 있다는 것과 노래의 정서가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드러났다는 정도를 느꼈다. 그래서 다른 유명 가수들의 노래도 들어보았다. 자신의 에테르체에 연결된 만큼 노래에 힘이 있었고, 아스트랄체에도 일정 부분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연결된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이어서 유명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도 들어보았는데, 역시 자신의 에테르체, 아스트랄체에 연결된 만큼 세계적인 음악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여기에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면, 자신의 에테르체나 아스트랄체에 연결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요컨대 모든 예술은 인간의 정신기관이 발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선 필자에게 적용해 보았다. 에테르체의 리듬에 음악의 리듬을 연결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과 아스트랄체에 음악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기 전에도 노래를 부를 때 가사에 노래의 정서가 표현된다는 사실을 느끼기는 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스트랄체라는 것은 알겠는데 분명하지는 않았다. 즉 뭔가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스트랄체가 정서를 표현하지만, 그 정서는 에테르체에 상이 생겨야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즉 아스트랄체에 감정이 생기면, 에테르체가 그 감정에 대한 상을 비추어야 아스트랄체가 분명하게 표현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 등장한다. 이렇게 에테르체의 리듬을 타고, 아스트랄체의 정서를 표현한다면, 누가 그렇게 하느냐이다. 그 존재가 바로 나의 자아이다. 나의 자아는 현실의 삶속에서 상속에 있다. 그러므로 상은 본래 존재이지만, 본래 존재는 아니다. 다만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지를 그대로 비추고 있다. 그러므로 그 상속의 존재가 에테르체에 연결되고 아스트랄체에 연결되어있지는 않다. 요컨대 그러므로 먼저 본래 자아를 만나야 한다. 본래자아를 만나면 당연히 에테르체에 아스트랄체에 연결되어있을 것이기 때문에 만나면 되는 것이다. 결론은 상속의 자아가 본래자아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무엇을 하든 본래자아를 만나는 그 과정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현실의 삶을 살면서 정신을 탐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본래자아를 만나지 못한다. 대부분 물질에 촉수를 드리워서 자신의 삶을 끝없이 반복하고 만다. 정식의 속성에 의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나아가 동굴 속에서 동굴 바깥의 태양을 경험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탄압하는 것도 통상이다. 그러므로 나는 물질에 드리운 촉수를 거두어서 정신을 찾아야 한다.
여담으로 필자는 궁금한 것이 있었다. 도저히 풀지못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답이 떠올랐다. 근래의 일로 이 또한 직관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법륜스님에 따르면 고구려, 발해시대는 괜찮았는데 밑으로 내려오면서 부터 약소국가로서의 어려움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외침이 있었고, 근래에는 일본의 식민지, 6, 25사변도 겪었다. 이를 살펴보면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상황이 지금도 그대로 한치도 틀리지 않고 반복된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뉴스를 보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 모두가 말하기를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행동은 그대로 한다. 왜 그럴까? 우리 민족이 못나고 어리석어서 그런가. 한번 겪었으면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등등. 만약 우리나라가 못났다면, 현재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한류는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나라는 역사를 지금도 반복하는지, 도저히 그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프랑스가 나치에 협력한 사람들을 어떻게 처단했는지를 보면 알수가 있다. 당시 프랑스(드골 대통령)가 말하기를, 프랑스가 다시 외적의 침입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 외적에게 협력하는 사람은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떠 오른 직관은 우리나라는 정신이 우수한 민족으로 정신은 어려움 속에서만 성장하고 발달하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을 이어받아서 드러내는 활동을 계속해야 그나마 정신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즉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정신이 어려움 속에서만 꽃피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어려움을 외면하지 말고 극복해서 정신의 꽃을 피워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정신의 숙명이다. 의문이 풀리니 다소나마 어려움을 극복할려는 의지도 생긴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현실의 삶을 관심있게 살펴보기는 할 듯 하다.
역시 언제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그럴려면 당연히 물질의 이면을 살펴야 한다. 그래야 본질을 알수가 있고 본질을 알아야 반복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