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 해설 / 해석 / 분석
'강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부드러워야 한다',
'불의를 보면 참지 말고 정의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라는 말이 맞는 말인 것은 알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그런 처지에 왔을 때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의 억압은 너무나 두려운 점이 많고 나이가 들어갈 수록 자신이 쌓아온 것이 아까워서
그것을 잃는 것이 무서워서 부다한 일을 마주쳐도 피하며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손해보지 않은 일들에만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이번에 다룰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은 이러한 당연한 상황에서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인은 독재정권의 부정이나 사회적 부조리에는 맞서 싸우지 못하면서 사소한 일에 대해서만 분개하는 자신의 소시민적 삶을 치열하게 반성하고 있는 것이죠.(소시민은 평범한 보통의 시민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왜 조그만 일에 분개하는가.
왕궁의 음탕이란 큰 일은 무시하고 갈빗집의 여주인에게 욕을 해대는가.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지 못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면서도
정정당당하게 이를 외치다 잡혀선 소설가를 위해 소리도 못치면서 왜 야경군들만 증오하는가.
하긴, 나의 이런 모습은 과거로부터 그랬다.
포로수용소에서 조롱을 들을 때도 나는 나서지 못하고 한편으로 피해있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이와 다르지 않다 중요한 일에는 결국 나서지 못하고 작은 일에 힘들어하며
사소한 일에 분개한다. 그래서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하며 힘없는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나는 정말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나는 왜 이리 작은 존재인가....
스스로에 대한 이런 반성적 인식을 통해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읽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거 있잖아요.
너무 잘난 사람들의 행동은 대단하다 역시 달라. 난 저렇게 못해.
이렇게 생각되서 공감력이 떨어지지만 비슷한 사람의 생각에는 좀 더 공감이 가고 이해가 가는 것.
시인은 이런 효과를 노렸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더 잘나타내기 위해서 시인은
1. '사회적으로 중요한일+권력자'와 '사소한일+힘없는 자'의 대비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반대되는 두 의미를 지닌 시어들을 대비시킴으로써 시인의 의도를 더 잘 전달하고 있는 것이지요.
2. 의도적으로 문장을 끊어 행을 구분함으로써 시인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문해석의 표시된 부분을 참고하길 바랍니다.)
그럼 전문을 읽고 해석을 통해 시 학습을 마무리해보도록 합시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 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 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 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 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시와 소설 수능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