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멀고 귀먹어야 보이는 게 있다
서슬 퍼런 세상에 덤비는 것도 한때
올 때는 울었지만 가는 길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난, 봄날이면 좋겠다
제 20회 <한국디카시 경시> 최우수 작품
_윤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일에는 좋은 날도 있지만, 고통이라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야 할 때도 있다. 그 고통은 때로는 “눈멀고 귀먹어야 보이는 게 있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고통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감각이 마비된 사람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 견뎌내야 하는 일들의 연속이기도 하다. 똑같은 사안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느끼는 아픔의 강도는 다르다. 그러나 그 아픔을 잘 견딘 사람은 반드시 좋은 날이 오고야 만다.
세상에서 돈과 함께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바로 금이다. 처음의 그것은 금광석이라는 하나의 돌덩이에 불과하므로 그것만으로는 가치를 발휘하기 힘들다. 그러나 불에 넣고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금이 되어 간다. 그 순도는 뜨거운 불에 얼마나 많이 녹이고 제련했는가에 따라서 다르다.
14번 불순물을 제거한 금을 14K, 18번 불의 고난을 겪은 금을 18K, 24번이나 단련된 최종 결정체를 순금, 또는 정금(精金)이라는 금의 최고 등급 24K가 된다. 실로 순금이 되기 위해서는 불에 완전히 녹아야 하는 시간을 수없이 견뎌야 한다. 뜨거운 고난과 역경을 많이 이겨낸 사람과, 작은 역경에도 주저앉은 사람 중에 누가 금과 같이 가치 있는 인생 스토리를 완성할 수 있을까?
윤이나 시인의 위 디카시의 제목이 「입구」다. 왜 입구라고 했을까? 다의적인 뜻이 있겠지만, 나는 그가 견뎌온 고난을 떠올려 보면서 이제 그 상황을 벗어날 때가 되었거나 그것을 염원하는 기도이리라. “울 때는 울었지만 가는 길 /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 봄날이면 좋겠다”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빈 손으로 태어나서 연륜이 쌓여갈수록 시선이 깊어지지만,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마지막 입구를 향해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다가 되돌아보면, 눈물도 한때의 분노도 삶의 중요한 조각이 되고 입구도 되며, 지나온 문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레프 톨스토이는 진정한 전쟁은 밖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데,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시간과 인내’라고 한다. 저 디카시의 전경인 사진에 등장하는 늙은 인생이 숲길을 응시하는 모습에서는 아직도 앞길을 예측할 수 없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의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야 하는 인생이다. 수없이 단련된 그의 앞에 시온의 대로가 열리고, 정금 같은 날이 늦지 않게 올 것이다. 겨울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오듯 말이다.
평설: 이어산
지난 주에 우편함에서 모셔 온 묵중한 책 한 권. 어느 누군가의 피와 땀 시간의 농축이다. 허투로 볼 수 없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보려고
책상에 놓고 제목만 눈도장을 찍었다. 그러다 오늘 첫장을 펼쳤다. 그런데 낯익은 이름이다. 생각해보니 우리 회원 윤정희님 필명이었다. 윤 시인의 고운 미소가 활자 사이에서 기웃거린다. 알고보니 이미 걸출한 상을 수상한 작품이었다.
사과처럼 고운 윤정희 시인님 실력파였다.
제목이 이래서 디카시 지도하는 입문서인줄 알았더니 , 여기에 실린 작품 중 자유시 제목이었다.
도서출판 실천에서 나왔으며 '한국디카시학회'의 이어산교수가 그간 평설을 쓴 작품 중 56편을 엄선해서 엮었다.
출출할 때 곶감 먹듯이 한 편씩 음미해야겠다.
첫댓글 이 작품 너무 좋아요. 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이 작품에 눈길 머물게한 이유가 있었네요 ~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