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거지 남편을 위하여
강병철
옥이누나는 부뚜막 위에 짠지 하나만 달랑 올려놓고 ‘바가지 밥’을 비벼먹었다. 아버지가 들어와 함께 먹자며 소매를 끌면 마지못해 문 쪽 모퉁이에 웅크려 앉기도 했지만 틈나는 대로 아궁이 밥상으로 되돌아가곤 했으니, 남의잡살이 고적감이 가장 큰 이유였으리라. 햇살 비추는 초겨울 토방에서 숟가락에 겟국지 한 조각 올려놓을 때는 나도 한 입 얻어먹으려 아가리 따악 벌리며 그미의 손길을 기다렸었다
숭늉을 가지러 부엌에 가면, 누나는 곁불 옆에서 내가 빌려준 책들을 읽다가 물솥 뒤로 슬쩍 치워놓기도 했다. 3학년인 내가 읽던 ‘플란더스의 개’나 ‘허클베리의 모험’ 따위의 책을 감추던 손으로 슬그머니 누룽지를 내밀기도 하던 그미의 나이는 열다섯이었다. 눈보라 이빨을 부딪치며 감나무 아래로 와르르 쏟아지던 초저녁, 부지깽이 헤칠 때마다 아궁이로 시뻘건 열기가 넘치던 저물녘이었던가. 내가 딱 한번 설거지판에 끼어들기 위해 소매를 걷었으나 그미가 한사코 손을 당겨 아궁이 앞에 앉혔다.
“사내는 부엌에 얼씬대는 게 아냐. 부엌은 구질구질하니까 여자들이 일하는 데거덩. 그 중에서 가난한 여자들이.”
무심히 흘려듣다가 마주친 옥이 누나의 눈빛이 쓸쓸히 꼬리를 내렸다. 나는 동화책 등장인물 이름을 좔좔잘 외우는 그미를 한때 ‘밧줄에 묶인 우투리’로 떠올리기도 했으나 곧바로 잊어버렸다. 시간이 흘러 초로로 이어질 때까지 너무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당연한 현실이 놀랍고 안타까웠다.
5학년 실과 시간 뻐꾸기 우는 늦은 봄.
처음으로 ‘밥 해먹기 실습’을 했다. 각자 집에서 쌀 한 주먹씩 퍼 왔는데 품팔이집 민구는 보리 한 주먹으로 대신했고 겉보리 한 홉도 없는 재순이는 솔방울 한 메꾸리를 이고 와서 땔감으로 내놓았다. 어디서 구했을까, 김동배 선생님이 양푼 채 들고 온 깍두기를 쟁여놓고 여섯 조(組)의 솥단지에 열 명씩 묶어주었다. 우리 조(組)는 사철나무 아래 하수구에 솥을 부쳤는데 배관 저쪽 신작로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연기가 마치 굴뚝처럼 아늑했던 것 같다. 여자 애들이 주축이 되어 쌀을 안치는 동안 사내들은 허드렛일로 시간을 때우다가 설거지 담당으로 오그르르 분류되었다.
예순 명 급우가 모두 포만감으로 오후의 식곤에 빠졌던 것 같다. 그 시대 하절기에는 점심 이후 한 시간씩 재우는 오침 시간이 있었는데 여자애들은 교실에 누웠고 사내들은 복도에 자리잡아 머리를 눕혔다. 때국물 비비며 꿈나라에 빠지던 그 풍경이 아직도 그림처럼 아늑하다. 나 혼자 뜨락에 빠져나와 개미떼들이 흘린 밥풀을 물고가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스스로 밥을 해결해야 하는 날이 오겠구나.’
그런 두근거림으로 설렜던 것 같다. 그랬다. 개미떼들은 밥풀뿐만 아니라 아카시아 꽃잎이나 지렁이까지 우르르 달려들어 차곡차곡 축재하는 중이었다. ‘힘을 합치면 덩치 큰 놈도 쓰러뜨려 먹잇감으로 끌고갈 수 있구나’ 각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아버지가 일찌감치 서울 유학을 시도하는 바람에.
귀한 집 도령처럼 살던 나의 유년은 6학년부터 북아현동 비탈길 자취방에서 설거지하는 신세가 되었고 중학생 누나가 야간자습으로 늦을 때는 직접 독상을 차려 혼잣밥을 먹기도 했다. 어머니가 놓고 가신 밑반찬이 바닥나면 단무지 하나로 때울 때가 가장 많았는데 그마저 떨어지면 깨소금에 비벼먹다가 나중에는 그냥 맨소금에 비벼먹기도 했다. 아침 식기를 이불 속에 묻어놓고 등굣길 서두르면 저물녘까지 온기가 남아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밥은 떡처럼 뭉쳐있었지만 따뜻한 온기를 꺼낸다는 안도감으로 식기 뚜껑을 볼에 비볐다가 무르팍으로 옮겨 비비며 냉기를 버텨냈다.
설거지가 엄청 힘들지는 않았다. 아침에 양은솥에 밥그릇을 집어넣고 등굣길 서둘러도 저물녘에 돌아와 뚜껑을 열면 온종일 연탄불에 데워진 솥단지 밥풀떼기들이 흐물흐물 빠져나가는 게 제법 재미도 있었다. 어느 겨울, 상경하신 어머니가 슬픈 표정을 짓기 전에 내가 먼저.
“손 시렵지 않아. 솥에서 꺼내기만 하면 밥풀 더께가 스르르 빠져 나가거덩.”
일찌감치 선수를 쳐서 안심시키기도 했다. 그 유년의 자취생 경험은 모눈종이처럼 빡빡한 자본주의 터널을 헤쳐가는 에너지로 단련되기도 했지만.
“네가 엄마니? 어린 남자가 왜 설거지를 해. 불쌍하다.”
골목길에서 우연히 만난 처녀 선생님의 그 한 마디에 수직으로 떠 있던 몸이 수평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짝사랑 선생님의 호수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그런 강팍한 언어가 터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이니, ‘천사표 선생님도 생각이 뾰족할 수 있구나’를 처음으로 체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후로도 10년이 넘도록 자취 생활에 이력이 붙었고.
하필 군대의 보직도 취사병이었다.
‘752 주특기’, 그 보직은 70년대 허기진 막사의 고단함을 단칼에 해결시켜 주었으며 훈련이나 추위를 막아주는 방패막이 되었다. 600명 사병의 주린 곱창을 채워주는 취사장 조리작업은 단순하면서도 스케일이 컸다. 일단 칼도마 앞에 서면 어떤 요리에도 겁을 먹지 않게 된 것도 이점이다. 던져진 재료는 도마 위로 투입되는 순간 무엇이든 걸맞는 명칭 부여가 되는 동시에 감춰진 속맛을 우려내는 것이다.
무수에 된장을 넣으면 ‘무국’이 되었고 거기에 두부를 섞으면 ‘무두부국’으로 변신했으며 다시 돼지고기를 넣고 푹신 끓이면 ‘돼지고기 무두부찌개’가 되었다. 마찬가지다. 배추에 된장을 넣으면 ‘배춧국’이 되었고 두부를 섞으면 ‘배추두부국’으로 변신했으며 거기에 닭고기를 투입하면 ‘닭고기 배추두부찌개’가 되었다. 맹물에 간장을 넣으면 간이 배었고 고춧가루를 쏟으면 가마솥 위로 매운내가 후끈 솟아올라왔으며 한여름에는 냉미역국에 식초를 넣어 병사들의 더위를 신맛으로 식혀주는 주방 마법도 터득했다.
취사병의 작업 종류와 복장도 완전히 계급 질서였는데.
이등병은 완전 요리사의 취사모와 고무장갑, 장화 차림으로(이 복장이 그리도 수모스러웠음) 모든 설거지를 도맡을 복장을 차린 채 식판과 가마솥과 하수도까지 종횡무진 활약해야 했다. 작대기 두 개인 일병은 위생복에 군복바지로 반반씩 착용한 채 주로 생선과 고기를 잘랐는데 같은 일병끼리라도 짬밥순을 구별해 일병고참이 육고기를 맡았고 쫄따구 팀이 생선대가리를 쳤다. 작대기 세 개인 상병은 장화 대신 군화로 바꾼 채 야채를 자르거나 식판에 밥을 퍼 올렸다. 제대 말년 병장은 포즈부터 달랐다. 반들반들 다린 군복 정장차림으로 어디 하나 부뚜막 냄새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장독대 뒤에서 떡라면을 끓여놓고 면세품 쏘주에 푹신 젖을 수 있는 그 풍모가 참으로 고즈넉했다.
이상하다. 세월이 흘러 둥지를 틀고 새 신랑으로 입(入)하면.
구정물 세상과 ‘영원히 굿바이’인 줄 알았는데 웬걸 자발적 주방전문가로 진화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혼 초에는 아내의 뱃속에 생명이 웅크리고 있으므로 사내의 주방 빈자리 채우기가 당연하다고 짜맞췄다. 해산 이후에는 아내가 갓난아이 치다꺼리와 둘째 아이 준비로 워낙 바빠서 바깥 사나이가 솥뚜껑 자리로 투입할 수 있는 거라고 해몽을 만들었다. 그렇게 익숙해지더니 언제부터였나, 설거지하는 꿈이 등장하기도 하면서 마인드가 부뚜막 체질로 바뀌는 것이다.
주방 체질이 진해지면서 가까운 글쟁이 벗들의 아마추어 설거지 문장을 흠집낸 건 순전히 나의 심기 탓이다. 김상배 시인의 ‘나는 밸도 없나, 설거지 하다가 물묻은 손으로 전화를 받는다’라는 구절이 첫 타켓이었고 유지남 시인의 ‘설거지 끝낸 하얀 그릇들이 상큼한 속살을 드러낸다’가 차기 타켓으로 설정되었다. ‘그게 바로 구경꾼 시선의 전형’이라고, 그게 ‘수컷들의 태생적 한계’라며 ‘그런 사람이 자유와 평등을 말할 수 있겠느냐?’ 어쩌구 술자리 공격을 시도해서 벗들을 쬐끔 불편하게 했고 그들의 아내로부터 소소한 응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요잇, 문장을 한 바퀴 비틀며, ‘술떡으로 문을 열면/ 귀여운 내 새끼들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 아부지 밥줘/ 화사하게 달그럭댄다’로, 보라, 이게 전교조 교사의 전형이라며 우쭐대려 했다. 그들이 별로 감동하지 않았으므로 ‘신새벽 술떡으로 쓰러졌다가도/ 밥! 하고 벌떡 일어서는 삭은 장작’이라는 시작 타법으로 자아도취 해룽거렸다. ‘얼음밥 씹던 파르티잔’ 위에 ‘밥이 하늘이다’를 오버래 시킨 걸 직관과 감성의 합체라고 우기기도 했고.
기십 년이 지나 초로의 주말부부인 지금.
서산시 대산읍 기은리 바닷가 아파트에서 초로의 자취판을 벌이면서 홀아비 낭만에 취하기도 한다. 밥과 설거지는 어느새 몸의 부분이 되었는데도 첫 설거지 마음 자세로, ‘이제 <비밀의 문>처럼 하마 조심조심 뚜껑을 연다‘라고 쓰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대개 ’혼자 해먹는 밥은 너무 편안하지만 귀찮아‘ 하며 쪼롤 꿂기도 한다. 가끔은 벗 황재학 선생이 15년 전 『우리교육』에 발표한 「국어 시간에 김밥 먹기」를 아슴아슴 떠올리는 환상으로 키득키득 공복을 채웠고.
내 나이 59세, 고3 청년학도들과 40년 차이.
신산의 사연도 나뭇잎처럼 털어낼 초로의 시점인데도 열아홉 청춘들 앞에서 여전히 두근두근이다. 이 심장박동의 시발점은 80년대 초 총각선생 때 ‘안광이 지배를 철하는 여고생 눈빛’을 이기기 위한 강박증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랬다. 그 소도시 수수꽃다리 소녀들은 새내기 스승을 발라먹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음모를 꾸며줘서 행복했다. ‘출입문에서 칠판지우개 떨어뜨리기’ 식의 얄개 작전이나 펴던 여고생들이 지금은 수탉 같은 아줌마가 되어 구구구 군살 빼기에 몰입중이고.
그 옛날 ‘때까치 소녀’들과 양로원을 찾던 기억도 이제 아득한 스크린이다.
사춘기 문학소녀들이 프라이팬과 부침개 반죽을 들고 가면 쪼글쪼글한 할머니들이 툇마루에 마중 나와 햇살을 받다가 파안대소로 파꽃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던가. 더러는 부침개 접시를 들고 벽쪽으로 돌아앉아 혼자서만 야무지게 먹던 할머니 뒷모습이 클로즈업되면서 쓸쓸했던 것 같다. 그렇게 들기름 파티를 벌인 후 사춘기 끝물 소녀들은 본격적 설거지 타임에 돌입했으니, 닦고 말리고 부뚜막 정리까지 진짜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 같다.
중년이 지나면서 ‘요새 아이들은 예전과 달라서 참’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니기도 했다. (기실 이 문장은 피라미드에도 적혀있던 진부함의 표본임) 90년대 중반 즈음 2박3일 야영장으로 인솔한 우리 질풍노도의 중딩들이 밥을 먹을 때는 그리도 용감하더니 식후 포만감에 젖은 채 도통 식기 닦을 포즈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게으른 사춘기 풍경에 뚜껑이 열린 나는.
‘이 새끼들, 집에서 배운 버릇 바깥까지…….’
그 말이 튀어나오지 않아서 종시 다행이다. ‘참다, 참다, 끝까지 참았더니’ 그 벗들은 스스로 무럭무럭 성장하여 이제 잔주름 익숙한 불혹에 접어들었는데……여전히 선생님을 마음씨 여린 캐릭터로만 기억한다. 그 후로도 긴 세월 열아홉 청춘들과 씨름하다 보면 한결같이 몸이 15센티쯤 떠 있는 것 같다. 저 아름다운 청춘들이 입시에 묶여 시끈시끈 머리띠 동여매고 책상 씨름하는 모습이 호박으로 만든 시한폭탄처럼 아름답다.
수능이 끝나고 또 세월이 흐르다가 마침내 졸업식.
사내아이들은 머리에 무스를 발라 뾰족뾰족 세우고 개선장군처럼 등장하고 계집아이들은 짧은 치마 나풀거리며 화장발까지 겹쳐 나를 황홀하게 한다. 그네들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터진 헛소리 질문은.
“좋은 신랑감은 무엇일까?”
소녀들이 후리늘씬하거나 명문대 출신 그리고 돈 잘 버는 놈팽이를 끄집어내면 ……나는 설레설레 흔들며.
“설거지 잘하는 놈이 좋은 오빠야.”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는데 불쑥불쑥 시를 읽어주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내 마음을 스스로 잘 안다. 는적는적 준비한 화면을 띄우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싱크대 틈새기로 빠져버린 참기름 병뚜껑 그 사소함에 온 세상 우지끈 뒤집어지는 것이 문제다 동굴 속 그늘에 안주하던 온갖 잡동사니들 ‘틈입자 빗자루’와 맞붙으며 아우성이다 먼저 썩은 행주 조각이 모서리에 발목 묶은 채 안 된다 안 된다 끌려갈 수 없다며 이를 옹문다 이번에는 식칼로 바닥 긁기다 사이다 병뚜껑이 뽀얀 먼지 뒤집어쓴 채 ‘아아 형광등은 눈이 너무 시려요’ 옷고름 부여잡고 얼굴 붉힌다 마지막으로 효자손 갈퀴질이다 찌그러진 볼따구 지줏대 삼아 치켜올린 둔부가 끙끙 수치심에 떤다 모가지 힘줄 때마다 우두둑 구기며 이를 갈지만 녹슨 젓가락 하나 토해냈을 뿐 딸깍딸깍 밀려만 가는 병뚜껑
동 트는 새벽 출근길 찾아 허발나개 달리자 삼월 아침 하늘 뚜껑이 열려 대설주의보가 열렸던 날이다 –졸시 「꽃샘눈」
“누가 쓴 거죠?”
어깨를 화들짝 움츠린 이유는 찬바람이 탓이다. 오늘 이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임을 날마다 체득하는 사내의 심장으로 우당탕탕 유리알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쓴 거야’
고백하는 순간 열아홉 청춘들이 손가락질 감추고 키득키득 웃을 것이다. ‘에 -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