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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루지가 되찾은 ‘권리’
안유환
내 목회를 마무리한 세 번째 교회는 해발 400미터 산마을에 있었다. 40여 년 전, 광나루 선지 동산에 오를 때 가슴에 품었던 ‘작은 교회’를 거기서 만났다. 30평 양철지붕 교회당 앞에 세워진 나지막한 철탑의 십자가가 외로웠다.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몰려오는 유원지 마을은 주일날이 더 바쁘지만 열심으로 믿음을 지켜가는 성도들이 아름다웠고 교회는 사랑스러웠다. 봄이 오면 교회당 앞 양쪽에는 솔로몬 성전의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처럼 백목련과 자목련이 화사한 꽃을 피웠다.(목회서신 『흔적은 아름다워야 한다』 서문 인용)
나는 지금, 어느 겨울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그 교회당 앞에서 찍은 신국판 크기의 액자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검은 양복에 로만칼라를 한 예순의 목사, 오른쪽에는 환하게 웃음 띤 그의 아내가 빨간 저고리에 검은 숄을 두르고 눈밭에 나란히 서 있다. 내리는 함박눈은 신발 높이로 쌓였고, 사진에는 눈발이 허옇게 빗금을 긋고 있다. 3~4미터 뒤쪽 교회당 벽에는 교회 이름이 새겨진 나무 간판이 걸려있고, 그 앞 화단에는 처마 높이의 나목이 눈꽃을 가득 피우고 있다. 양철지붕에도 마당에도 하얗게 눈이 쌓였다.
처음 내 믿음이 자랐던 고향교회가 자그마했기 때문일까, 나는 어디서나 작은 교회가 정다웠다. 내가 30개월 군 복무를 시작했던 철원에서는 ‘8호 마을’이라 이름 붙은 어느 산골짜기 마을 교회에서 첫 성탄절을 보냈다. 군인교회에 다니던 병사 세 사람이 조그만 민간인 교회에 초대받아 떡국을 얻어먹고, 함박눈을 맞으며 교인들과 함께 새벽송을 돌았던 기억이 선하다. 첫 목회지 양산에서는 젖소를 키우는 집사님이 운전하는 경운기를 타고 윗마을까지 새벽송을 다녔고, 구역예배를 드릴 때도 교통수단은 경운기뿐이었다. 전통처럼 이어오던 새벽송은 세월의 물결에 떠내려 가버렸지만 크리스마스의 추억은 파스텔화처럼 정겹다.
“이봐, 크리스마스가 뭐지?”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교회마다 크리스마스 새벽송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즐겁고 감동적인 행사였다. 11월 말이나 12월 들면서부터 캐럴은 거리마다 울려 퍼지고, 교회당 안팎은 성탄 트리 장식으로 화려한 오색불꽃이 피어난다. 사람들은 바쁘게 사느라 한 해가 저물기까지 미뤄놓았던 안부 인사를 한꺼번에 편지나 카드에 실어 보낸다. 우체부 아저씨들은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을 배달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진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교회학교에서는 어린이들의 노래와 성극 등으로 축하발표회가 있고, 그것이 끝나면 교육관이나 어느 교인의 넓은 집에 모여 어른들도 윷놀이나 선물교환 잔치로 밤을 지새운다. 이때 눈 밝은 청년들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사랑하는 짝을 찾아내기도 한다. 자정이 지나면 떡국을 끓여 먹고, 몇 개의 새벽송 대원으로 조를 짜서 십자가가 그려진 청사초롱을 앞세우고 각기 맡은 구역으로 향한다. 두툼한 외투에 머플러를 두르고 귀마개까지 하고 부르는 노랫소리는 천사의 음성처럼 온마을에 그윽하게 울려 퍼진다. 새벽송 대원을 맞은 가정에서는 과자나 양말, 장갑 등 푸짐한 선물 꾸러미를 준비했다가 산타클로스로 분장한 대원이 메고 있는 마댓자루에 넣어준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저들 밖에 한밤중에’ 찬송을 부르며 교인들의 가정을 한 집씩 돌다 보면 어느새 밤은 하얗게 밝아진다. 열심을 다 했던 사람들일수록 성탄절 예배에서는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한다. 교인들은 새벽송을 마치고 나면 비로소 한해가 은혜 가운데 지나갔다는 생각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감상에 젖기도 한다.
부산의 바닷가 어느 마을, 교회의 새벽송 대원들이 다음 찬양할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맞은 편에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떠들어대던 술꾼들 5, 6명이 제멋대로 흥얼거리며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술기운은 괜한 시비를 걸도록 부추겼다.
“이 새벽에 시끄럽게, 뭣 하러 다니는 사람들이야!?”
술꾼들 가운데 한사람이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사랑교회 크리스마스 새벽송하는 사람들입니다.”
교인들은 언쟁을 피하려고 공손히 대답했다.
“뭐야! 예수쟁이들이란 말이지?”
그러자 또 한 사람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거들었다.
“허허허, 예수쟁이들도 크리스마스가 있는가 봐.”
그들은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 ‘예수쟁이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란 무엇일까? 잠깐 그 어원을 살펴보자. 크리스마스(Christmas)는 ‘Christ’(그리스도)와 ‘Mass’(미사)의 합성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예배(미사)’라는 뜻이다. 아직도 일부 젊은이들은 데이트하는 날로, 술꾼들은 망년회 날로, 어떤 이들은 지인들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날로만 알고 있을까? 크리스마스는 ‘구세주가 탄생한 날’이다. ‘구세주’는 인류를 죄악의 굴레에서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르는 말이다. 누가 인간의 죄를 다 용서할 수 있을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하나뿐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임마누엘⎯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생일이 크리스마스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일에 조건이 까다롭고 절차가 복잡하다면 누가 살아날 수 있을까? 구조원이 던지는 구명환을 붙잡기만 하면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다. 그가 어느 지역 출신인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재산을 얼마나 소유하고 어떤 명예를 지녔는지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손을 뻗어 구명환을 잡듯 마음 문을 열고 십자가(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기만 하면 그는 모든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지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평생을 흉악한 강도로 살아온 두 사람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나란히 달렸다. 그중 한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누가복음23:42) 믿고 고백하므로 그는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낙원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인간은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살아왔다. 사람들이 베풀 수 있는 사랑 가운데 용서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을까? 아무도 죄를 용서받지 못했다면 누가 오늘처럼 이 아름다운 문명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너와 나의 인간관계에서 피어나는 용서가 이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다.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아직도 그 기쁨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크리스마스에 온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가?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스크루지도 그 이유를 몰랐던 모양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삼촌! 하나님이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쾌활한 목소리가 외쳤다. 목소리의 주인은 스크루지의 조카였는데 워낙 잽싸게 들이닥치는 바람에 스크루지는 말을 듣고서야 그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아차렸다.
“흥! 헛소리!” 스크루지가 말했다. 그는, 그러니까 이 스크루지의 조카는 안개와 서리를 헤치며 빠르게 걸어온 탓에 열기로 달아올라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혈색 좋고 잘생긴 얼굴에 두 눈은 반짝거렸고 입에서는 입김이 연달아 새어 나왔다.
“크리스마스가 헛소리라니요, 삼촌!” 스크루지의 조카가 말했다. “설마 진심은 아니시죠?”
“진심이다.” 스크루지가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 네가 무슨 권리로 즐겁다는 거냐? 어떤 이유로 즐겁지? 그렇게 가난뱅이면서.”
“자, 그러면…….” 조카는 명랑하게 대꾸했다. “삼촌은 무슨 권리로 우울해하세요? 어떤 이유로 언짢은 거예요? 그렇게 부자신데요.”⎯
용서를 모르는 사람은 기뻐할 수 없다. 용서받는 것은 자유를 얻는 것이고, 그것은 기뻐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는 것이다. 용서보다 큰 사랑도 없고 자유보다 큰 권리도 없다.
나는 중학교 때 성경에서 나온 <프로디갈>(탕자)이란 제목의 영화를 단체관람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며칠 뒤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받은 재산을 다 챙겨 먼 고장으로 떠나가 거기서 돈을 뿌리며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돈이 떨어지자 친구도 다 떠나고 알거지가 된 그는 어떤 농장에 들어가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 했으나 주는 이가 없었다. 그가 두 손 들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얼싸안고 입 맞추며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이웃과 잔치를 벌였다. 아무것도 따지거나 묻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이런 용서를 알리는 날이다. 그 용서를 선포하는 것이 새벽송 캐럴이다.
오늘도 자기 일터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한 청년을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집에 돌아와 거울을 들여다보고서야 코와 뺨에 걸쳐 검댕이 묻은 것을 알았다. 누가 자기 허물을 깨닫고 죄를 인정할 수 있을까? 복음 전도자들이 사람들에게 ‘구원의 도리’를 전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내가 무슨 죄가 있나?”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깊은 사람들의 삶은 달리 나타난다. 12월에 접어들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지나온 삶을 돌아본다. 때로는 잘한 일도 있지만 잘못한 일이 더 많아 보인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더 짙어지는 것처럼 풍요와 성공의 뒷면에는 후회를 부르는 실패도 있는 법이다.
길을 갈 때 한 굽이 돌거나 긴 골목길이 꺾어질 때 사람들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한 번씩 뒤를 돌아본다. 개나리가 노랗게 언덕을 물들이는 봄이 오면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은 기지개를 켜며 연례 행사처럼 새로운 꿈을 꾼다. 그러나 나무의 입장이 되어보면 생각은 달라진다. 사람들이 풍요를 느끼는 가을에 나무들은 쓸쓸함을 되씹는다. 한여름 땀 흘려 많은 열매를 맺었으나 남아있는 것은 빈 가지뿐이다. 한때는 사람들도 노동의 대가를 착취당하거나 부지런히 일하고도 열매를 제대로 거두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날도 사람들의 눈에 가려진 낮은 자리⎯지구촌 곳곳에는 배고픔과 서러움이 널려있다.
어느 여름 기도원을 찾아 뒷산 너럭바위에 엎드려 기도할 때, 떨어져 누운 무수한 푸른 낙엽을 보았다. ‘푸른 잎도 떨어지는가?’ 낙엽은 붉게 물들거나 갈색이 되어야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푸른 낙엽은 인간의 죽음도 나이순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을은 사계 중 가장 좋은 계절로 꼽히지만 화려한 꽃들은 대부분 시들어 떨어진다. 초목은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느껴지고, 높아가는 하늘은 모든 것을 빼앗아 멀리멀리 달아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한 해가 저물어 갈 때, 인간은 못다한 일에 한숨을 내쉬고, 자연은 빼앗긴 서러움을 겨울바람에 실어 보낸다.
이처럼 쓸쓸한 상념에 젖어 드는 사람들의 귀에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크리스마스의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면 얼굴의 검댕은 분장처럼 아름다워 보이고, 실패하거나 가진 것을 다 잃어버려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실수나 죄의 책임을 묻지 않는 용서와 사랑의 나팔 소리만 들려온다. 크리스마스에는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아들⎯예수와 친구가 될 수 있다. 그에게는 왕자와 거지가 하나의 인간일 뿐, 부자도 으스댈 수 없고, 가난한 자도 기죽을 이유가 없다. 그의 사랑은 그 사람의 허물을 다 씻어내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게 만든다.
빅토르 유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무려 19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났으나 전과자라는 낙인 때문에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굶주려 죽게 된 그를 받아준 사람은 어느 마을 교회의 미리엘 주교였다. 장 발장은 따뜻한 음식과 깨끗한 잠자리로 사랑의 대접받았다. 밤이 깊어지자 그는 욕심에 이끌려 은수저와 접시 같은 은식기를 훔쳐 달아났다. 얼마 후 경찰관에게 붙잡혀 교회당으로 끌려온 그에게 미리엘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그 은식기는 제가 준 것입니다. 그런데 장 발장, 왜 은 촛대는 두고 갔소.”하며 은촛대 두 개까지 내어주었다. 그 ‘용서’는 장 발장을 선한 길로 이끌어 위대한 삶을 살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십여 년 전 장발장 영화를 관람할 때 끝부분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란 대사를 보고 영화가 끝나고 불이 들어와도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그때는 마치 예배하며 한편의 감동적인 설교를 듣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의 죄인을 마침내 승리자로 우뚝 세워주는 ‘뮤지컬 장 발장’의 주제곡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이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온 세계에 울려 퍼지는 활기찬 크리스마스 캐럴은 마치 죄악을 이겨낸 인류의 개선 행진곡처럼 들린다. 혹, 실패하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1818년 오스트리아의 성 니콜라우스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오르간이 고장 나버렸다. 눈이 많이 내려 수리를 부탁할 수도 없었다. 요제프 모르 신부는 낙심하지 않고 자신이 써 두었던 시를 꺼냈다. 그리고 교회 음악가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프란츠 그뤼버에게 기타반주곡을 부탁했다. 그뤼버는 그 시에 멜로디를 붙였고, 그 날밤 기타반주와 합창단의 화음으로 처음 연주되었다. 장중한 맛은 없었으나 사람들은 색다른 감흥에 취하였다. 그 곡이 크리스마스가 찾아오면 ‘영원한 주제곡’처럼 부르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찬송가 109장) 캐럴이다. 2011년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해를 돌아보는 성탄의 계절에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서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는 계절이다. 우리의 불행이나 실패를 승리의 노래로 바꾸어 부를 수 있도록 힘을 공급해주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누구나 개선장군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에 잊어서는 안 될 하나의 교훈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겸손의 의미! 바벨탑을 쌓으려는 인간의 욕심은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장군이 개선 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뒤에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외치도록 했다고 한다.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당신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예수의 탄생은 인류의 기쁨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14)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이고 누려야 할 권리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그것은 패배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최후의 승리자로 이끄는 대속(죗값을 대신 치름)의 죽음이었다. 이어령 선생은 굴렁쇠를 굴리던 여섯 살 때 눈물 속에서 ‘메멘토 모리’를 보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 속에 숨어있는 ‘메멘토 모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스크루지의 조카는 삼촌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 해의 많고 많은 날 중에 모두들 닫힌 마음을 솔직하게 터놓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일지라도 다른 여행길을 가고 있는 다른 부류가 아니라 정말로 무덤을 향해 함께 가는 길동무로 쳐주는 듯한 유일한 때가 크리스마스라고 말이지요.”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은 에버니저 스크루지는 7년 전 사망한 동업자이자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제이콥 말리의 유령을 통해 잊고 있던 기억을 회복하고 기뻐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성공과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슬픔도 섞여 있다. 낮과 밤이 함께 함으로 하루가 완성되는 것처럼 인생은 삶과 죽음으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무덤을 향해가는 길동무들’이다. 잘나고, 못나고,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차별 없이 서로 사랑하며 함께 가는 길동무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아닐까?
⎯ 메리 크리스마스 앤드 해피 뉴 이어! ㅡ월간 <문학도시> 12월호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