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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교회 여름수련회를 마치고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 4월부터 수련회 준비를 시작한 백형기는 맨 먼저 장소를 예약해놓고, 방언으로 기도했던 까치동산에 올라가 저녁마다 1시간씩 기도했다. 기숙사에 있는 선배들로부터는 수련회 운영 자료들을 수집했다. 수련회 일자가 2주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는 확정된 프로그램에 따라 중등부 학생들에게 진행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조를 짜서 책임을 맡겼다. 참석을 신청한 학생들은 120여 명. 숙식에 필요한 장비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여전도회와 교사들이 힘을 모았다. 지금 뚜렷이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 날 저녁 캠프파이어 시간이다. 설교를 마치고 통성기도를 할 때 수련회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백 전도사에게는 처음 겪어보는 ‘거룩한 체험’이었다. 교사들이 우는 아이들을 아무리 달래도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각 교회가 수련회를 모두 마친 뒤 어느 날 저녁 기숙사 사생들은 관리실 앞 등나무 아래 모여 앉았다. 수박, 참외, 빵과 음료수를 먹고 마시며 마치 잔치 뒤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수련회들 어땠어요?”
한 사람이 말을 꺼냈다.
“나는 교회가 학생 수련회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어. 제직들은 격려차 현장에 올 때마다 여러 가지 간식을 바리바리 실어 왔어.”
“한해를 처음 시작할 때 다짐했던 마음은 여름방학이 가까워지면 좀 느슨해지잖아요. 수련회는 이러한 학생들의 하반기 신앙생활을 잘 지켜가는 길잡이가 되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 교사들의 수고가 많았지. 금쪽같은 휴가를 학생 수련회를 위해 다 사용했으니, 한편으론 참 미안했어!”
“모르긴 해도 가족들이 여름휴가를 손꼽아 기다렸을 텐데, 그래도 불평 없이 잘도 해내는 것을 보면 모두가 충성된 일꾼들이지요. 복 받을 거예요.”
“왜 불평이 없겠어요. 집사님들끼리 앉으면 교회에 대한 말을 많이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직을 잘 감당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뿌리가 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요. 그들이 학생회 때 선배들이 휴가 기간에 몸 바쳐 수고하는 것을 보면서 자라왔거든요. 힘들어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련회를 마치고 나면 학생들이 확실히 달라 보입니다. 재충전의 시간이지요. 준비하면서 오래도록 결석한 친구나 가까운 새 친구들에게 집중적으로 전도합니다. 행사가 끝나면 교회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이 늘어난 것이 눈에 보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아예 ‘물놀이’ ‘등산’ 등을 이벤트로 내세워 아이들을 불러 모으지요. 그렇게 모은 아이들은 얼마 지나면 소리 없이 교회를 빠져나가 버립니다.”
“그래도 이벤트를 안 하는 것 보다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떨어지는 이삭이 있거든요.”
“학생들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나는 행사를 준비하면서부터 더 많이 기도하게 되었고 목회 훈련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교회학교가 한 해 예산의 절반 정도를 여름수련회에 투입하는 것은 그만한 수확이 있기 때문이지.”
“나는 마지막 날 저녁 아이들이 울음바다를 이룬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하더군요!”
“요즘 수련회에선 우는 것은 일종의 유행입니다. 특히 중등부 학생들은 한두 사람이 울기 시작하면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울게 됩니다. 아마 수련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모두 울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가 봐요.”
신학생들이 여름 행사 얘기를 쏟아내고 나면 관심은 미래의 교회와 목회지로 자연스럽게 옮아간다. 오늘날처럼 ‘잉여목사’의 수가 늘어나지 않아 신학생들은 목회지에 대한 염려를 크게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도시냐, 농촌이냐, 해외 선교사냐를 선택하는 것이 과제였다. 70년대로 접어들면서 도시에서는 교회 간판을 내걸고 십자가를 높이 세우기만 하면 빈자리들은 얼마 가지 않아 채워졌다. 한때 교회의 성장은 교회당 건물의 크기에 비례했다. 교회당을 크게 건축하면 교인 수는 그 크기만큼 채워졌고, 교회당이 작으면 교인들이 적게 모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때는 졸업하고 2년 후에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개척교회를 하거나 농어촌교회를 맡거나 기도원 등 특수시설에서 단독목회 이력을 쌓아야 했다. 그러므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목회유형이 상가건물을 임대해 개척교회를 하는 것이었다. 신도시 아파트 단지의 상가를 보면 한 지역에 2~3개의 개척교회가 들어선 곳도 없지 않았다. 도시 변두리 주택가에도 100~200미터 거리를 두고 개척교회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어촌이나 소도시 지역에는 아직도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많았다. 도시교회의 부흥성장은 상대적으로 농촌교회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70~80년대 대도시교회가 부흥성장 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농촌교회 교인들의 도시 유입이었다. 이로 인해 도시의 개척교회 목회자들은 유능한 목회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도시교회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고 외롭고 굶주린 자들을 찾아가셨던 예수님을 생각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