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69)
*선죽교 참배와 앉힘 술집 '하편'
망국의 설움이 가슴을 파고드는 듯한 처량한 시였다.
김삿갓은 저물어 가는 선죽교 위에서 선비가 읊은 시를 듣고, 문득 선비에게 말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 선죽교를 다녀 갔을 터인데, 알려진 시가 고작 한 편밖에 없다니,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렇다면 제가 즉흥시를 한 수 읊어 보기로 할까요?"
선비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만약 한 수 읊어 주신다면, 저는 두고두고 마음속에 아로새겨 두겠습니다."
김삿갓은 잠시 시상에 잠겨 있다가, 시를 한 수 읊었다.
故國江山立馬愁 (고국강산 입마수)
半千王業一空邱 (반천왕업 일공구)
煙生廢墻寒鴉夕 (연생폐장 한아석)
葉落荒臺白雁秋 (엽락황대 백안추)
옛 강산에 말 멈추니 시름이 새로운데
반천 년 왕업이 빈터만 남았구나
연기 어린 담장가에 까마귀 슬피 울고
낙엽지는 폐허에는 기러기만 날아가네.
石狗年深 難轉舌 (석구년심 난전설)
銅臺치滅 但垂頭 (동대치멸 단수두)
周觀別有 傷心處 (주관별유 상심처)
善竹橋川 咽不流 (선죽교천 연불유)
돌로 된 짐승은 오래되어 말이 없고
구릿대는 쓰러져 머리를 숙였구나
둘러보아 유난히 가슴 아픈 곳은
선죽교 개울물이 흐름없이 흐느끼네
선비는 김삿갓의 시를 듣고 나더니, 김삿갓의 두손을 덥석 잡으며 감격 어린 어조로 말을 한다.
"선생! 저는 선생께서 시에 이처럼 능하신 분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선생 같은 어른을 만나게 된 것은 다시없는 영광입니다."
"무슨 말씀을... 오늘 나를 위해 수고를 마다 않고 이곳까지 인도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올시다. 저는 하루에 한번씩 이곳 선죽교를 찾는 것을 일과로 삼는 사람입니다."
선비는 이같이 말을 하며 저물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선생과 같은 어른과 그냥 헤어지기는 너무나 섭섭합니다. 마침 날도 저물어 오고 하니, 읍내로 들어가 '앉힘술집'에서 술이라도 한잔 나누시면 어떻겠습니까?"
하며,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술이라면 나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데 앉힘 술집이란 어떤 술집입니까?"
김삿갓은 술집 이름이 처음 들어보는 터이라 선비에게 물었다.
선비는 김삿갓과 함께 읍내로 걸으며 말한다.
"조선 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가자, 개성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큰 변화가 왔습니다.
벼슬길은 아예 외면을 하게 되었고 모두가 장삿길로 나서게 된 것도 그런 변화의 하나이지만, 앉힘 술집이라는 명물 술집이 생겨나게 된 것도 그때부터의 일이었지요."
"나라가 바뀌게 되면 백성들의 생활에 변화가 따르게 마련이겠지요. 그러나 개성에만 있다는 앉힘 술집은 보통 술집과 어떻게 다른지 여간 궁굼하군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개성 사람들이 장사에 전념하다 보니 중국과의 거래가 빈번해져서, 남자들이 집을 오랫동안 비우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앉힘 술집이, 남편이 장사차 집을 비웠을때, 가정 부인이 부업삼아 간판을 내걸지 않고 알음 알음으로 알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만 술을 파는 일종의 내밀 술집이지요.
그러기에 앉힘 술집에서는 술과 안주값을 얼마 달라고 직접 말하는 경우가 없어요. 얼마를 먹었든 간에 손님이 알아서 주는 대로 받는 것이 특색이지요. 게다가 앉힘 술집은 술맛도 빚은 아낙의 솜씨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맛이 매우 좋고요, 안주도 한번 다녀간 손님의 취향에 맞춰 주어, 기막히게 좋습니다."
김삿갓은 그렇지 않아도 출출해 오던 판인데, 안주가 기막히단 소리를 듣자, 입안에 침샘이 샘물처럼 솟아 나왔다.
"술값을 주는대로 받는다고 하니, 세상에 그처럼 인심 좋은 술집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아까부터 배가 출출하던 판이니, 어서 가십시다."
김삿갓은 선비를 재촉하여 술집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있어 이렇게 물어 보았다.
"술값을 손님이 알아서 주는 대로 받게되면, 필시 얌체같은 손님이 없지 않을 것이고,
그런 경우는 술집의 손해가 클텐데, 그래가지고서야 장사가 되겠습니까?"
"개성 사람 중에는 그처럼 경우에 벗어나는 짓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무슨 일에 있어서나 경우 바르기로는 개성 사람들을 당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개성 사람들이라고 모두 성인 군자는 아닐 것이고... 개중에 먹고 마신 술값을 적게 내미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김삿갓은 짐짓, 개성 사람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선비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러자 선비는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데,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면 주인은 적게 내민 술값이라도 아무 말 않고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한 사람이 다시 오게 되면 그때는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하고, 슬며시 따돌려 버립니다."
선비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어느 골목 어귀에서 발을 멈추고,
"우리가 지금 찾아가는 집은 바로 저기 보이는 집입니다."
김삿갓이 선비가 가리키는 집을 보니, 여늬 여염집과 다름 없는 집이었다.
그 집앞에 이르러 선비가 대문고리를 잡아 흔들며, 안을 향하여 작은 소리로 주인을 불러댓다.
"아주머니 계시오? ... 나, 교동 생원이오. 오늘은 손님 한 분과 같이 왔소이다."
하고 말을 하자, 주인 아낙네는 목소리만으로도 누가 왔는지 알아 보는 듯이, 반갑게 나와 대문을 열어주며,
"어서 오세요. 안방으로 드시죠."
하고 정중히 맞아 들인다.
선비와 일행인 김삿갓을 안방으로 인도하는 것을 보니, 선비는 이집에선 상객(上客)으로 대접 받는 것 같았다.
35,6세로 보이는 주인 아낙네는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단정하게 꽂고 있는 품이 어디로 보아도
현모양처형의 가정 부인이었다.
"매우 깔끔한 인상의 저 여인이 이 집 안주인입니까?"
"그렇습니다. 살림살이도 물샐틈 없이 잘하지만, 음식솜씨가 좋기로도 소문난 부인이지요."
김삿갓, 자리에 앉으며 문득 생각해 보니, 선죽교를 찾다 만난 이 선비와 아직 통성명을 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김삿갓이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선비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고보니, 아직 인사를 못드렸습니다. 저는 구름처럼 떠돌아 다니는 김삿갓이라고 합니다."
하고 정식으로 인사를 청했다.
그러자 선비는 두 손을 설레설레 내저어 보이며 말한다.
"뜻에 맞는 사람끼리 술잔이나 나누다 헤어지면 그만이지, 구태여 통성명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교동골에 살고 있으니, 교동 생원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교동 생원이라고 자칭한 선비는 끝내 본명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마침 그때 주인 아낙네가 주안상을 들여왔다.
그런데 커다란 소반위에 얹힌 것은, 보쌈 김치 두 보시기에 소주 한 주전자만 달랑 놓였을 뿐이었다.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아니, 이게 바로 개성 명물인 앉힘 술집의 주안상이라는 겁니까?"
교동 생원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이것은,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기에 지루할 터이니, 기다리는 동안 입놀림을 하라는 전주상(前酒床) 입니다. 진짜 요리는 조금 더 기다려야 나올 테니, 그동안에 심심 파적으로 소주로 목이나 축입시다."
손님이 요리를 기다리는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하여 전주상을 내온다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소리다.
그렇다면, 손님에 대한 이곳 개성 술집의 배려는 명물임에 틀림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보쌈김치를 안주삼아 소주 몇 잔을 나누고 있노라니까, 그때부터 본격적인 술 안주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처음 나온 안주는 쇠고기 수육과 돼지 편육이었다.
김삿갓은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많은 진수 성찬을 먹어 보았지만, 이날처럼 맛있는 쇠고기를 먹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삶은 고기는 얇지도 두껍지도 않게, 알맞게 저며져 있었고 크기 또한 적당해서 한 입에 먹기도 좋았지만, 입안에 넣으면 슬슬 녹아버릴 정도로 기가막혔다."
"아니, 쇠고기를 어떻게 요리했기에 입 안에 넣기만 하면 슬슬 녹아 버리는 것입니까?"
김삿갓은 수육을 연방 집어 먹으며 칭찬의 소리를 하자, 교동 생원이 대답한다.
"개성은 워낙 요리를 잘하기로 유명한 곳이랍니다."
"요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