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 1부 황하의 영웅 (62)
제2권 내일을 향해 달려라
제10장 제족의 선택 (1)
정소공(鄭昭公)
정나라 제4대 군주이다. 이름은 홀(忽).
그랬다.
정장공이 세상을 떠난 후 그 뒤를 이어 군위에 오른 사람은 세자 홀(忽)이었다.
언뜻 보기에 그의 군위 계승은 매우 순조로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세자 홀의 동생 공자 돌(突)이 고국을 떠나 송나라로 망명해야 하는
나름대로의 복잡한 사정과 아픔이 있었다.
- 떠나거라.
정장공은 죽기 직전 공자 돌(突)을 불러 이렇게 명했다.
그것은 추방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자 돌(突)은 말없이 정나라를 떠났다.
- 왜 제가 떠나야 합니까?
이렇게 항변할 만도 하건만 공자 돌(突)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순순히 외가인 송나라를 향해 떠나갔다.
이로써 정장공이 염려했던 후계자 문제는 일단락 지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너무나도 우습게 정소공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장 정(鄭)나라의 추락으로 이어졌다.
정소공은 군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즉위를 알리는 사절단을 주변 각 제후국으로 보냈다.
그것이 관례다.
사절단 대표는 고위직에 있는 대부들을 임명한다.
정소공은 당연히 송나라에도 사절단을 보냈다.
송나라는 정소공의 라이벌이었던 공자 돌(突)이 망명해간 곳이다.
정소공으로서는 그의 거취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제중족(祭仲足)께서 송나라를 다녀오셨으면 합니다.“
송나라 사절단 대표로 특별히 제족을 지명했다.
제족(祭足)은 정소공이 세자였던 시절부터 후견인 역을 맡아왔던 정나라 대신이었다.
정장공이 후계자로서 공자 돌(突)을 생각하고 있을 때 과감히,
- 다른 공자를 군위에 세우신다면 신(臣)은 정나라를 떠나겠습니다.
라고 직언한 사실을 정소공이 어찌 알지 못하랴.
가장 믿을 만한 신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임무를 수행하고 오겠습니다.“
제족(祭足)은 자신을 송나라 사절단 대표로 지목한 정소공의 의도를 잘 알았다.
그는 곧 송나라를 향해 떠났다.
공자 돌(突)의 생모는 옹길이라 불리는 여인으로, 송나라 귀족인 옹씨(雍氏)의 딸이었다.
추방당하다시피 송나라로 망명한 공자 돌(突)은 외가인 옹씨 집에 머물며
정나라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포부가 컸다.
대국을 친정으로 두고 있는 생모 옹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네 뜻을 마음껏 펼쳐라.
어려운 일이 있으면 송나라가 너를 도울 것이다.
이러한 배경은 정소공의 생모가 소국중의 소국인 등(鄧)나라 출신의 여인이라는 점과 크게 대비되는 점이었다.
공자 돌(突)은 외가에 머물며 옹씨 일족들과 향후 자신의 거취에 대해 의논했다.
- 저는 반드시 정나라로 돌아갈 것입니다.
- 공자는 아무 염려하지 마라.
내가 옹씨 일족의 명예를 걸고 적극적으로 도울테니 때가 오기를 기다려라.
우리 주공께서도 반드시 그대를 후원할 것이다.
정나라 대신 제족(祭足)이 사절단 대표로 송나라 도성인 상구에 당도한 것은
바로 이러할 무렵이었다.
공자 돌의 외조부 옹(雍)대부는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때가 왔도다.
공자 돌(突)이 정나라로 돌아가고 못 가는 것은 오로지 제족에게 달려있다.“
그러고는 송장공을 찾아가 비밀리에 한 가지 계책을 알려주었다.
송장공은 지난날 정나라에 망명해 있던 공자 풍으로,
태재 화독이 송상공을 죽이는 바람에 귀국해 군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는 정나라를 떠나기에 앞서 자신을 보살펴준 정장공에게 눈물을 뿌리며
다음과 같이 약속했었다.
- 죽을 때까지 은혜를 잊지 않고 대대로 정나라를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송장공은 정장공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이 약속을 잘 지켰다.
그러나 정장공이 죽고 정소공이 즉위하자 정나라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그는 망명 시절 세자 홀(忽)보다는 송나라 여인의 아들인 공자 돌(突)과 가깝게 지냈었다.
은근히 세자 홀이 군위에 오르기보다는 공자 돌이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자 돌(突)은 정나라에서 추방되어 송나라로 망명해왔다.
예전의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세자 홀(忽)은 편협한 사람이다.
그는 군주의 자격이 없다.‘
이런 중에 정나라로부터 사절단이 도착했고,
동시에 총신 옹(雍)대부가 비밀리에 귀띔해 주었다.
"지금 정나라 실권은 모두 제족(祭足)의 손에 있습니다.
제족을 위협하면 쉽게 정소공을 내치고 공자 돌(突)을 정나라 군위에 올릴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이 바로 그것이오,“
옹대부의 귀띔에 송장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족을 어찌 대할 것인가 마음을 굳혔다.
곧 송나라 제일의 장수 남궁장만(南宮長萬)을 불러 궁정 주변에 무사를 매복 시켰다.
잠시 후 제족(祭足)이 궁으로 들어와 송장공에게 예(禮)를 올렸다.
그가 굽혔던 허리를 폈을 때였다.
양편 휘장 뒤에 숨어있던 무사들이 뛰어나와 제족을 좌우에서 붙잡았다.
제족은 놀라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큰 소리로 물었다.
"외신(外臣)이 귀국에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당상 위의 송장공이 빙그레 웃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군부(軍府)에 가서 물어보아라.“
말을 마치고 휭하니 내전으로 들어가버렸다.
어쩔수 없이 제족(祭足)은 결박당한 채 군부로 끌려갔다.
군부의 경비는 물샐틈 없이 삼엄했다.
제족(祭足)은 하루종일 군부의 한 작은 방에 갇혀 지냈다.
영문을 알면 대책이나 강구하겠지만,
무사들은 방문을 굳게 닫아건 채 일체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었다.‘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두렵고 불안하고 무서워서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날이 저물고 밤이 되었다.
제족(祭足)은 극심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잠도 오지 않았다.
연신 불안한 눈길로 방문 쪽만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발소리가 들리더니 자물쇠를 따고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희망 반 절망 반으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송나라 태재 화독이었다.
그의 뒤로 술상을 든 시종이 서 있었다.
화독은 여유있는 몸놀림으로 제족 앞에 앉았다.
그는 제족(祭足)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을 들어 술부터 권했다.
"우선 한 잔 받으십시오.“
그러나 제족은 술잔을 받을 만큼 한가롭지가 않았다.
"우리 주공은 귀국과 수호하기 위해 나를 사신으로 보냈소.
그런데 귀국의 군후는 어찌하여 의전절차를 무시하고 사신을 이렇게 대접하는 것이오?
내가 귀국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했소?“
제족(祭足)의 다그침에 화독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를 이 곳에 가둔 것이오?“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부득이 이 곳으로 모신 것뿐이니,
너무 다그치지 마시오.“
화독은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제족(祭足)은 그러한 화독의 태도에서 필시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예감을 받았다.
"부탁이라니오?“
"그대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외다.“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이나 해보시오.“
제족의 거듭되는 채근에 화독은 본론을 꺼냈다.
"귀국의 공자 돌(突)이 지금 우리 송나라에 와 있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외다.
그런데 우리 주공께서는 공자 돌을 각별히 생각하고 계시오.
능히 정나라를 다스릴 만한 재목이라고 여기시는 것이지요.
반면에 이번에 즉위한 자홀(子忽, 정소공)은 결단성도 없거니와
나라를 다스릴만한 능력이나 덕이 전혀 없는 사람이외다.“
"............................!"
"우리 주공의 바람인즉,
그대가 자홀을 폐위시키고 공자 돌(突)을 군위에 올리도록 하라는 것이오.
그리하면 우리 주공은 언제든지 귀국과 수호할 마음을 가질 것이오.
어떻소.
그대가 이 일을 도모해 보는 것이?"
제족(祭足)은 그제야 자신이 군부에 갇힌 까닭을 알았다.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우리 주공은 선군의 명을 받고 군위에 올랐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