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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들을 위한 수난 이야기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27:10)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다(26:2)
모든 복음서는 예수께서 죽으신 시기를 유월절로 특정합니다. 구약성서의 구원 사건인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죽음에서 건짐받아 해방된 날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의 구원을 위해 양이 도살되어, 피는 문설주에 발라지고 고기는 양식이 되었습니다. 그 양이 흘린 피가 구원받을 백성의 표식이 되었듯이, 예수의 죽음이 구원을 위한 희생이요 그의 피가 모두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증표라면,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죽으셔야 마땅합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못 박히는 사건이 유월절에 있으리라고 이라고 명시하십니다(16:2).
복음서는 예수의 말씀대로 되어가는 시간표를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이라고 알려진 유월절 식사를 제자들과 나누십니다(26:17-29). 기독교 예배의 핵심인 성만찬의 원형이 제시되는 이 식탁에서, 예수께서는 빵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그것이 자신의 몸(26절)이요 피(2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식사 후에 겟세마네로 가셔서 기도하시고(36-46절), 체포되신 후에(47-56절), 그날 밤에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으시고(57-75절), 아침에는 빌라도의 법정에 넘겨져 사형 언도를 받고 나서(27:1-26),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27-66절). 유대인의 하루는 저녁부터 다음 저녁까지인데, 유월절 식사를 하셨던 저녁부터 다음 저녁 사이에 모든 수난과 죽음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유월절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모의 : 유월절에는 예수를 죽이지 말자 (26:3-5)
그런데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결정한 바는 “명절(유월절)에는 하지 말자(예수를 죽이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26:3-5). 유월절은 모든 유대 남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이는 최대의 명절로서, 소동에 대비해 로마 총독(빌라도)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주둔해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명절을 책임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로서는 소란의 불씨가 될 일을 벌이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았던 예수(21:1-11)를 유월절에 제거하려 했다가는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우려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유대교 지도자들의 시간 계획은 무산되어 버립니다. 그들에게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밀약한 유다가 시간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됨으로써(26:16), 유월절을 피하려고 했던 의도가 빗나가고 맙니다. 유다는 예수를 유월절에 넘김으로써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죽음을 맞게 되고, 이로써 유월절 양의 희생이라는 대속과 구원의 경륜이 완성됩니다. 유월절이 시작된 밤 유다가 예수에게 입맞춤으로써 예수의 죽음이 유월절 사건이 되던 그 순간, 마태는 이 정황을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이렇게 되게 하신 것은, 예언자들의 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26:56)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다는 얘깁니다.
예수를 넘겨주면, 내게는 무엇을 주겠소? (26:15)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가룟 사람 유다가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에게 찾아가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시작되는 신호탄이 됩니다. 유다가 스승 예수를 저편에 넘겨주고 은 삼십 조각을 받았다는 것은 두고두고 비난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그의 배신은 용서받지 못할 죄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배신했다는 비난을 유다 혼자에게 뒤집어씌우기에는 부당한 면이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를 위시하여, 예수를 배신하지 않은 제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외 없이 그들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맹세하고서는(26:31-35) 하루를 못 넘겨 선생을 버려두고 도망하거나(26:56)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26:69-75). 변모산의 영광(17:1-8)을 지켜본 세 제자는 예수께서 괴로워하시며 기도하시던 시간에 잠들어 버렸으며(26:36-46),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던 시간이나, 장례 때에 함께 한 제자는 없습니다. 마태복음의 수난 서사는 ‘배신하지 않는 제자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보여줍니다.
예수를 배신하는 이들이 한결같이 예수를 따르고 사랑했던 이들이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유다의 말은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보편적 언사입니다. 오히려 오늘날 더 많이, 더 자주, 그리스도를 놓고 흥정과 거래가 벌어지고, 원하는 것을 얻고자 그리스도를 내어줍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수난 서사에 나오는 제자들의 배신 이야기는 곧 우리 자신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다 (26:28)
유다의 배신 결심에 이어 유월절 식사인 마지막 만찬이 나옵니다(26:17-30). 이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잔을 주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에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십니다(26:27-28). 공관복음서의 마지막 만찬 일화마다 이와 비슷한 문구가 나오지만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라는 문구는 마태복음에만 덧붙여집니다.
앞서 유다가 배신할 것이라는 취지의 대화가 오고 간 상황(26:25)에서, ‘죄 사함을 위해 흘리는 나의 피라’는 말씀과 함께 가룟 유다에게도 잔이 건네진 것입니다. 이는 유다가 용서된다는 메시지이며, 그의 죄를 사하시려는 예수의 의지가 강력히 암시되는 대목입니다. 이런 의지는 유다가 예수를 팔 것을 알면서도 열두 사도로 택하시는 장면에서도 읽힙니다(10:4). 예수께서 건네신 용서의 잔을 유다는 마셨겠지요. 이로써 유다의 죄는 용서된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는가?
예수께서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도 재고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다가 자신을 팔 것임을 정확히 아셨고(26:21-25), 제자들이 다 스승을 버리고 도망갈 것이나,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것도 모두 예견하셨습니다(26:31-35). 모르고 당해야 배신이지, 알고 당하는 것을 배신이라 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예수께서는 배신하려는 제자를 경고하시거나 만류하지도 않고, 배신을 바로잡을 대비책조차 아니 세웁니다.
배신은 예언된 것이며(26:2),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유다의 배신만이 아니라, 제자들을 버릴 것과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리라는 것도 예고되었고((26:31-35), 그대로 되었습니다(26:56, 69-75). 배신이 예수를 위험에 빠뜨리고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유다와 제자들의 배신과 상관없이 결정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을 궁극적으로 이루는 것이자 영광을 드러내는 일임을 아셨고,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의 배신은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기보다는 촉진합니다. 예수의 죽음이 유월절 사건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유다의 배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무수한 배신과 죄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유다를 위한 변명
어쩌면 스승을 팔았다는 사실 하나만 제외하면, 유다는 제자로서 독보적인 결행을 보여줍니다. 뒤늦기는 했지만, 유다는 제자 중 유일하게 ‘예수의 무죄’를 단호히 주장합니다(27:4). 자신의 배신을 인정하고 뉘우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받은 돈을 들고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돌려달라고 요구합니다(27:3-4). 끝내 자신이 저지른 일을 돌이킬 수 없게 되자, 받은 돈을 성소에 던져놓고 목을 매달아 죽음으로써,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책임을 집니다(27:5). 이 정도면 목숨을 부지하려고 스승을 부인하고(26:70) 맹세하고(26:72) 저주하는(26:74) 베드로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도록 숨어 숨죽이고 끝내 나타나지 않는 다른 제자들보다 백번 낫지 않은가요?
예수의 죽음은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의 배신 때문에 초래된 결과가 아닙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음모와 빌라도의 불의한 재판과 군중의 어리석음이 빚어낸 사태가 아닙니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 좌절된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마침내 이루어낸 성취입니다. 수많은 음모와 불의와 배신과 비겁과 무지와 혐오로 점철된 십자가의 길에서, 주님은 당신의 자비와 용서를 통한 완전한 구원을 성취하십니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어떠한 악의와 잘못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죄악이나 나약함조차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죄는 용서를 받고 모든 죄인은 용납됩니다. 베드로를 위시하여, 예수께 등을 돌렸던 제자 중에 용서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께 고통을 가하고 조롱하고 모욕했던 모든 사람도 예외 없이 용서의 대상이 됩니다. 당연히 유다의 배반이 용서받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비해 현저하게 용서를 강조하는 마태복음이 유다를 위해 많은 변명을 하는 이유입니다.
유다를 위한 복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26:24) 인물로 기억됩니다. 유다의 비극은 예수를 팔았다는 데에 있지 않고, 용서받기를 거부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칩니다(27:3). 이어 유대 지도자들을 찾아가 돈을 돌려주며 선생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함으로써 죗값을 치름으로써 자신의 뉘우침이 진정임을 증명합니다. 하지만 뉘우침이 회개는 아닙니다. 성서는 죄를 시인하고 뉘우치는 것을 회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악함을 절감한 인간이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비로소 회개입니다. 유다의 뉘우침이 회개가 되지 못하는 것은, 용서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진실을 외면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뉘우치고 죗값을 달게 치르거나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는 인간적으로는 매우 타당해 보이지만, 실상은 용서의 은혜를 거절한 것이지요. 반대로 유다와 다름없이 예수를 배반한 베드로는 그는 속절없는 통곡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불쌍한 인간으로서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인 까닭입니다. 신앙공동체는 이러한 베드로들의 모임이며, 죄 사함의 잔을 마시는 자리입니다. 유다에게 필요한 것은 제사장들의 성소가 아니라 용서의 공동체였던 것이지요.
https://youtube.com/live/9k8azm6r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