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부교사건에 대해서 여러 평가들이 존재하는데 제 견해는 명백한 태조의 외교전략실수입니다.
당연히 거란에 대해서 노골적인 적대감정을 들어낸것부터가 실수인데 상당수 역사학자들이 바라보는 이 사건을 일으킨 원인으로 태조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면서(후백제정복) 북쪽에서 내려온 발해유민들의 도움이 적지 않아서 발해유민들 입장을 생각해서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좀 문제점이 있는데 비록 후백제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발해유민들의 인적자원이 일정부분 기여를 한것은 인정하더라도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구 신라지역 후백제지역민을 모두 화합에서 국력을 결집시키는 것이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리고 꼭 거란에 적대적인 행동을 보여아만 발해유민들의 지지를 얻는 방법인지도 의문이 갑니다.
제가 태조라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미 발해는 망했스니 발해땅을 거란이 독차지 하지 말고 고려에게도 일정부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말에는 거란이 차지한 구 발해땅의 일부를 떼어서 고려에게 주라는 것이 아니라 발해땅이라도 북쪽에 거란에 가까운 곳은 거란이 차지하더라도 발해남부지역에 아직 거란이 실효지배를 하지못하는 땅에 대해서 고려땅으로 인정해달라는 것입니다.
즉 1차 고거전쟁에서 합의해서 얻은 강동6주땅을 이때 요구하는 것이죠. 강동6주가 거란땅이었는적은 없고 그 땅은 발해멸망후에 거란이 아직 제대로 정복한 상태가 아닌 땅입니다.
10세기 발해멸망후 1차고거전쟁에 이르기 전까지 구 발해영토중에서 실질적으로 거란이 관리한 땅은 요동지역이 중심이고 거기에서 거리가 먼 발해남부지역은 아직 거란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데다가 거란과 고려의 중간에 정안국등 후발해세력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구 발해땅중 실제 거란이 제대로 지배하지 않은 땅들이 상당수였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땅에 대해서도 고려땅으로 인정하라고 거란에 요구하는 것입니다.
당장에 거란을 적대시할것이 아니라 점차 힘을 길러 언젠가는 거란을 정벌할수 있다라는 대범함을 보이는 태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구발해영토 남부를 서서히 고려가 흡수하는 것도 발해유민들의 지지를 높이는 좋은 방법이 될수 있습니다.
만일 이때 고려가 거란에게 저러한 요구조건을 했다면 거란이 그것을 인정했슬 가능성도 충분했다라고 봅니다.
고려는 북진하려고 하고 거란은 남진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양측이 충돌하기보다는 서로가 합의하에 적당한 선에서 경계를 긋자라는 요구입니다.
첫댓글 왕건의 만부교 사건을 외교전략적 실수라고 보시지만 그러나 당시 상황을 현재의 단편적인 관점으로 보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수밖에 없지요 발해 유민들은 장기적인 고려의 북진 정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계층일수밖에 없고 그리고 고려 건국의 중심 세력인
고구려계 패서 호족들은 이들 발해 유민들을 주 세력기반으로 삼을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들의 인심을 얻지 않고서는 고려 국가체제를 유지하기가 어려울수밖에 없지요 북진 정책도 큰 장애에 부딪칠수밖에 없는 법이고
그리고 거란은 발해 유민들에게 조국을 멸망시킨 철천지 원수 같은 존재들이라 왕건이 거란에게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가는 발해 유민들이 실망해서 고려 왕조에 반란 같은 것으로 반기를 들수도 있는 상황이고 심하면 고국 본토에 있는 정안국으로 갈수도 있는 상황을 초래할수도 있는 법입니다
왕건으로서는 불확실한 외교적인 이익보다 확실한 국가적인 이익인 발해 유민들 흡수와 절대적인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만부교 같은 조치가 필요할수밖에 없지요
거란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꼭 그렇게 만부교사건같이 직설적으로 거란을 적대시하는 것이 실수였다는 것입니다. 다순히 친화적이다 적대적이다라는 이분법으로 볼것이 아니라 당당히 요구할것 주장하는 자강외교를 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려 당시의 중세 외교는 지금의 현대외교처럼 다양한 논의와 절차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와 권력층들의 즉홍적인
심리로 결정되는 이분법적 성격이 지배적일수밖에 없기 때문에 외교에서 적대적인 강경조치는 그 나라를 대표해온 사신들에게 표출해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은 법입니다 만부교 사건도 그런 성격하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수밖에 없는 법이고
고려와 거란과의 외교 접촉은 후삼국 통일 이전인 922년이 처음이라 19년후에 벌어진 만부교 사건 당시 거란 사신의
방문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고 당당히 요구가 수반되는 자강외교라는게 무슨 기준의 자강외교일까요
자강 외교도 당시 국제적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고서 하는 것이지 무턱대로 한다고 효과를 보는게 아니지요
만부교 사건 당시 왕건으로서는 후삼국을 통일한지 6년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라 통일된 신라 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발해 멸망시킨 거란과 외교한다면 신라 백제 유민들에게 고려가
거란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보내어 이들이 거란과 유착하여 자국 회복을 꾀할 위험성을 초래되기 떄문에
그래서 국내 정치적인 이유로 만부교 외교를 취할수밖에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