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7vGRqOeqQFQ
삭개오의 친구 누가복음 19장 1-10절
낙동강 상류의 합천창녕보가 있습니다. 지난 해 12월 말에 수문을 개방하면서 물이 흐르고 그러면서 강물의 수위가 낮아지고 강 상류(회천)에 모래톱들이 생깁니다. 그러자 겨울 철새들의 안식처가 생깁니다. 모래자체가 수질을 정화시키는데 탁월하기도 하고 땅을 파서 그곳에 서식지나 산란지를 마련하기도 쉬워서 철새들의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 수문을 개방하면서 모래톱이 생겨나면서 멸종위기의 새들 희귀 조류들 20-30여종이 돌아오면서 생태계가 복원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전국에 있는 많은 보들이 그렇답니다. 보를 닫아서 물길을 막으면 수력발전소를 가동시켜 에너지를 만들거나 농수로 쓰거나 카누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지만 그러나 강은 흐르지 않고 고이고 썩으면서 생태계는 죽고 녹조라떼로 변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한때 몇 년씩 개방하지 않아 결국은 강이 죽어가자 이제는 매년 겨울철에 한차례식 수문을 개방해서 대량의 물을 방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낙동강 상류의 합천창녕보 상류 회천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복원된 생태계의 조류들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오기도 한다고 합니다.
흐르는 강의 물길은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수천년동안 홍수가 나고 물이 흐르면서 생태계가 가장 최적화된 상태로 물길이 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난 물길은 어떤 곳은 유속이 빠르고 어떤 곳은 유속이 느리고 어떤 곳은 얕은 습지가 되고 어떤 곳은 깊은 웅덩이가 되고 그러면서 생태적으로 다양한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수많은 종들의 새들의 서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2월 달에 다시 수문을 닫아 다시 강물이 채워지게 되었다는데 참으로 어리석고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만약에 강물을 꽉 채워 흐르게 하지도 않으면서 녹조라떼를 만들어놓고는 수없이 모래를 가져와 강둑위에 쌓아놓고 철새야 와라 철새야 와라 하면 올까요? 안옵니다. 강을 죽이고 병을 일으키는 환경은 하나도 변화를 주지도 않으면서 온갖 화려한 것들로 치장해봐야 절대로 새들이 오지 않습니다. 본능적으로 이곳에 내가 있어야 할 곳인지 있어서는 안되는 곳인지 새들도 본능적으로 압니다. 그런데 다른 것 하나도 하지 않아도 수천년동안 자연이 가르쳐준 그 지혜대로 물이 흐르게만 만들어줘도 그래서 수면이 낮아지면서 모래톱이 자연 드러나 자연스럽게 생태계가 복원이 되면서 순환가능한 생태계만 만들어주면 오지 말라고 해도 옵니다. 도시락 싸들고 쫒아다니지 않아도 희귀종들이 알을 까고 철새들이 날아가다가 앉아서 쉬고 머물면서 생태계의 보고로 만들어 살아갈 것입니다.
생명이 살아가는데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순환입니다. 흐르게만 해줘도 하천도 살고 물도 깨끗해지고 생태계가 복원되지 마라고 해도 복원됩니다. 그런데 막히면 흐르지 못하는 순간부터 고이고 썩고 오염되고 죽음의 강으로 변하게 됩니다. 약타고 보트를 타고 건져내고 별의 별짓을 다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흐르고 흘러 순환되게만 해주면 됩니다.
안좋은 음식을 먹어도 몸에서 다빼내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내 몸에 쌓여있는 겁니다. 음식을 먹으면 영양소도 있지만 독도 있지요. 그래서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서 완전 소화를 하면 건강하데요. 그런데 대부분 완전 소화를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몸에 조금씩 계속 쌓이게 되는 거죠. 근데 영양소만 쌓이는 게 아니라 독도 쌓이는 거죠. 그래서 소식을 하는 사람이 과식을 하는 사람보다 더 건강할 수 있고 운동을 하는 사람이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건강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순환을 시켜서 양분으로 보낼 것 보내고 빼낼 것 빼내면 되는 거니까요.
요즘 요가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사람이 살면서 스트레스를 안받으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받은 스트레스를 그날 저녁에 와서 요가를 하면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산책을 하면서 대화를 하면서 그래 인생 뭐 있어 하면서 다 날려버리거나 순환시켜 내보내버리면 그사람은 건강합니다. 그런데 꽁하고 움직이지도 않고 그 받은 스트레스를 내면화해서 자기를 학대하고 스스로 주눅들어하고 자기 안에 차곡차곡 다 쌓아두면 그게 다 병이 되는 겁니다.
감정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주중에 식사를 하면서 “남이 될 수 있을까”라는 드라마를 본적이 있습니다. 전체 스토리는 모릅니다. 그날 본 부분에 보니까 한 부부가 나오는데 남편이 아이 낳기를 싫어합니다. 아내는 아이를 갖고 싶어합니다. 아이를 낳을까 겁이 나서 바람을 폈다고 속이고는 결국 이혼을 합니다. 그런데 헤어지지 못하고 계속 만납니다. 그러다 어느날 남편이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어릴 때 사랑하는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이뻐하던 여동생이었는데 엄마는 일 나가시고 늘 동생을 돌봐야했기에 친구들하고 놀지를 못합니다. 늘 그게 불만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동생이 자고 있어서 잠깐 친구들과 공차고 들어온다고 나갔는데 그 사이에 동생이 자기를 찾으러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납니다. 평생 자신 때문에 동생이 죽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살아오면서 어머님이 너무 힘들어서 눈물을 흘릴때마다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죄책감과 원망에 갇혀 살아옵니다. 그러다보니 사랑하는 가족을 또 잃을까봐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때의 그 상실이 이 친구에게도 있었을거 아니예요? 그런데 그 상실감에 한번도 눈물을 흘려보거나 슬퍼하거나 애도해본적도 없이 살아온 겁니다. 죄책감 때문에~~~ 이 친구도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겁니다. 그 슬픔을 한번도 위로받아본적이 없는겁니다. 슬픔을 공감받아보기보다는 원망과 죄책감에 시달려 살아온 거죠. 이 친구에게 필요한 건 슬픔에 대한 공감과 애도의 시간인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전 아내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니 잘못이 아니야 니 잘못이 아니야 하면서 동생을 잃은 그 마음에 함께 슬퍼합니다. 이분은 어릴때의 이 트라우마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숨통을 막고 있어서 단 한발자욱도 못나가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약을 먹이고 스트레칭을 하고 등산을 하고 운동을 해도 소용이 없어요. 병의 원인이, 인생의 숨통을 막고 있는 것이 전혀 다른 곳에 있었던 겁니다.
어떤 경우는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도 주변 사람들이 울지말라고 우는 게 아니라고 심지어는 천국가셨는데 왜 우냐고 자기는 너무 힘들고 너무 슬프고 너무나 아픈데 주변에서 우는게 아니라고 그래서 울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슬픔을 참고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터집니다. 슬픔의 감정도 괴로움의 감정도 아픔의 감정도 그 어떤 감정도 충분히 애도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표현해주어야 사람이 삽니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순환되어 힘들고 아프지만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삭개오의 이야기를 설교하면서 삭개오는 참으로 좋은 친구를 만났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삭개오도 살아오면서 자신의 인생이 뭔가 탁 막힌 느낌을 들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뭔가 만질 수있고 채우고 움켜 쥐어야 삶이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모으고 더 열심히 살고 더 열심히 손에 쥐려고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움켜쥐고 모으고 쌓고 아등바등 안쓰면 행복하고 삶의 질도 올라가고 사는 것 같이 살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못했던 거죠. 본문에 보면 삭개오는 뭔가에 갈급했습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고 있었던 겁니다. 다 큰 어른이 나무위에까지 올가갔다는 건 그 만큼 간절했다는 표현입니다.
그가 예수라는 분을 만나고 그와 함께 밥을 먹고 그와 더불어 밤을 지샜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삶에 숨통이 조여오는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남에게 나누어 주는데도 더욱 부유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땅히 쓸 것까지 아끼는데도 가난해지는 사람이 있다” 움켜지면 질수록 행복하고 풍요롭고 그래야하는데 더 빈곤함을 느끼고 더 갈증을 느끼고 더 허기를 느끼고 더 가난을 느꼈던 겁니다. 그의 마지막 결단을 보면 그가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무엇을 깨달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심연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신의 인생의 가장 큰 걸림돌을 재발견한 것입니다.
비폭력 대화법이란 책을 읽다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두운 밤길에서 차키를 잃어버렸는데 안보인다고 어둡다고 환한 가로등 밑에서 차키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차키를 잃어버렸으면 잃어버린 곳에 가서 찾아야하는데 어둡다고 안보인다고 귀찮고 힘들다고 말입니다.
이 나라가 근본부터 흔들리는 건 나라 전체의 살림, 국민이 정의로운 사법질서를 위해 위임한 수사기소권을 다루는 이들이 나라, 공익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사적 복수심, 권력유지에만 혈안이 된 이들을 그 자리에 앉혔기 때문입니다. 의사에게 칼을 쥐어주면 사람을 살리지만 강도에게 칼을 쥐어주면 함부로 살생을 일삼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나치 시대 미친 운전사가 트럭을 몰고 있으면 더 이상 많은 사람을 죽이기 전에 트럭운전사를 트럭에서 끌어내려야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대안적 삶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일과 미친 트럭 운전사의 질주를 막는 일은 그래서 그 경중을 가리기가 힘듭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복권에 당첨이 되도 나를 잃으면 그 모든 자산이 독이 되지만 자신을 잃지 않으면 오히려 삭개오와 같은 부자를 선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삼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봄이 옵니다. 봄다운 봄을 맞이하기 위해 삶의 깊은 곳의 순환을 막고 있는 것들에 그물을 던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