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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언자들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
부활 아침 : 여인들, 빈 무덤, 천사
모든 복음서는 아침 일찍 예수의 무덤으로 간 여인들의 일화로 첫 부활절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여인들은 비어 있는 무덤을 보았고, 무덤가(안)에서 천사(청년)를 만났으며, 이들이 예수의 부활을 전한 최초의 증언자들이 되었다는 것까지, 네 복음서 모두에서 공통입니다. 어떤 복음서로 읽더라도, 여인들과 빈 무덤 서사는 다르지 않으리라고들 생각합니다. 하지만 각각의 빈 무덤 서사는 놀랄 만치 커다란 차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몇 명이었는지, 복음서마다 다릅니다(마태 2명, 마가 3명, 누가 4명 이상, 요한 1명).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이미 돌이 옮겨져 있었는지, 여인들 도착 후에 돌문이 열렸는지(마태)의 사실관계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의 천사 한 명(2, 4절)은 마가복음에서는 청년(젊은 사람, 16:5)으로 표현되고, 누가복음은 두 사람, 요한복음은 두 명의 천사라고 합니다. 이 여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전하는 복음서가 있는 반면에(마태, 요한), 천사를 만남이 전부인 경우도 있습니다(마가, 누가). 마태복음에서 천사는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실 것이다’고 여자들에게 말하고 그대로 되지만(28:15-16), 누가와 요한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이 만나는 장소가 예루살렘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마태복음의 수난 이야기(26-27장)에서, 하나의 예외도 없이 예수를 배반하는 남자 제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상치 못한 여인들의 일화들이 있습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여인은 예수의 발에 귀한 향유 한 옥합을 부음으로써 예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26:6-13). 남자 제자들은 이 여인의 행동을 비난했으나, 예수께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이 기억되리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이후 모든 제자가 예수를 버렸으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때에 그 죽음을 지켜보던 여인들이 있었고(27:55-56), 예수를 매장하고 가장 늦게까지 그 무덤에 남아 있던 여인이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였다고 알려집니다(27:61). 안식일이 지난 첫날 동틀 무렵 예수의 무덤으로 간 바로 그 두 명의 여인이 바로 이들입니다.
이 여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섬기며 따라온 여자들”(27:55)입니다. “섬기다”는 동사 “diakoneo”는, 광야 시험 때에 예수를 수종들던 천사들(4:11), 그리고 병을 고침받고 예수께 수종들던 베드로의 장모(8:15)에게 적용되었던 동사입니다. 이 동사의 명사형은 “섬기는 자(종, diakonos)”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20:26b),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20:11)는 말씀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섬기는 자’로서 무덤에 왔습니다. 추정컨대, 무덤에 나타난 주의 천사 역시 섬김을 위한 존재입니다.
무덤을 지키던 자들(4절)
마태복음에는 유일하게 무덤을 지키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빌라도의 명대로 배치된 경비병들인데(27:62-66), 로마의 군인이 아니라 유대 군인들입니다. 두 여인과 더불어, 이 경비병들은 무덤에서 생겨난 사태를 목격한 증인입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고,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을 막은 굴려 내고 앉은 그 현장에 경비병들도 있었습니다. 이 경비병 중 몇 명은 이후에 자신들이 겪은 일을 대제사장에게 가서 고합니다(28:11). 그리고 그들은 대제사장들로부터 돈을 받고,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예수의 시신을 도둑질해갔다는 말을 퍼뜨리며 다니게 됩니다(11-15절).
빈 무덤에 대한 다른 두 증언
두 여인과 경비병들은 같은 장면을 목도했지만, 다른 증언을 하게 됩니다. 두 여인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언하고,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시신을 가져갔다고 말합니다. 성서는 군인들의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들 가운데 두루 퍼졌다고 부연합니다(15절). 여인들의 말을 믿고 갈릴리에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제자들도 있습니다(16-17절).
명백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라고들 말하지만, 사실상 빈 무덤은 도굴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요20:11-15). 실제로 성서는 빈 무덤을 부활의 증거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은, 빈 무덤을 두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증언과 시신을 도둑맞았다는 서로 다른 증언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증언이 믿을 만한가요? 두 여인과 병사들의 증언 중 어느 말을 진정이라고 인정하렵니까?
증인의 자격
고대의 법정에서 여자들은 증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여자의 말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차별을 제도화한 조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하신 예수를 본 증인들을 열거하는데, 베드로와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를 거쳐, 바울 자신도 이 증인에 포함됩니다(고전15:5-8). 그러나 부활의 아침에 예수의 무덤에 찾아갔던 여인들은 증인의 반열에서 제외됩니다. 여자는 증인의 자격이 없다는 일반적 규범에 따른 결과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증인의 자격이 없으며, 그들의 증언은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반면에, 군인(게다가 여러 명)의 증언은 상당한 신빙성을 인정받습니다. 여자들은 법정의 증인이 될 수도 없지만, 만약 두 증언을 법정에 세운다면 당연히 경비병들의 진술이 채택될 것입니다. 더구나 진실과 관계없이, 권력자들이 군인들의 편입니다. 예수처럼 권력에 위협적인 인물이 부활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까닭이지요. 이대로 음모와 죄악을 묻어버리려는 이들, 현상 유지를 하려는 이들 모두가 병사들의 주장에 가담할 것입니다. 오늘날, 스스로 이성적 혹은 합리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이들과 한 편이 되겠지요.
이런 불리함을 무릅쓰고, 성서는 말합니다. 법정적 증인이 될 수 없는 여인들이 그리스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선택되었다고 말이지요. 이 여인들은 교양을 갖춘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아니라, 갈릴리 출신의 하찮은 여인들입니다. 사흘째 굳건히 무덤 파수를 서던 병사들과는 도무지 견줄 수 없는 이 여인들의 증언으로부터 부활의 진실은 전파됩니다.
큰 지진이 나며 … 천사가 돌을 굴려 내다(2절)
유일하게, 마태복음에서는 여인들이 무덤에 당도한 후에 돌문이 열립니다. 지진이 먼저 있었고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낸 것입니다. 천사에 관하여 다른 복음서들은 흰(찬란한) 옷을 입었다고만 형용하는데, 마태는 “번개 같다”는 표현을 덧붙임으로써(3절), 천사가 돌을 내리쳐 쪼개어버렸다는 인상을 줍니다. 지진과 번개 묘사는 무덤에서 일어난 사태가 아무도 손쓸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일으킨 사건임을 암시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지진이나 번개(천둥)는 하나님 현현에 동반되는 현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진이 단단히 세워진 것들을 뒤흔들고 무너뜨리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과 술수로 쌓아 올린 장벽을 흔들어 무너뜨리십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던 현상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시간에도 있었습니다(27:51). 예수의 죽음은 세상의 거짓된 평화와 은폐된 불의를 뒤흔드는 사건이며, 마침내 부활은 거짓과 불의를 완전히 허무는 사건입니다.
무덤은 주검을 안치한 곳입니다. 거대한 돌로 무덤을 봉쇄하는 이유는 죽음을 승인하고 격리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묻고 은폐하고 감추고 막는 일에 열중합니다. 세상에서는 진리를 막고 불의를 감추고 두려움을 은폐하고 죄악을 묻어버리는 일이 횡행합니다. 예수를 죽임도 그런 시도였고, 예수의 무덤을 봉인함으로써 그 시도는 성공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막아 놓은 죽음의 문을 여십니다. 지진이 나고 큰 바위가 터지듯(27:51), 전격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죽은 한 사람을 되살려내는 기적적인 사건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음모와 불의의 무덤을 여시고 의의 승리를 선언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입니다.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8절) … 경배하니(9절)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말(5-6절)을 들은 여자들은 무서움과 기쁨으로 무덤을 떠납니다(8절).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빈 무덤은 아무것도 아니므로 그곳을 배회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 이상 예수는 무덤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6절). 그런 의미에서 “빨리” 무덤을 떠났다는 표현은 뒤돌아보지도 않았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무덤을 떠나 달음질하는 여자들에게는 목적이 있습니다. 천사가 이른 대로,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 일은 여자들 스스로 정한 과제가 아니라 부여받은 소명입니다. 그 소명에 응답하여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납니다(9절). 이 만남은, 무덤에서의 사건이기보다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현장 속에서의 그리스도와 만남입니다. 여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께서도(10절) 똑같은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증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깨달은 모든 이들에게 일관되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부활 이후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경배”를 받으십니다. 여인들이 “나아가 발을 붙잡고 ‘경배’한”(8절) 것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예수께 경배하는 첫 사례입니다. 뒤에,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제자들도 경배합니다(28:17). 경배(敬拜)는 감히 눈을 들어 바라볼 수 없는 크신 분에게 온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절로서, 머리를 땅에 대는 행동입니다. 경배하다(proskuneo)는 말은 “예배하다”(worship)로 번역되며, 교회가 드리는 주일(부활의 날)의 예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바치는 경배로서, 부활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첫 번째 일입니다.
내 형제들에게 알려라 (10절)
여자들의 경배를 받으신 예수의 답변은 매우 간략하며 선명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평안”(9절)의 기원으로서, 그리스도 현현의 순간마다 수반되는 축복입니다.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 칭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제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를 배반했고, 선생의 죽음을 외면했으며, 지금도 등을 돌리고 숨어 있는 이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내 형제”라고 부른다는 것은 화해의 의미이며 용서의 의지입니다. 제자들의 뉘우침과 사죄가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화해와 용서는 조건 없이 수여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만나심은 조건부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갈릴리로 가십니다(7절).
회복과 용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증언이 지닌 대표적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용서가 시행되었다는 구원 선언입니다. 이 메시지를 전하는 여인들은 부활의 증언자인 동시에, 화해의 대리자이기도 합니다. 증언자의 자격조차 없는 여인들 아닌 여인들의 증언은, 마침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결실되는 씨앗처럼, 강력한 경비병들의 거짓을 뚫고 결국 세상을 덮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우리도 증언자로 보냄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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