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으로 돌아갑시다 (2496)
200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 이선희
찻잔 앞에서 / 이선희
1
이제 그만 엎질러버리고 싶어요 휘저어버리고 싶어요 좀처럼 행굴 수도 없는 목마름, 얼룩처럼 앞치마에 찍혀 있어요 뜨거운 목숨도 아닌데 어쩔 수 없는 꿈도 아닌데 꿈속에서 내가 잠시 기울었다 일어서는 소리 들려요 그 소리 들려요 그 소리 무시로 송곳처럼 쿡쿡 찌르는 아픔알 것 같아요 비어 있는 가슴을 더욱더 긁어대던 더부살이 같은 물살을 알 것 같아요 견고한 언어의 씨앗 다투어 잎 아무는 기척 알 것 같아요 목마른 얼룩 앞치마에 파고드는 저녁나절의 쓸쓸함도 알 것 같아요 내 삶의 그림자였던 보랏빛 실핏줄에 닿던 칼금 지금도 징그럽게 꿈틀거려요 그리움이란 변증법 데리고 꿈틀거려요 나를 떠난 그대는 이미 멀리 있는데 그 무관심도 관심인 듯 짓궂게도 출렁거리는 나 바람이에요
2
비트 아래 엎드린 아이들은 황사바람을 털고 있어요 어딘가에 있을 풀밭을 기웃대며 지나간 시절을 꿈꾸어요 먼 풀밭 너머 장다리꽃 사이로 아직 알을 까지 못한 벌레들은 썩은 밀랍을 게워낸대요 벌레들이 잠든 밀랍의 무덤을 지나 무개차가 지나가지요 풀잎 같은 허리 꺾으며 툭툭 마디 끊어지는 소리 들려요 쇠비름처럼 붉은 길의 줄기를 타고 장다리 꽃이 오고 있어요 종알대는 꽃일이 흔들거여요 무수한 발자국이 파놓은 길바닥을 지나 바람은 가고 장다리꽃 속으로 아이 두엇 종알거리는 소리 들려요 아직도 오지 않는 풀밭을 기웃대는 나를 종알거려요
[심사평] 일상 속 감정 형상화 뛰어나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열다섯 사람의 시를 읽고 먼저 느낀 점은 무언가 서로들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개성있는 시, 남과 다른 생각의 시가 드물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부자연스럽고 말장난이 심한 시들이 많았다.
'자궁'이라는 말은 왜 또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려는 의도로 보이는데, 자연스럽지 못해서 오히려 역겨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동언 장혜림 이선희 세 사람의 시는 읽을만 했다.
신동언의 시 중에서는 팔팔하게 살아 있는 감각이 느껴지는 '점자책을 읽으며'가 가장 재미있게 읽혔다.
하지만 선명하지 못한 대목이 있는 것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이에 비해 장혜림의 '섬'이나 '동해일기'는 지향도 분명하고 힘도 있었으나
완결성이라는 점에 있어 좀 부족했다.
이선희의 시들은
10여 편이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시 공부를 많이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루는 내용들이 엄청나게 야심적이고 새로운 것들은 아니었지만,
아무나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그런 것들은 아니었다.
특히 '찻잔 앞에서'는
우리가 흔히 일상 속에서 느끼는 작은 상실감이나 그리움, 애절함 등을 따스한 시각으로
형상화한 뛰어난 시였다.
균질감도 살만했다.
'바람에게'는 소품이라는 느낌을 주면서도 완성도가 매우 높은 작품으로서,
시란 특별한 소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실을
다시 깨닫게 하는 작품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별로 망설이지 않고 이선희를 당선자로 뽑기로 합의했는데,
'찻잔 앞에서'를 당선작으로 선택한 것은 낮은 목소리로 노래한 일상생활 속의 회한과 아픔,
기쁨이 큰 감동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앞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심사위원 허만하 신경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