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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를 찾아서
마지막 작품 ‘까마귀 나는 밀밭’ 작품의 장소에서 고흐를 생각하면서
전번 유럽여행시는 “별이 빛나는 밤에”
배경인 프랑스 남부“아를과 생 레미”를 찾았다.
그 곳은 고흐가 입원한 정신병원도 있는
곳이며, 고갱과 함께 작품활동을 한 곳이다.
이번 여행에는 파리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고흐의 묘소가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찾았다.
이곳은 고흐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까마귀 나는 밀밭”
과 “오베르 교회” 등의 작품을 남긴
곳이다.
그의 37세 생애를 스스로 마감한
그 곳이기도 하다.
고흐가 머물었던 여인숙 2층방도 보고
우아즈 강변도 찾았다.
점심은 고흐 작품 장소인 그 밀밭
언덕에서 먹었다.
동생 테오에게 생활비를 받아서 생활하여
가난하게 살았고, 시대를 앞서간 천재화가
고흐를 생각하면서 점심을 먹었다.
동생 테오와 함께 나란히 묻쳐있는
묘소에 해바라기 한 송이를 받치고 그곳을
떠났다.
한강 잠실나루에서
김진규
‘까마귀 나는 밀밭’ 작품 안내 표시판
‘까마귀 나는 밀밭’ 작품과 그 밀밭 들넠
고흐를 생각하면서 해바라기 한송이를 받치고
■ 고흐의 삶과 작품활동 시기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고흐 동상
▶고흐의 삶- 작품활동 이전의 시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잔세스칸스 풍차마을
Vincent Van Gogh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 노르트브라반트 주의 준데르트(Zundert)에서 태어나서, 1890년 7월 27일 오베르의 밀밭에서 권총으로 가슴을 관통하는 자살을 감행하였고, 사흘 뒤 7월 29일 세 들어 살던 작은 방에서 37년의 짧은 삶을 마쳤다.
그의 생애는 작품활동을 기준으로 구분하여, 작품활동 이전의 시기와 작품활동을 한 시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작품활동시기는 1881년 12월부터 1890년 7월까지 약 10년 동안이다.
작품활동 시기는 아를 이전 시기, 아를의 시기, 생 레미 시기,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로 구분 힐 수 있다.
고흐는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냈다. 농촌풍경에 익숙한 그는 어릴 때부터 그는 시골을 좋아했다
12살 때인 1865년 준데르트에서 조금 떨어진 체펜베르헨에 있는 프로빌의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1869년까지 3년 동안 다녔다.
1869년 16세 때 헤이그에 있는 숙부가 경영하는 구필 화랑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갔다. 그후 벨기에 브뤼셀에서 근무하다가 1873년에 런던지점으로 옮겨 1975년 5월 까지 근무하였다. 그 다음 1876년 4월까지는 파리의 구필 화랑에서 일했다.
이 시기에 그는 옛 대가들의 작품과 동시대 작품들을 포함해 다양한 장르와 범위의 그림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었다. 그는 곧 렘브란트와 할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는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였고 평생 이 두 화가의 영향을 받았다. 밀레와 코로는 모두 자연을 사랑한 풍경화 화가들이며, 인상주의 풍경화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1874년 런던 태생 아가씨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어두워진다. 인간적 애정을 얻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자 점점 더 고독해졌고 이런 상태는 평생 지속되었다. 영국에서 어학교사 겸 평신도 선교사가 되었고, 1877년 네덜란드의 도르트레흐트에서 책방점원으로 일했다.
고흐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앙심이 깊어, 1878년에 그는 브뤼셀의 신학 교육 과정에 등록하고, 2년 동안 선교사로서 활동했다. 그리고 남서부의 탄광 지역인 보리나주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떠났다. 겨울 이곳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선교 사업에 열중했지만 교회와의 교리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선교활동을 그만두어야 했다.
선교활동을 접은 후, 그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본능적 능력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880년 드디어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다. 반 고흐는 그림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잠재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 프랑스 남부 아를 이전의 시기
1881년 12월부터 시작해 1890년 7월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영혼을 닮은 그림을 그린 고흐였다.
그 중 아를 이전의 작품 활동 시기는 1881년 12월부터 1888년 2월까지를 말한다.
1880년 11월 동생인 테오의 조언을 받아들여, 반 고흐는 브뤼셀 왕립 미술아카데미에서 1학기 동안 미술 공부를 했다. 처음 4년 동안은 기법을 익히면서 오로지 데생과 수채화에만 전념하다시피 했다. 그는 밀레처럼 노동자 계급을 그리는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881년 말 그는 헤이그에 정착하여 네덜란드 풍경화가 안톤 모베와 함께 일했다. 그는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다른 화가들과 자주 만나 기법에 대한 지식을 넓혔으며, 1882년 여름에는 유화를 시도했다. 유화는 서양미술에서 보게되는 대표적이 그림의 형태이다. 재료적 측면에서 볼 때 여러 종류의 기름에 색소를 섞어 갈아서 사용한다.
1883년 네덜란드 북부의 황량한 드렌테 지역으로 떠나 3개월간의 여행이였다. 작가로서 내면의 추구와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그의 머리에 맴도는 것은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농부였다.
1884년과 1885년을 대부분 누에넨(Nuenen)에서 보냈으며, 이시기에 그의 예술은 더욱 대담해지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이시기에 <감자 먹는 사람들>이 제작되었다. 그는 3가지 유형의 주제들인 정물, 풍경, 인물을 그렸다. 이 주제들은 농부의 가난한 일상생활과 그들이 경작하는 들판을 표현했다. '감자먹는 사람들'은 농부에 대한 애정과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었다.
전통적 아카데미 화풍의 원칙에 따르기를 거부했던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던 벨기에 안트워프 아카데미에서 비난받기 일쑤였고, 3개월 뒤 1886년에 느닷없이 안트워프를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갔다.
1886년 파리에서, 고흐는 그의 그림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건 바로 인상파 화가들이었다. 아직 습작에 전념하고 있던 반 고흐는 파리에서 근대 미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들을 만났다. 특히 인상주의 화가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역사화가인 페르낭 코르망의 작업실에서 수련을 쌓으며 에밀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 카미유 피사로 등의 화가들과 까가운 사이가 되었다. 폴 세잔, 폴 고갱, 조르주 쇠라의 작품이 반 고흐의 작품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좀 더 과학적인 방식으로 작업함으로써 발생하는 빛의 효과들을 탐구하며 색채 이론을 연구했다.
이때 고흐도 인상파의 새로운 깨달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히 1887년 6월 빙그 화랑에서 본 일본 그림에 충격을 받아 색채는 점점 밝아지고, 양식도 완전히 변한다.
1886년 봄부터 1888년 2월까지 파리에서 화법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과 붓놀림을 창조해냈다.
2년 뒤 고흐는 각박한 파리 도시생활에 싫증이 나, 좀 더 밝은 하늘 밑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싶은 갈망과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계획으로, 그는 결국 1888년 2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다.
▶ 프랑스 남부 아를의 시기
고흐가 입원한 정신병원인 ‘에스파스 반 고흐의 정원’
그는 아를에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뚜렷한 윤곽과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통하여 주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였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떤 주제가 잡혀면 그것을 포착하기 위하여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열정적으로 일했다. 그가 아를에서 다룬 주제들은 아를의 자연환경과 주변의 풍경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고흐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접근방식이 독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작업은 혼자 해내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다른 여러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인 인상파 집단을 구성하고 싶어 했다. 그는 '남부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바라면서 '노란 집' 1채를 빌려 아름답게 장식했다.
1888년 10월 이곳에 온 고갱과 2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미도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고갱은 고흐보다 5살 위의 연령이였다.1888년 크리스마스 전날에 반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고갱은 떠났고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2주일 뒤에 '노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를 제작했다.
그후 그는 다시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5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프로방스의 생 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가게 되었다.
▶ 생 레미의 시기
고흐가 입원한 생 레미 정신병원
1889년 5월, 반 고흐는 생 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찾아가, 그곳에서 1년간 머물면서 치료를 받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고, 심오한 정신적 의미가 담긴 표현주의적인 작품 <별이 빛나는 밤: 1889>을 그렸고, 또 병원 근처에 있던 작은 숲의 짙은 삼나무와 올리브 나무도 자주 그렸다. 뿐만 아니라 그가 좋아하던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밀레의 그림들을 모사하기도 했다. 이 시기(1889~90)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흥분을 억제 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어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따라서 생 레미 시절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들은 아를 시절의 작품보다 훨씬 대담하고 환상적이다.
그는 네덜란드에 대한 추억을 그리면서 향수에 젖고 고독에 짓눌려 있던 그는 동생 테오와 북부 지방을 보고 싶어서 1890년 5월 파리에 도착했다. 나흘 후, 의사이자 화가이며 피사로와 세잔의 친구인 가셰와 함께 지내기 위해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가세의 환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시기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오베르 교회’
고흐는 1890년 5월부터 7월, 죽기 전 70일 정도를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머무르며 70여점의 작품을 열정적으로 그렸다. 그에게는 그림만이 자신의 절망과 괴로움을 달래 줄 유일한 탈출구였다.
4년전 누에넨을 떠난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시골 마을로 돌아간 그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그곳의 자연환경과 마을 풍경의 그림이 였다. 화풍도 달라졌다. 북부의 햇빛 속에서 그는 옅으면서도 산뜻한 색조를 택했다. 붓놀림은 더욱 폭넓어지고 한결 풍부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다. 자연에 대한 시각은 보다 서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가셰와 벌인 말다툼, 어쩔 수 없이 동생 테오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이 시기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고독은 이겨내거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 그는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다.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 고흐의 흔적이 있는 곳은 고흐의 집, 고흐 공원, 오베르 교회, 고흐의 묘지가 있다.
고흐의 집 (Maison de Van Gogh)은 고흐가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 70일을 보냈던 곳이다. 지금은 고흐 박물관으로 꾸며놓았다. 고흐가 지냈던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그의 방으로 들어가면 아주 좁은 공간이 눈에 띄는데, 이곳에서 짧은 시간 동안 70여점의 작품을 그려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반 고흐 공원 (Parc Van Gogh)은 그의 동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상의 모습이 독특한데, 말년의 고흐 그대로를 대변해 준다. 빼빼 마르고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표정이 당시의 고흐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오베르 교회 (L'église d’Auvers)는 고흐 공원 위쪽 위치해있다. 오베르 교회는 13세기 초 고딕양식의 건물로써 소박하고 정감이 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 또한 그의 작품 〈오베르 교회>의 실제 모델 그 장소이다.
까마귀나는 밀밭 그림 배경인 언덕은 오베르 교회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도 밀밭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고흐의 작품활동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다.
고흐의 무덤은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유명한 화가의 무덤이라 굉장히 화려할 것 같지만 소박한 모습으로 그 곳에 자리하고 있다.
■ 고흐의 작품
(1)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Vincent Van Gogh Museu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 입구 간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신화적인 화가 고흐에게 바쳐진 미술관이다.
1973년에 개관 이후, 해마다 100만 명 이상 찾는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사랑받는 미술관이다.
고흐 미술관은 그의 열정적인 모습, 생동감 넘치는 화필, 강렬한 색채가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유화 200여점과 데생 5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1층에는 19세기 근대 미술사에 한흭을 그은 고갱(Gauguin), 로트렉(Lautrec) 등의 작품과 고흐가 동경하던 밀레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미술관을 볼 때는 아래층에서 위로 올라가며 보는 게 좋으며, 핵심은 고흐의 주요 작품을 모아 놓은 2층이다. 특히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펼쳐진 성경과 꺼진 촛불, 소설책이 있는 정물: 1885 > <까마귀떼 나는 밀밭: 1890>, <해바라기: 1888> <구두: 1886> 등을 눈여겨보는 것이 좋다.
①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시골 농부의 육체노동으로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화푹에 담으려 한 작품이다.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감자로 끼니를 먹는 가난한 농부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누에넨에서 수십번의 반복작업 끝에 그려졌다.
이 그림은 고흐는 거친 손마디를 가진 농촌사람들의 힘든 일상생활의 모습을 그림으로 포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때, 탄관촌에서 전도사 생활을 했던 그는 노동자, 농민에 대한 애정이 많아 그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작품으로 표현했다.
고흐의 초기 작품들이 어두운 색채로 이루어진 것은 밀레의 영향이라고 생각이 든다.
② <구름 낀 하늘 아래의 밀밭: 1890>
어두운 폭풍 속에 있는 밀밭, 무서운 공백감은 불길 이상의 종언의 예고와도 같은 작품이다. 그가 자살을 시도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고흐의 최후 3점의 대작의 하나이다.
③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
이 작품은 고흐가 죽기 이틀 전에 그린 것이다. 까마귀떼가 나는 불길한 기운과 푹풍우 치는 어두운 하늘, 강렬한 황톳빛의 보리밭 풍경을 묘사하고 있어 자살 직전 고흐의 외로움과 절망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2016년 8월 7일에 그곳을 찾아 갈 쓸 때의 나의 느낌은 넓게 펼쳐진 대평원의 평온함과 강력한 햇빛 밀밭은 추수를 하여 밑둥 만이 있었지만 멀리서 까마귀들이 평화스럽게 날고 있었다.
고흐가 7월 29일 사망하기 이틀 전에 그린 작품임으로 밀밭이 추수를 하기 전과 후의 차이점만 있는 거의 동일한 자연 조건이 였다. 그런데 작품에 하늘은 검은 구름과 까마귀떼의 검은 색의 느낌이 불길한 기운과 푹풍우 치는 어두운 하늘의 묘사는 작가의 내면적인 표현이 강하게 부각된 것 같다.
이 그림은 지평선에의 넓은 전망에 대한 그의 잠재의식이 예견한 종말의 의식과 함께, 대지가 폭풍 속에서 바다처럼 사납게 일렁이는 거기에 까마귀가 활개치며 나르는 불안한 화면을 통하여 그는 영혼의 고독과 슬픔을 절규하고 있다.
④ <고흐의 노란집: 1888>
노란집은 고흐가 1888년 5월 아를의 역 가까운 라마르틴 광장에 ‘남부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을 세우기 위한 첫 시도를 위한 집으로, 실제로 10월에 고갱은 고흐의 노란 집으로 와 2개월 가량 함께 생활하였다. 고갱의 마찰에 의해 그의 불행한 비극을 일으킨 것도 이 집이다. 이 그림은 반 고흐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1888년 9월 말에 그린 것이다
강렬한 푸름과 노랑으로 화면을 2등분하여 바깥은 노랑, 속은 흰색으로 되어 큰 방과 작은 방의 두 개를 갖춘 조금만 집이다. 밝은 태양을 만끽하는 평화스러운 시골 마을의 인상을 설득력 있게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⑤ <누에넨 교회: 1884>
누에넨에서 2년 동안 200여점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 그림의 대상은 늘 애정을 가져왔던 가난한 사람들과 누에넨의 풍경이다. 누에넨 교회도 그 중 하나이다.
⑥ <두 여인이 있는 삼나무: 1899>
이 그림은 고흐의 그림 중 가장 두껍게 칠해진 것에 속한다. 그는 굳고 딱딱해진 임파스토를 즐긴듯하다. 이 그림에는 무모할 정도로 정열적인 감정이 표현된 작품이다.
⑦ <아를의 도개교: 1888>
이 도개교는 고흐가 아를에서 발견한 것 중에서 가장 그의 집념을 불러일으킨 모티브된 작품 중 하나이다. 네덜란드에 비하면 밝은 광선에 맑고 푸른 하늘과 물에 둘러싸인 단순한 모양의 다리 조형이 네덜란드에 대한 향수를 그의 마음 속에 불러 일으킨 것이다.
⑧ <슬픔: 1882>
이 그림은 행복을 모르는 한 여성의 포즈다.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묻고 있는 저 여자는 고흐가 사랑한 여자 시엔(Sien)입니다. 헤이그에서 만난 시엔은 슬픔 그 자체의 삶을 살아가는 여자였지만 삶의 고단함을 함께하고 있는 청년 고흐가 사랑했던 여자이다. 고흐는 불행한 사람끼리 서로 짐을 나눠고 살며, 그 불행이 행복으로 바꾸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랑한 여인이 시엔이다.
⑨ <활짝 핀 아몬드 나무: 1890>
고흐가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그의 동생 테오가 보낸 편지글에서 ‘아이가 형처럼 인내와 용기를 가지길 바란다’ 뜻에서 형의 이름을 따서 ‘빈센트 빌렘’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편지를 받고 그가 제일 좋아하는 파란색을 배경으로 큰 꽃이 핀 아몬드 나뭇을 그렸다.
⑩ <구두: 1886>
1886년 3월, 고흐가 아프고 고단했던 네덜란드 생활을 정리하고, 파리로 이사와 작품 활동을 시작할 무렵의 작품이다. 이 구두는 그가 파리의 어느 작은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구두이다.
작품 구두의 너덜너덜해진 검점의 어두운 색깔은 가난한 자들의 삶의 애환을 나타냄과 동시에 자신의 처지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도 어두운 계통이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닳아 삐져나온 신발 도구의 안쪽 어두운 틈새로부터 노동을 하는 발걸음의 힘겨움이 굳어 있다. 이 ‘낡은 구두'가 가지는 의미와 그림을 통해 반 고흐가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을 가장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⑪ <펼쳐진 성경과 꺼진 촛불, 소설책이 있는 정물: 1885 >
<감자 먹는 사람들> <구두>처럼 검정색이 지배적이던 고흐의 초기 작품으로 강한 명암 대비와 두터운 착색을 통해 그가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람브란트는 네덜란드 화가로 명암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화가로 “삼손과 데릴라” 등의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의 꺼진 촛불은 아버지 죽음을 상징하며, 펼쳐진 53장은 그의 아버지가 즐겨 읽던 성경 구절이다. 한때 목사였던 아버지의 삶을 동경하여 탄광촌에서 전도사 활동도 하였다.
실제 이 작품의 진품을 자세히 본 경험은 성경 구절이 좀 멀리서는 작은 글씨로 종이에 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체로는 작은 글씨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말 화가들의 놀라운 표현이라고 만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신기한 일이였다.
⑫ <해바라기: 1888 >
1888년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 아를에 정착한 고흐는 그가 초기 작품에 자주 사용하던 검정색 대신 노란색의 밝은 색으로 많이 사용했다. 이 해바라기 작품 역시 노란색이 지배적이다.
⑬ <종달새가 있는 보리밭: 1887>
⑭ <두사람이 있는 농장: 1890>
⑮ <eine with the Pont de la Grande Jette: 1887>
⑯ <Courtyard of the Hospital of Arles: 1889>
⑰ <the Parsonage at Nuenen: 1885>
⑱ < Skull with cigarette: 1886>
⑲ <Harvest Landscape with Blue cart: 1888>
⑳ <Plowed Field: 1888>
(2) 네덜란드 오텔로의 크뢸러 뮐러 미술관
크뢸러 뮐러 미술관 입구
네델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남동쪽으로 약 한 시간 정도 가면 오텔로(Otterlo) 그곳에는 네델란드 최대 국립공원인 호게 벨뤼베 국립공원이 있고 그 안에 크뢸러 뮐러 미술관이(Kroller-Muller Museum) 있다.
독일 기업가 뮐러(Müller)의 딸 헬레네는 네덜란드 사람 안톤 크뢸러와 결혼한 미술품 수집가이다. 그녀는 고흐의 수집가로서 그녀가 한평생 수집한 미술작품을 1938년에 국가에 기증을 했다. 이 미술관에는 엄청난 양의 고흐의 작품과 모네, 피카소, 쉐라, 쿠르베, 몬드리안 등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들과 현대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① <밤의 카페 테라스: 1888>
이 작품은 푸른 밤공기 속에 가로등 불빛에 비쳐진 카페의 바깥을 그린 것이다. 푸른 하늘과 가로등의 노란색의 대조는 그의 마음속에 일고 있던 갈등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다.
②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Road with Cypresses: 1890>
고흐는 프로방스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 중의 하나인 이 그림을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르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는 프랑스의 ‘메리쿠리우스지’에 고흐에 관한 최초의 진지한 기사를 써서 그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다. 그는 고흐에 대해 이렇게 호평했다. "그는 위대한 화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술과 팔레트, 자신의 성격에 스스로 황홀해지는, 상상과 환상 속에 사는 광신적인 신봉가이다."
③ <Cypresses: 1889>
④ <Enclosed Field with Reaper: 1889>
⑤ <올리브 과수원: 1889>
⑥ <네 송이의 해바라기: 1887>
⑦ <Glaony 부인의 초상화: 1888>
⑧ <올리브 나무: 1889>
⑨ <아를교의 다리: 1888>
⑩ <씨 뿌리는 사람: 1888>
⑪ <영원의 문턱에서: 1890>
⑫ <Stacks of Wheat near a Farmhouse,1888>
⑬ <A Meadow in the Mountains: Le Mas de Saint-Paul, 1889>
⑭ <Landscape with Three Trees and a House,1890>
⑮ <LesAlychamps, Autumn, 1888>
⑯ <Pollard Willow with Setting Sun, 1888>
⑰ <Wheat Field with Reaper and Sun, 1889>
(3) 영국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London National Gallery United Kingdom)
내셔널 갤러리 건물 앞 트라팔가 광장에서
내셔널 갤러리는 영국 런던 트라팔가 스퀘어에 있는 미술관으로 1824년 개관하였다. 66개 전시실의 13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회화 약 2,3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앵그르, 터너, 모네, 르누아르, 고흐, 세잔 등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고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해바라기: 1888> <고흐의 의자: 1888> <두 게(Tow Crabs): 1889>와 같은 유명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① <열네 송이 해바라기: 1888>
이 작품은 고흐와 절친한 사이였던 고갱의 방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그림으로 그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그는 고갱과 함께 하고 싶었다. 긴 설득 끝에 고갱은 아를의 ‘노란 집’에 올 것을 약속했고 반 고흐는 그와 함께 생활할 보금자리를 정성스럽게 꾸미기 시작했다. 평소 해바라기 꽃을 유달리 좋아했던 반 고흐는 그들의 화실을 노란색의 해바라기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고흐는 태양의 색깔을 닮은 해바라기의 노란 빛을 무척 좋아했다. 그는 회화에서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도 꿈꿔왔던 빛라고 했다. <해바라기>란 작품을 살펴보면, 한 화면에 노란색의 해바라기와 대비를 이루는 옅은 녹색을 배경을 배치함으로써 그가 원했던 장식적인 효과를 얻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그림을 그리는 특유의 임파스토(impasto)기법은 화병의 꽃들을 실제 꽃들처럼 생생한 질감을 부여하고 있다.
해바리기를 통해 인간의 삶을 그려 냈다고 한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고개를 떨구고 있는 꽃이 사춘기, 그 위로 활짝 펴있는 꽃은 인생의 전성기, 그 위로 뒤로 머리를 묶은 듯한 모습이 조금씩 늙어가는 것이며, 그 옆의 살짝 보이는 듯한 것은 머리 숱이 없어져가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② <고흐의 의자: 1888 >
고흐의 의자는 비어있는 의자이다. 이는 부재를 의미하는 은유로써 당시 고갱과 헤어진 후의 고흐의 고독감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림 속 의자는 투박한 직선으로 그려졌으며, 그림의 배경도 멋을 부리지 않은 소박함을 보여주고 있다.
③ <두 개(Tow Crabs): 1889 >
④ <Long Grass with Butterflies: 1890>
⑤ <삼나무가 있는 밀밭: 1889>
⑥ <Meadow in the Garden of Saint-Paul Hospital: 1890>
(4)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미타쥐 박물관
에미타쥐 박물관 앞에서
에르미타쥐 박물관은 곧 궁전이며, 미술관이고,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의 기원은 예카테리나 2세가 미술품들을 구입하기 시작했고 수집한 미술품들을 보관하기 위해 겨울 궁전 옆에 별관을 세운 후 그 건물의 이름을 '에르미타쥐' 라고 지었다. 그 때가 1764년에 개인 컬렉션을 겨울궁에 전시한 것에서 비롯된다. 1917년 10월혁명 후에 개인 컬렉션이던 수많은 미술품이 국가에 흡수되고 에미르타주로 이전되면서 수량이 격증하였다.
현재는 원시시대부터 르네상스와 근세에 이르는 작품을 망라하여 루벤스, 렘브란트, 모네, 르느와르, 세잔, 고흐, 피카소, 마티스 등의 회화 16,000여 점과 미켈란젤로와 로댕의 작품을 포함한 조각 12,000여 점과 고대 유물, 보석류와 장식품 등이포함 된 약 300만 점을 보유한 예술품의 보고이다. 규모나 가치로 볼 때 세계 4대 박물관 중 하나에 속한다.
① <아를의 원형경기장: 1888 >
알를에 남아있는 로마의 흔적은 지금도 뚜렷하다. 고흐는 이곳에서 원형경기장을 모델로 한 그림이다. 한복판에 자리한 원형극장은 BC 1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약 1만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원형경기장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로마의 원형경기장 중에서는 콜로세움 다음으로 규모가 큰 것이라고 한다.
② <에덴 동산의 추억: 1888 >
에덴 동산의 추억이라고 하는 이 그림은 1888년 고향의 향수에 사로잡혀 고흐의 과거 기억에 의존하여 그린 작품이며, 작품 중 앞쪽에 두 명의 여인은 그의 어머니와 누이 빌이라고 한다. 그림을 그릴 당시 반 고흐는 자신이 원하는 화가 공동체는 단지 이상향이라는 것을 깨달고 그로 인한 좌절된 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색감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자신의 개성이 뚜렷한 그들은 미술 경향에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반 고흐는 자연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직접 보고 그리는 데에 관심이 있었으나 고갱은 기억에 의존해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아를에 머무는 동안 고갱은 반 고흐에게 상상의 세계를 그려볼 것을 제안했다. 반 고흐는 고갱의 화풍을 전적으로 수용하진 않았지만 아를 시기의 몇몇 작품에서 이를 반영했다. 그 중하나가 <에덴 동산의 추억>이다.
③ <아를에서 산책: 1888>
④ <오막살이: 1890 >
⑤ <라일락: 1889>
(5)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메트로풀리탄 미술관 전경
뉴욕시 중심부 센트럴파크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미국의 최대 미술관이다. 영국의 대영 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러시아 상트 페테르 부드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4대 박물관에 속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고흐의 작품은 <싸이프러스 나무> <삼나무가 있는 보리밭> <고흐 자화상>등이 있다.
① <싸이프러스 나무: 1889>
1889년 5월부터 일년 가까이 생 레미(Saint-Remy)의 정신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그린 그림이다. 타오르듯 요동하며 무성하게 깔린 들의 풀들, 불꽃 모양을 하고 하늘을 치솟는 올리브색의 측백나무, 휘몰아치는 대기의 하늘, 기묘한 형태의 구름과 황금빛의 밀밭과 하늘 특히 오를 뜻한 사이프러스 나무가 인상적이다. 이는 후기인상파에서 물체의 형태가 변형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아를에서 생 레미로 옮겨간 고흐는 그 곳에서 아를 시대와는 다른 조화와 성숙을 달성하고 있다.
해를 쫓아다니는 해바라기에 공감 의식을 가졌던 그가 생 레미에서는 힘찬 성장력을 가지고 하늘 속을 뚫고 오르는 측백나무를 주제로 열중하고 있다. 얼피보면 그는 격렬한 사나이로만 보이나, 그것은 그의 일면일 뿐, 이 작품이 갖는 안정감 ,섬세함, 조화, 억제는 또 다른 일면으로 부각된다.
② <Self- Portrait with a Straw Hat: 1887>
고흐는 파리에 체류기간 동안 20여개의 자화상을 그렸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그가 자신이 직접 모델이 되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어두웠던 그의 그림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고흐식의 고집해온 그림 스타일이 자리를 잡아간다. 오랜 반복과 시행착오 끝에 고흐는 그만의 색깔을 찾은 것이다. 점점 빛나기 시작한 그의 그림, 그리고 막 폭발할거 같은 그의 광기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아를에서 그 절정을 만난다.
③ <삼나무가 있는 밀밭: 1889>
④ <아를의 여인: 지누부인: 1888>
⑤ <아이리스: 1890>
(6) 미국 뉴욕의 현대 미술관
뉴욕 현대 미술관
메트로폴리탄이 미술관이 선사시대에서 현대까지의 종합미술관이라면, 현대미술관은 현대 미술만을 집중해서 전시해 놓은 곳이다. 1929년 리리 블리스, 애비 록펠러, 메리 설리번 등 당대 최고 부호의 부인과 딸들이 중심이 되어 ‘현대 미술을 미국에 알리려는’ 목적으로 개관한 미술관이다.
1층에는 외부에 꾸며진 애비 록펠러 조각공원이 있고, 이곳에 로댕, 피카소, 헨리모어, 마디스 등의 작품이 있다. 2층에는 세잔, 고흐, 고갱 등의 후기 인상파에서부터 초현실주의까지 화가작품이 소개되어 있다. 3층에는 1940년부터 1960년까지의 회화와 1960년대의 팝 아트(Pop Art)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고흐의 작품으로는 <별이 빛나는 밤> <반 고흐의 조셉 룰랭 초상화> <고흐의 올리브 나무>가 있고,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전시되어 있다.
① <별이 빛나는 밤에: 1889>
이 작품은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가 고갱과 다툰 뒤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이후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요양하던 중에 창밖으로 보이는 마을 풍경을 그린 것이다. 고흐에게 밤하늘은 무한함을 표현하는 대상이 되었다.
생 레미 마을은 약간 높은 지점에서 내려 다 보인다. 왼쪽 전경에 높이 솟아 있는 삼나무와 중경 중앙에 있는 교회의 첨탑과 대조가 교묘하게 넓은 공간을 나타내며, 그 건너편에 멀리 언덕이 보인다. 하늘에는 달과 수많은 별들이 거대한 빛을 발하고 있고 꿈틀거리는 성운과 같은 것의 엉킴이 화면 전체에 비현실적인 장대한 운동감을 부여해 준다.
비연속적이고 동적인 터치로 그려진 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불꽃같은 사이프러스와 연결되고, 그 아래의 마을은 대조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하다. 마을은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고안되었는데, 교회 첨탑은 반 고흐의 고향 네덜란드를 연상시킨다. 그는 병실 밖으로 내다보이는 밤 풍경을 기억과 상상을 결합시켜 그렸는데, 이는 자연에 대한 반 고흐의 내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을 구현하고 있다.
화면은 녹색과 파란색이 주조가 되어 무거우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주는데 반해 필치는 더욱 격렬하고 충동적인 붓질로 표현주의적 성격을 더해간다. 특히 터치에 의한 동적인 화면은 그의 그림을 대표적은 특성으로 고흐 자신을 치열한 예술가로서의 삶과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의 생명이 녹아 흐르는 것 같다.
화면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하늘에서는 노락색과 흰색의 달과 별이 광휘를 뿜어내고 있으며 그 사이를 굵은 터치가 소용돌이를 이루며 내달린다. 고흐의 심리적 상태가 잘 반영 되었다고 보이는 이 작품은 병적 심리나 내면적 드리마의 표출이라는 면에서 20세기 표현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② <반고흐의 조셉 룰랭 초상화: 1888>
반 고흐는 1888년에 아를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그는 룰랭이라는 우편 배달부를 알게 되었다. 그는 그 후에 고흐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초기의 작품과는 전혀 딴판일 정도로, 프로방스의 햇빛을 받고 빛나는 고흐의 그림은 그 색채와 유동적인 화법에 의해서 용트림 하는 듯한 강렬한 율동을 보이고 있다.
③ <고흐의 오리브 나무: 1889>
(7)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앞 광장과 고흐 특별점 포스트
오르세 미술관은 오를레앙 철도의 종착역이었는데 철도의 전동화에 따라 운행이 중단되면서 이후 건물의 용도를 다양하게 바꾸어, 호텔이나 극장 등으로도 이용하였고, 한때 철거될 위기에도 처했다가 1986년 국립 주드 폼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던 작품들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오르세 미술관으로 태어났다. 자연물의 유기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아르누보 양식의 웅장한 건물인 오르세 미술관은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해 건축가 빅토 르라루(Victor Laloux)에 의해 만들어진 철도역이었다.
주로 1848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14년까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이 유명하고, 아카데미즘 회화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사진, 그래픽 아트, 가구, 공예품 등 19세기의 예술 작품을 폭넓게 전시하고 있으며, 5층의 야외 테라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에펠탑을 비롯한 파리의 전경 매우 아름답다.
① <고흐의 방: 1889>
1888년 아를 시절의 그림으로 자신이 기거하고 있던 방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놓았다. 커다란 침대와 낡은 의자, 탁자 등 변변한 살림하나 없지만 처음으로 안정된 공간을 가진 화가의 기쁨이 있는 곳으로 표현되어있다.
또한 이곳을 마련해 준 동생 테오에게 따뜻하고 밝은 색상으로 고마움 마음을 나타낸 작품이다. 그림의 위쪽에 조그만히 보이는 초상화는 바로 그와 동생 테오의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 원근법의 새로운 시도를 엿 볼 수 있다.
② <로노강의 별이 빛나는 밤: 1888>
고흐는 아를에 도착하자마자 밤의 아름다움을 몇 번이나 그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가 겨우 밤의 그림에 착수한 것은 9월이 되고서 였다. 이 지방의 별이 가장 아름다운 달은 9월이며, 그는 촛불을 그의 모자 위에 세우고 밤경치를 그렸다고 한다.
두 사람의 연인을 전경에 두고 국화꽃이 활짝 피듯, 강물에 비친 불빛의 그림자가 길게 리듬을 그리는 이 한 폭의 아름다운 야상곡은, 섬세한 가락으로 놀랄 만큼 정서에 넘쳐 있다.
③ <오베르의 교회: 1890>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후 살았던 작은 마을 오베르 쉬르 우와즈에 있는 교회를 그린 것이다. 거친 밀밭 사이로 꼬불거리는 길과 짙푸른 하늘은 깊은 가을 정서와 불안한 고흐의 심리를 잘 나타낸다.
④ <정오의 휴식: 1890>
이 평화스러운 이미지의 작품은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모방한 작품 있다. 자신들이 쌓아
올린 낟가리의 그림자 밑에서 휴식을 취하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는 긴장된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 다채롭게 표현되었다. 남자는 신발을 벗어놓고 나란히 놓인 두개의 낫은 부부의 친밀성을 말해준다.
⑤ <닥테 가셰: 1890>
가셰 박사는 고흐의 주치의사이며, 인상주의 화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단조롭게 채색된 파란색 바탕에 역동적인 터치로 생기를 불어넣고 두드러진 색을 사용하였다. 가쉐 박사를 모델로 그는 한 선량한 사람에게 느끼는 호의를 담은 뛰어난 초상화를 남겼다.
⑥ <자화상: 1889>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고 있는 자화상은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의 작품이다. 그가 남긴 몇몇 자화상 중에서 가장 결연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려고 한 비장한 결심이 엿보인다.
거의 단색으로 느껴질 정도의 청록 필선으로 그려진데다. 붉은 수염과 밤색 머리카락에 둘러싸인 볼이 움푹 팬 고흐의 얼굴이 집요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는 눈과 꼭 다문 입술에 고흐의 정신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⑦ <아를의 무도회장: 1888>
아를의 무도회장의 그림은 고흐와 고갱이 공동 작업을 재개하면서 며칠 사이 두 점의 걸작을 완성했다. 반 고흐의 <아를의 무도회장>과 고갱의 <아를의 늙은 여인들>이 바로 그것이다.
반 고흐는 각양각색의 의상을 입고 서로 촘촘하게 뒤얽혀 있는 군중의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포화 상태의 느낌을 아주 능숙하게 표현해 냈다. 특히 검은색 윤곽선을 사용하여, 그림 중앙부분에 노랑이 섞인 녹색과 진한 빨강의 만남이 너무 화려해 보이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고흐와 고갱은 서로의 의심스러운 감정을 떨쳐 버리기 위해 12월16일과 17일에 몽펠리에의 파르브 미술관으로 여행을 갔다. 그들은 이곳에서 브뤼야스의 초상화 등의 작품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는데, 예술에 대한 극심한 의견차를 보이며 대립했고, 이로 인해 고갱은 반 고흐와의 결별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⑧ <몽마르트의 카페 데라스: 1886>
⑨ <Pine Trees with Figure in the Garden of Saint-Paul Hospital, 1889>
(8) 그밖의 작품들
① <아를의 햇볕: 1888, 시카고 미술관>
고흐는 급속하게 쇠약해지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아를로 옮겼는데 이 아를시기가 이 화가의 생애의 절정이었다. ‘아를의 햇볕’의 작품은 공원이라는 현실적인 대상을 보고 그린 것이고, 또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생성과 생동의 신비 그리고 격렬하고 극도로 표출적이 그 양식도 거의 완성의 영역에 달했으며 마지막 해에는 색체 분할과 선묘로 인상주의 기법과 그가 그때까지 품어왔던 비전이 총괄적인 조화점에 이르렀다.
② <계류: 1889, 보스턴 미술관>
고흐의 그림 가운데서 가장 빼어나고 또 널리 알려져 있는 몇 작품은 아를에서 몇 마일 떨어진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보낸 수개월 동안에 그려졌다. 이 그림은 그러한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자연에 대한 작가의 충동적인 정서적 감흥이 최대한으로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1889년의 어느날, 차디찬 계절풍이 부는 속에서 하루 동안에 완성된 것이다.
고흐의 특성인 자르는 듯한 터치의 기복을 이루는 선으로 표현된 바위, 길, 냇물 등이 화면 전체에 일관된 운동감을 거부하고 있다. 정신적 평형을 잃고 병원에 갇혀 있을 동안에 그려진 것들이 오히려 차분하고 정리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③ <파이프를 문 귀를 자른 자화상: 1889,시카고 미술관>
강열한 적색과 황색에서 무서운 광기가 느껴진다. 고흐 자신의 귀를 자른 뒤 곧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2년 뒤인 1890년 권총자살로 37살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④ <귀를 자른 자화상: 1889, 런던 커톨드 미술관>
고흐는 자해 사건 이후 귀에 붕대를 감은 자신의 모습을 두 점의 자화상에 담았다. 그 중 하나인 이 그림은 다른 것에 비해 더 미묘하고 성찰적인 느낌이다. 발병 후 2주가 지나 그린 이 그림은 차분하고도 기품있는 고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이 이미지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⑤ <고갱에게 바친 자화상: 1888, 포그 미술관, 하버드 대학교 부설 미술관>
고흐는 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당시 그의 내면생활을 읽을 수 있게 솔직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자화상은 고흐 자신이 아를 시대 초기의 안정을 깨뜨리고 평형을 잃은 흔적이 짧은 머리칼과 예리한 시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⑥ <붉은 포도밭: 1888, 모스크바 푸쉬킨 미술관>
강렬한 태양아래 포도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작품성이 그리 크지 않으나 고흐 생전에 팔았던 유일한 그림이라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단돈 400 프랑이였다. 이 그림을 구입한 사람은 당시 인상주의 여류화가였던 안나 보쉬이다.
⑦ <삼나무가 있는 밀밭: 1889. 런던 국립 갤러리>
아를에서 생 레미로 옮겨간 고흐는 그곳에서 아를시대와는 다른 조화와 성숙을 달성하고 있다. ‘삼나무가 있는 보리밭’도 그 중 하나의 작품이다. 타오르듯 요동하며 무성하게 깔린 들의 풀들, 불꽃 모양으로 하늘을 치솟는 올리브색의 측백나무, 휘몰아치는 대기의 하늘, 그러나 화사하게 서로 어울리는 해조의 색채가 억제된 색조에 의하여 지극히 조용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해를 쫓아다니는 해바라기에 공감 의식을 가졌던 고흐는 생 레미에서는 힘찬 생장력을 가지고 하늘 속을 뚫고 오르는 측백나무를 주제로 열중하고 있다.
⑧ <아이리스(붓꽃): 1889, 캘리포니아 게티 미술관>
이 그림은 아를 주민들의 비난을 피해 요양원에 와서 안정을 얻게 된 고흐의 푸근한 마음을 표현한다.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정원에서 제작했다. 금잔화가 붓꽃의 행진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이 그림은 마치 기념식에 참가한 군중들 같은 생동감을 준다. 색채는 본능적으로 통제되어 있다. 고흐의 격렬한 감정은 정교하게 관찰한 실제 꽃의 느낌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⑨ <자화상: 1887,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고흐는 파리에서 거의 30점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작가 얼굴과 저고리의 부서진 듯한 색채, 특히 배경의 '점들'은 쇠라에 대한 그의 동경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⑩ <Landscape with carriage and train: 1890, 퓨스킨 미술관 , 모스크바>
⑪ <생트 마리 바다 위의 보트: 1888, 퓨스킨 미술관, 모스크바>
⑫ <두 사람이 있는 오베르의 거리와 계단: 1890, 일본 히로시마 미술관>
⑬ <오베르의 거리: 1890, Helsinki,Atheneumin Taidemuseo Finland>
⑭ <오베르의 집: 1890, Boston,Museum of Fine Arts United States>
⑮ <Landscapeat saint-remy: 1889, Indianapolis Museum of Art>
⑯ <우체부 조셉 룰랭 초상화: 1888, 보스톤 미술관>
⑰ <Vegetable Garden in Montmartre: 1887, Stedelijk Museum, Amsterdam>
⑱ < Portrait of pepe Tangny: 1887, Musee Rodin, Paris>
⑲ < The Night cafe: 1888, Yale university art gallery>
⑳ < Self- Portrait: dedicated to paul Gauguin: 1888,
Harvard university Art Museu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