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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심정자 문학 서재 원문보기 글쓴이: 가은
아르망 피에르 페르낭데즈(Armand Pierre Fernandez) 작 "모두를 위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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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림 시집「바람개비별」
치명적인 외로움, 비소砒素 같은 詩
마경덕
「내 마음의 협궤열차」이후 십년 만에 출간한 이가림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바람개비별」을 읽는 동안 내내 비가 내렸다. 사나흘 별은 뜨지 않고 40년 묵은 뒷마당 호두나무는 허공으로 키를 높이 들어 올렸다. 오후 2시, 무성한 그림자를 발아래 내려놓을 시간,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파랗게 젖은 허공이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내렸다. 나무는 그 무거운 그림자를 어디에 숨겼을까?
무릇 그림자는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보는 것. 빛이 없으면 눈을 뜨고도 볼 수 없는 것이 그림자였다. 호두나무가 이파리마다 담아둔 향기는 무심한 마음에는 닿지 않는 고요한 향기여서, 나무그늘에서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켜는 것처럼 멀고 아득해서 손이 닿지 않는 것들은 모두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지구에서 4,800광년 떨어진 곳에 있다는 바람개비별, 1998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대 연구팀이 하와이에 있는 지름 10m짜리 케크 천체망원경으로 발견하였다. 1광년은 초당 30만Km의 속도의 빛이 1년 뒤에나 닿는 거리라하니 상상을 초월하는 까마득한 거리이다. 태양보다 25배 무겁고 10만 배가 더 밝다는 그 별은 2개월 뒤에 촬영해보니 바람개비 돌듯 모습이 바뀌었다고 한다. 누가 그 거대한 별을 바람개비 돌리듯 돌릴 수 있었을까?
과학의 힘으로 드러난 불가사의한 바람개비별의 존재,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분명 실존하는 별이다. 어쩌면 영원히 묻혀버렸을 그 별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순간, 바람개비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가슴에서 빛나게 되었다. 인간의 끝없는 호기심이 숨은 별을 발견하듯 우주와의 교감을 원하는 시인의 상상력으로「바람개비별」은 다시 태어났다. 날개가 있어도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바람개비는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으로 가동되는 것이다. 자연과 사물에 대한 시인의 남다른 애정이「바람개비별」을 지상으로 데려와 많은 사람의 가슴에 걸어두었다.
그때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영영 당신이라는 존재를 모를 수도 있는 일, 이가림 시인은 바람개비별 같은 인연을 생 라자르역 광장에 세워놓는다.
우리가 헤어진 건 생라자르역 광장, 아르망 페르낭데즈의 조각 <모두를 위한 시간> 앞에서였지. 여느 때처럼 “다음 주 토요일 정오에 여기서 만납시다” 라고 약속을 하고 무심히 헤어졌었지. 하지만 그게 영원히 다시 못 볼 삼도내의 작별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운명의 시침時針이 너무 빨리 가는 시계를 찬 그대와 우연의 시침이 너무 늦게 가는 시계를 찬 내가 물의 도시 도빌행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한 건 몇억 광년의 세월 속에서 일어난 불가사의한 기적중의 기적이었지.
어느 낯선 거리 건널목에선가, 발을 헛디디는 아주 사소한 실수로 오토바이에 치여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는 어처구니없는 우발사라도 그대에게 일어났던 것일까. 그날 이래 우리의 시계판은 납땜질 된 채 운행을 멈춰버리고 말았지. 되돌아올 길 없는 망각의 나락에 떨어진 그대는 아르망 페르낭데즈의 <모두를 위한 시간> 앞에 다시 올 수 없었고, 그것으로 우린 영영 엇갈린 행로를 밟을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심술궂은 시간의 신神의 질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린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았고, 다만 눈동자와 머리카락 빛깔과 목소리의 억양을 아는 것으로 이미 다정한 연인이 되어버렸지.
비록 지금 그대의 이름을 알지 못해 부를 수 없다 해도, 그대의 눈빛과 웃음소리와 머리칼 향기를 기억하는 한, 그대는 내 안에 생생히 살아 있고, 그대 안에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오.
우린 '안녕히'란 차디찬 작별의 말을 입으로 말한 적이 없으므로 결코 헤어진 것이 아니오.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지만 누구도 틀린 것이 아닌 아르망 페르낭데즈의 <모두를 위한 시간> 앞에서 난 기어이 오고야 말 이 세상의 기적의 순간을 한사코 기다릴 것이오.
-「투병통신投甁通信․2」전문
광장이란 많은 사람이 모이는 넓은 빈터,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곳이다. 그곳에서 만난 한 사람과의 인연은 마치 바람개비별을 발견한 것처럼 불가사의하고 기적적인 일이었다. ‘세상’이라는 광장에서 만난 사랑은 절대적 운명이었다.
파리 생라자르역 앞에 우뚝 서있는 <모두를 위한 시간> 은 아르망이 크고 작은 벽시계로 탑을 세운 작품이다. 벽시계가 뒤엉킨 <모두를 위한 시간>은 각양각색의 멈춰버린 시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바늘은 누군가 쓰다버린 시간들이며 기억이 정지된 순간 심장이 멎어버린 시간들이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시공을 초월한 영원으로 이어지는 시간일 수도 있겠다.
프랑스 신사실주의 선구자 아르망 피에르 페르낭데즈(Armand Pierre Fernandez)는 사물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아상블라주(assemblage) 기법'과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연속적으로 쌓아올리는 '집적(accumulation) 기법'을 사용, 도시인의 생활을 작품 속에 반영하는 프랑스 조각가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들, 악기 가구 자동차 시계 구두 톱, 틀니 등 물체를 반복해서 늘어뜨리거나 해체시켜 쌓는 방법으로 그 물체가 가진 원래 쓰임새나 성격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데 그 힘은 가히 사납고 폭력적이다. 일상에서 소비되는 물체들을 빽빽하게 쌓아 과소비가 넘치는 고도의 물질문명에 대한 경고를 서슴지 않는다. 쉽게 폐기처분되는 물건을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을 비판하고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역, 광장은 기쁨과 슬픔이 시계바늘처럼 교차하는 곳. 시계들이 엉켜있는 모습에서 한 치의 여백도 없이 아옹다옹 등을 떠미는 현시대의 자화상과 희비(喜悲)에 뒤엉켜 흘러가는 세상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인파가 몰려들고 밀려가는 역 광장, 시침과 분침이 만나는 때, 하나가 되는 지점을 인연이라고 불러도 무리는 없겠다. 파리 생라자르역 광장 앞 <모두를 위한 시간>을 택한 이유도 어쩌면 그 이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모두 다 바쁘게 흘러가고 흘러가는 광장에서 유독 혼자만 느리게 걷는 이가림 시인.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돌의 언어」로 가작으로 입선,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빙하기」가 당선되었으니 어림잡아 시력 40년이 넘는 이가림 시인의 행보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걷는 것이다.「갓길에 앉아서」라는 시편에서도 시인이 걷고자 하는 보폭을 보여준다.「내 마음의 협궤열차」이후 십년 터울로 태어난「바람개비별」은 빠르게 달려가는 이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시인의 품에 맞게 욕심 없이 걸어왔다. 절제된 언어를 고르고 그 언어가 발효되기 까지 신중하고 진중하게 기다린 것이다. 오랜 침묵을「바람개비별」이라는 시집에 공들여 담았다. 시인은 말을 아끼는 사람이지 말을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가림 시인은 “진실의 과녁을 정확히 꿰뚫기 위해 언어의 탄환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으려고 아무것에나 쉽사리 방아쇠를 당기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경림 시인 역시 추천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역설 같지만 이가림의 시인의 시는 말이 끝나는데서 시작되는 것 같다. 누항의 모든 말들이 진실에 다가서지 못하여 마침내 침묵할 때, 비로소 그의 시는 시작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외롭지만 아름답고 쓸쓸하지만 눈부시다. 모든 시들이 온통 저자거리에 나앉아 “날 좀 보소”와 “싸구려”를 외치는 판에 그만이 말을 아끼고 진실을 찾는 시의 정도를 걷고 있어 그의 시가 더욱 빛나는 대목도 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시가 무엇이며 무슨 일을 하는가를 호소력 있게 말해주는 것이 이가림의 시들이다.”
생략함으로 더 많은 말을 하는 시, 말이 끝나는 데서 시작하는 시는 상상력을 확대시켜 파장이 크다는 것. 침묵함으로 더 많은 이미지를 파생시키고 감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시란 이런 것이 아닌가. 언제부턴가 말을 아끼고 진실을 찾는 시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시들이 수다스럽고 어지럽다. 때로는 황당해서 무슨 암호를 풀듯 시를 해독해야 할 때도 있다. 너도 나도 목청을 높이고 시를 장식하는데 시인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았다. 간결하고 나지막한 어조에 비장미(悲壯美)가 흐르는「투병통신投甁通信․2」는 함부로 사랑을 남발하고 기다림을 모르는 성급한 이 시대의 사랑법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기실 막막한 기다림이란 그만큼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것,「투병통신投甁通信․1」에서 보여주는 절망감이란 뼈가 시리는 슬픔이다.
이제
내 비소砒素 같은 그리움을
천년 종이에 싸
빈 술병에 넣어
달빛 인광燐光 무수히 떠내려가는
달래강에 멀리 던진다
먼 훗날
부질없이 강가를 서성이는 이 있어
이 병을 건져 올릴지라도
그때엔 벌써
글자들이 물에 씻겨
사라져 버렸을 것을 믿는다
끝내 말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영원히 숨 쉬는 것
이제
내 비소 같은 그리움을
천년 종이에 싸
빈 술병에 넣어
일찍이 미친 사내 하나 빠져 죽은
달래강에 멀리 던진다
-「투병통신投甁通信․1」전문
원소기호 As로 표기되는 비소(砒素)는 구리나 납 아연 등의 금속을 제련할 때 생기는 부산물이다. 비소화합물은 방부제 살충제 매독 치료에도 사용된다. 중독이 되면 죽음에 까지 이른다는 독성이 강한 물질이다. 그리움이 얼마나 깊어 비소 같은 그리움인가. 끝내 말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영원히 숨 쉬는 것이라니 썩지 않는 천년 종이에 싸서 빈병에 넣어 던져보면 훗날 이루지 못한 사랑을 누군가 기억해줄까. 그렇다면 시인은 그리움을 시로 적어 세상에 던져두고 천년이나 썩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데, 그때는 글자들이 물에 씻겨 사라져 버렸을 것을 ‘믿는다’고 한다. ‘믿는다’는 ‘믿고 싶지 않다’로 읽어도 될 것이다.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하는 그리움으로 사모한 것들이 시집이라는 천년종이에 싸여 세상으로 던져지기 까지 일찍이 시에 미쳐 비워낸 술병은 얼마이며 달래강에 빠져죽은 적이 몇 번이던가. 시인에게 詩는 목숨과 같은 것,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불멸의 사랑이다. 참으로 절실한 그리움이다. ‘바람개비별’을 그리워하듯 시를 향한 고백은「바람개비별․4 -마음의 귀」와「바람개비별․5」에서 절정을 이룬다.
저 포산包山 남쪽에 사는 관기觀機가
불현듯 도성道成을 보고 싶어 하면
그 간절함
바람으로 불어 가
산등성이 떡갈나무들이 북쪽으로 휘이고
도성 또한 관기를 보고 싶어 하면
그 기다림
바람으로 불어 가
산등성이 상수리나무들이 남쪽으로 휘이는 것
옛적에 벌써
우리 서로 보았는가
내가 보내는 세찬 기별에
그대 사는 집의 처마 끝이나
그 여린 창문이 마구 흔들리는
뜨거운 연통관連通管이 분명 뚫려 있어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달려가는
내 눈먼 굴렁쇠여!
-「바람개비별․4 - 마음의 귀」부분
「바람개비별․4」에는 ‘마음의 귀’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마음을 열어두면 멀리 있는 마음도 이심전심 통한다는 것이다. 간절함은 진실의 과녁을 통과한다고 했던가. 삼국유사 포산이성(包山二聖)에 실린 관기와 도성, 두 성사(聖師)의 삶에 관한 설화를 끌어들인 초자연적 신령한 세계를 다룬 작품이다. 시와 시인으로 연결된 팽팽한 고리를 관기와 도성의 관계처럼 읽었다. 서로 간절히 원하는 연인처럼 늘 연가를 들려주어야 시와 시인의 관계는 지속된다.
어찌하여
그대에게만 닿으면
내 안의 화약통
그 뇌관이 꽃불로 터지는지
나는 모르겠네
그대가 아래서 춤추고
내가 위에서 춤추는
캄캄한 태극太極의 대낮이었다가
그대가 위에서 춤추고
내가 아래서 춤추는
눈부신 무극無極의 밤이었다가
입으로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 뱀같이
둥그런 하나의 고리가 되는지
-「바람개비별․5」부분
시인에게는 시에게 연결된 도화선이 있다. 영감(靈感)에 불이 붙는 순간 뇌관은 충격에 의해 시의 화약통이 터지는 것인데, 그 불꽃이 꽃불처럼 아름답다. 시와 시인이 한 몸이 되어 캄캄한 태극(太極)의 대낮이었다가 눈부신 무극(無極)의 밤이 된다니 시에 빠지면 누구나 무아지경(無我之境)이 되어 뜬눈으로 밤을 보낸다. 마치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뱀처럼 제 피를 뽑아 시를 쓰는 격이다.
우로보로스는 고대의 상징으로 커다란 뱀 또는 용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삼키는 형상으로 원형을 이룬다. ‘시작’이 곧 ‘끝’이라는 의미를 지녀 윤회사상 또는 영원성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왔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잠재 에너지라는 의미로서 '쿤달리니'와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끝없이 회전을 되풀이하는 圓은 ‘탄생’과 ‘죽음’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시간’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뱀의 탈피 행동을 ‘낡은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육체를 얻었다’고 믿었다. 불사신이라는 생각이 발전하여 우로보로스가 생겨난 것이라 한다. 시와 시인은 마치 물고 물리는 관계로 둥글게 한 몸이다. 시인은 시에게 묻는다. “어찌하여 그대에게만 닿으면 뇌관이 꽃불로 터지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시인에게 시만큼 뜨거운 것이 있을까. 좋은 시를 발견했을 때의 흥분과 기쁨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시가 가진 魔力이니 어찌하랴. 시인은 제 살과 피를 내주고서라도 그 시를 얻어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났으니 그것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형벌인 것이다.
시인이「바람개비별」을 그리워하듯 어디엔가 매장된 수많은 시들도 누군가 발굴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새벽이 오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어둠처럼 시는 어디에선가 모여 있을 것이다. 저녁은 부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어슬렁어슬렁 나타나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
간절히 부르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그만큼 진심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니 절대적 교감이 필요한 것이다. 프랑스 문학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한 불문학자이며 미술에도 조예가 깊다는 이가림 시인, 무엇보다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다. 그 눈빛에 교감이 오가고 진심이 묻어있어 편 편마다 감동을 안겨준다.
「공중 채마밭」「귀가, 내 가장 먼 여행․1」「매미를 위한 변명」「이외출씨의 하루」「이사」「35평방미터의 고독․4 -딱따구리」등에서는 도시에서 느끼는 메마름을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문명이 주는 편리함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근본적인 고독을 무엇으로 메울까. 새소리 물소리 흙냄새를 그리워하는 것은 비단 시인이라서 만은 아닐 것이다. 이가림 시인이 「바람개비별」에서 보여준 시의 결기는 부드럽지만 힘차다. 십년 만에 꺼내 든 시인의 悲歌集, 오래 품었던 비소 같은 사랑에 어찌 동참하지 않으랴. 불멸의 사랑 앞에 어찌 함께 앓아눕지 않으랴. 외로움이 치명적이므로 시는 더 절실하고 그 힘으로 시인은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시편들, 어느 경계를 넘어선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아닌가. ‘삶을 살아내는 방법’을 절박한 그리움으로 승화시킨 시집 한 권으로 한동안 굶주린 나의 외로움에게 밥을 먹일 수 있겠다.
이가림 시인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문리대 불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루앙 대학교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 정지용문학사, 편운문학상, 후광문학상을 수상했다. 파리 7대학 객원교수를 역임, 현재 인하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 <빙하기><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순간의 거울> <바람개비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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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미학> 2011 가을 창간호 Zoom spot - 마경덕
*신작
구름의 효능
고리
*발표작
바람의 성별性別
한때 적막이란 말에 잡중한 적 있다
프로의 힘
썼다 지우며 다시 새기는 살아남은 자의 형벌
-박선경 시인
시인에게 ‘찰나’의 의미는 곧 ‘기록의 순간’이다. 주체와 대상간의 새로운 발견이 감각에 새겨지는 순간에 일어나는 감정을 시인은 글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록임에 동시에 발견이다. 벗어날 수 없는 시작과 끝의 순환 고리처럼 그것은 괴로운 ‘찰나(순간)’이다.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는 시는 서로 만날 수 없는 경험과 직관의 시차(時差)를 끊임없이 환상으로 채워야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대상과 주체의 만남은 결코 서사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어느 날의 사고처럼, 때론 이미 존재해 있던 기원을 찾아가는 일처럼, 어쩌면 기억은 현재의 시간을 위해 매순간 환기되어야 하는 판타지 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대상)은 들여다볼수록 두렵다.
도달할 수 없다는 상실감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의 시간으로 재현해내며 때론 불완전한 모습으로, 때론 찰나적이면서 영원한 순간으로서 현존하기 때문이다. 대상은 인식하는 동시에 주체로부터 분리되는 타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시인은 늘 대상(타자)과의 합일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운명적일 수밖에 없는 주체와 대상간의 벌어진 시간, 그 틈에 마경덕 시인의 직관은 두 발을 거느리고 있다. 언제나 한발 뒤늦게 도착 할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시인은 스스로 몸에 새기며 나아간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람이 너울너울 밀고 간 모래물결, 맨발로 사막을 건너간 암컷의 흔적이다. 치맛자락 끌고 조신하게 걸어갔다. 수천 년 모래알을 세며 사막을 걸을 수 있는 자는 몸을 찢은 어미만이 가능한 일, 피 냄새를 기억하는 바람은 어디론가 흘러간 제 새끼를 보려고 족적(足跡)을 기록해 두었다.
하지만, 기록이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낙타의 행렬이 그녀의 발자국에 겹쳐지고 바람이 묻힌 자리에 또 바람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니,
이곳에서 이별이란 그저 사소한 일. 평생을 떠돌다가 우연히 마주쳐도 늙어버린 어미를 기억할 바람은 없다. 새끼를 낳은 것들의 형벌은 떠난 자식을 끝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바람의 性別」부분
『시와정신』(2011. 봄호)에 발표되었던 「바람의 性別」에서 ‘바람’은 모든 얽혀있는 것들의 기준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경계와 구분선이 없는 ‘사막’에 비유되는 공간에서 유일한 흔적은 ‘암컷’의 흔적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서 “몸을 찢”어 이 무한한 공간을 고통으로서 뛰어넘은 자는 암컷이자, “피 냄새를 기억하는 바람”인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순환의 의미를 강조하는 시인은 이 자연의 섭리를 경이로움으로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어디론가 흘러간 새끼”를 보기위해 족적(足跡)을 남기는 어미의 운명을 통해 어미란 존재 자체가 비애이자 신비로움인 것을 강조한다. 이 과정을 시인은 ‘기록’에 비유한다. 몸을 찢고 나아간 제 새끼를 찾아 떠나는 낙타의 행렬을 허망하고도 처연한 기록의 의미와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운명이자, 특히나 마경덕 시인이 바라보는 사물(대상)에 대한 인식의 과정인 것이다.
족적(足跡)을 남긴 자의 비애는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생에 짊어지고 갈 형벌이며, 존재의 비애인 것이다. 다시 말해 기록의 비애이다. 그것은 만날 수 없는 것들을 쫓아 행군하는 낙타의 수행과도 닮았으며, “바람이 묻힌 자리에 또 바람의 나라가 세워지는”일처럼 비애의 순환을 예고하는 사막의 풍경인 것이다. 결말이 없는 사막의 비유적 풍경을 통해 시인은 ‘족적(足跡)/ 피 냄새를 기억하는 바람/ 어디론가 흘러간 제 새끼/ 이별/ 떠난 자식/ 별들의 장지(葬地)/ 짝 잃은 수컷’ 등 존재하는 것들의 모든 불완전함을 보여준다. 시인이 표현한 시어들은 이미 불완전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는 현재의 시간들인 것이다. 이것은 기록의 의미, 즉 시인에게 있어 대상과 주체가 만나는 시간의 불일치성처럼 흔적으로만 존재하는 현재의 시간들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곧 사라지지만 또 다시 시작될 ‘시간의 운명’인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현실의 모순을 포착해내던 마경덕 시인의 사유는 어느덧 무심히 양 극단의 풍경을 한 곳에 오롯이 담아내는 ‘바람의 족적(足跡)’을 만들어 낸다. 그녀의 시세계에서 ‘바람’은 곧 사라질 현실의 풍경을 새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곧 다가올 현실을 예감하게도 한다. 이러한 시선은 허망하면서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마경덕 시인만의 장점이다. 이 아이러니한 현실 속에서 경계가 없는 시선이야 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 ‘시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현실적인 풍경들에게서 사실감마저 느끼게 한다. 그녀는 전작들에서처럼 일상 현실의 모순적 상황이 그려내는 새로운 의미들에 집착한다. 그녀의 시속에 드러난 현실은 일상적이지만 일상적이지 않다. 현실은 우리에게 익숙하나 그녀가 그려낸 현실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인식의 틈, 갈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막을 오래 쓰다듬은 손바닥에 푸른 물이 들었다. 내 오른쪽 어금니처럼 한쪽이 닳아버린, 부르면 혀가 서늘한 적막. 소란한 틈으로 잠깐 뒤태를 보이고 사라진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불쑥 내 몸을 치고 사라지는 그 짧은 1초의 정전(停電)…내 몸의 플러그가 뽑힌, 그 1초.
떠밀리고 발등을 밟히는 사이, 방심한 내 어깨를 치는 순간, 울컥 혀끝에 닿는 찰나의 암전(暗轉). 그는 인파 속에 나를 홀로 세워두고 길을 끌고 흘러간다. 세상과 불통이 되는 그 시간,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타전할 수 없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그 1초는 적막이 나를 다녀간 시간.
(후략)
-「한때 적막이란 말에 집중한 적 있다」부분
저 사내는 프로다
배고파도 목말라도 발 저려도 종일 그 자세로
한 번도 졸지 않고 싸늘한 바닥에 앉아
악취를 참고 배뇨를 참고 가려움을 참고 추위를 참고 소음을 참고
매캐한 먼지를 참고 치미는 화를 참고
지하계단에 무릎 꿇고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저 늙은 사내,
이십 년 한자리에 눌러앉은 그 게으름이
사내를 먹여 살린다
(중략)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
걸인(乞人)이 되려면 이 모든 것을 통과해야한다
-「프로의 힘」부분
『시에』(2010. 봄호)에 발표 되었던「한때 적막이란 말에 집중한 적 있다」에서 ‘적막’과 ‘현실’ 은 서로 상반된 의미로서 묘사되지만, 시의 후반부를 통해 소음 속의 현실은 적막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떠밀리고 발등을 밟히는” 소란한 현실 속에서 주체는 “인파” 속에 서 혼자가 되는 순간이 있다. 이것은 “적막이 나를 다녀간 시간”인 것이다. 시인은 이제 적막의 순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 자신을 잠시 스쳐가는 순간이라고 묘사하며, 시인은 ‘현실’과 ‘적막’의 순간을 마주하게 한다. 이러한 시인의 의도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적막’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소란하지만 외롭고 고독한 현실을 그려냄으로써 상반된 의미들이 공존하는 시간을 만들어 낸다.
‘적막’과 ‘현실’ 은 서로 상반된 의미로서 서로의 명제를 교환한다. 즉 외롭고 쓸쓸한 ‘적막’의 순간은 현실 속에서 집중하려고 해도 만날 수 없는 세계이고, 소란한 현실은 ‘나’를 혼자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소음 속의 현실은 적막하고, 소통의 의지는 적막을 향한 채,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그려낸다. 이런 시적 효과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소란한 현실은 적막하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제시한다.
함께 발표된「프로의 힘」에서 “걸인(乞人)”과 “프로”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상반된 두 의미가 불러오는 모순적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반적 의미의 심층에서는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걸인에게서 부지런함이란 ‘악취, 배뇨, 가려움, 화’를 참아내는 일이다. 두 손을 공손히 내밀고, 연신 머리를 조아려야하는 “이십 년 한자리에 눌러앉은 그 게으름”이 걸인에게는 “프로”다운 모습인 것이다. 이 ‘게으른 프로 의식’이 이십 년 사내를 먹여 살린 힘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린 인식의 한계와 동시에 상반된 이미지의 결합과 재구성을 경험하게 된다. 시인은 적막과 현실, 걸인과 프로의 상반되면서도 동일한 새로운 이미지를 일상적 풍경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녀가 보여주는 것은 경험의 풍경으로서만이 아닌 인식의 풍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마경덕 시인의 비유적 상상은 익숙한 인식의 풍경을 향해 항상 문제제기를 한다. 그리고 모순적 상황을 향해 던져진 의문들은 묘사에 그치지 않고 역동적인 의미들을 생산해 낸다.
전철 1호선, 한 남자가 고리가 달라붙은 나무판을 쳐들고
목청을 높인다 뒷면 스티커를 떼고 아무 데나
붙이면 쫙 달라붙는다고, 못 하나 없이
주방 욕실 타일 벽에 무엇이든 걸 수 있는 만능고리라고
벽돌 한 장을 선전용 고리에 척 걸었다
플라스틱 고리가 벽돌의 무게에도 끄떡없다
그렇다면 저 힘은 만능인데,
누군가는 집으로 가서 벽에 거울을 걸고 사진을 걸다가
깨달을 것이다 제 몸에 상처를 내지 않고
받아줄 벽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사내는 가족의 생계를 고리에 걸었으니
졸음을 깨워 걸어야 하고 흔들리는 속도마저 걸어야한다
돌아앉아 헐거운 틈을 메우고 끝내 쇳덩이까지 매달아야 하리라
샘플용 고리는 강력본드로 붙였을 거라고
옆자리 여자가 소곤거리고 나는 대뜸 여자가 내민 말에
내 말을 포개어 걸었다
출근길, 지하철 손잡이가 뚝 떨어지듯
모든 고리는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환승역, 전철 손잡이에 매달린 졸음이 우르르 떨어져 나가고
흔들리던 손잡이 고리에 쩍쩍 사람들이 달라붙는다
-「고리」전문
지상으로 귀향하는 저것들
추락하는 순간, 제가 태어난 곳을 알게 된다
까마득한 하늘로 유학을 떠난 것은
모두 되돌아오기 위함이었다
도시에 거주한 구름들은 호기심이 많은 십대나 이십대
놀이공원 지붕에 걸터앉아 거울을 보고 있다면 사춘기가 분명하다
이때부터 인증샷 셀카를 찍고 강과 바다에 대한 질문이 많아지고
제 몸 구석구석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다
잘록하게 허리를 조이고 키높이 깔창을 깔고
저녁노을에 머리를 염색하러 우르르 몰려간다
양떼 조개 새털로 카드놀이를 시작하면
성인이 되었다는 2차 성징, 먼 하늘을 훔쳐보거나
층운이 다른 구름에게 접근했다가 따귀를 맞고 돌아와
미모의 인어구름을 들여오자고 익명으로 댓글을 단다
점심시간에 떠돌이 바람과 접속하고 번번이 자리를 이탈한다
이것들은 모두 설문지에 기록된 일상적인 통계
간혹, 별종도 있어 여우비와 교제를 하다가 하늘 학적부에서 제명되기도 하는데,
천 길 낭떠러지에서 점프를 하는 것은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 같은 것,
번개 천둥 돌풍을 다룰 수 있으면 조기졸업도 가능하다 체류기간이 짧은
구름의 손바닥을 펴보면 번개에 감전된 흔적이 있다
스미거나 박살나거나 흘러가거나, 그것은 개인의 취향이다
-「구름의 취향」전문
마경덕 시인의 신작 「고리」에서 ‘고리’는 ‘걸다’의 동사와 함께 한다. “아무 데나”, “척”하고, “무엇이든 걸 수 있는”, “만능”의 이미지는 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한다. 다음 연에서 알 수 있듯이 “받아줄 벽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우리의 삶에는 스티커로는 버틸 수 없는 무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제 몸에 상처”이다. 시인은 지하철 스티커 고리를 팔고 있는 상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의미를 분석해 보면 고리는 ‘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로 버티어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에서 자신의 상처에 걸어야하는 고리는 고통과도 같다. “졸음을 깨워 걸어야 하고”, “돌아앉아 헐거운 틈을 메”워야 하는 고통인 것이다. 무거울수록 깊게 파이는 상처를 알기에 시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걸다’의 동사는 곧 아픔으로 각인된다. 수없이 샘플용으로 보여주는 고리의 힘은 기대와 희망, 믿음으로 간절해지지만 “모든 고리는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마치 퇴근 길, 전철 손잡이에 기대어 있다가 우르르 몰려가는 군중들처럼 어쩌면 우리의 삶도 샘플용 벽에 기대어 교체되는 일회용 고리인지도 모른다.
마경덕 시인은 이러한 시적 정황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통찰을 일상적 묘사를 통해 정확하게 보여준다. 또한 “무엇이든 걸 수 있는 만능고리”의 부정을 통해 인간의 상처, 고통은 나약할 수밖에 없다는 따뜻한 시선 또한 잃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만능’이라는 허술한 희망에 기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그녀의 시적 의미들은 여러 모순적 상황들의 묘사를 통해 스스로 다양한 삶의 이면을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그녀는 획일화된 하나의 논리나 깨달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의 모순적 상황을 제시하여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사고를 경험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또 다른 신작「구름의 취향」에서처럼 현실은 다양한 시간들이 공존하는 취향의 문제인 것이다. 이 시에서 ‘귀향’은 ‘추락’과 동일어로 쓰이고 있다. ‘되돌아오는’ 인간 본연의 모습은 어쩌면 상승의 이미지가 아닌 추락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지붕 위에 걸터앉아 거울을 보”는 사춘기, 질문이 늘어나고 키높이 깔창을 대보는 구름의 성장기는 변화무쌍한 시각적 효과를 통해 상승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양떼, 조개, 새털, 인어 등의 다양한 구름 모양은 “훔쳐보거나”, “떠돌이 바람”, “자리를 이탈”하는 구름의 역동적인 묘사로 “지상으로 귀향하는 저것들/ 추락하는 순간, 제가 태어난 곳을 알게 된다”는 1연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상승하는 이미지 묘사는 추락하는 순간, 비로소 알게 되는 1연의 의미와 대조를 이루며 자연의 섭리 같기도 하며, 삶의 이중적 구조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시인은 이 모든 것을 ‘취향’의 문제로 마무리 짓는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취향’이란 삶의 다양한 존재방식들에 대한 애정이 아닐까. 어느 날, 한 순간 내 머리 위에 만들어진 구름모양, 그리고 흩어져 흘러가는 다양한 구름의 모습들처럼 “스미거나 박살나거나 흘러가거나”하는 우리들 삶의 방식처럼 말이다. 우리는 결국 모두 나 자신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이 말하는 취향은 ‘다양성’이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강조한다. 그녀는 모든 시에서 결과론적이며 획일화된 결론을 부정한다. 그녀의 시는 항상 단언하지만 열려 있으며, 열려 있는 듯 하지만 구속된 다층적 구조이다. 시인은 이러한 구조를 ‘기록’의 순간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이 말하는 기록의 운명은 썼다 지웠다 다시 새기는 살아남은 자의 형벌과도 같은 것이지만, 시인의 말처럼 무엇으로든 스미거나, 박살나거나, 흘러가기 위한 절대적인 ‘시간’인 것이다. 다시 말해 마경덕 시인이 말하는 ‘시간’의 이미지는 바람의 족적(足跡)이며, 시인이란 이것을 쫓는 바람의 목소리이다. 그녀는 이것을 빼어난 묘사로 보여주고 있다.
뼈를 묻으며 살아가는 것은 사막의 오랜 관습. 별들의 장지(葬地)가 된 이곳에서 떠돌이 바람도 수없이 뒤꿈치를 물렸을 것이다. 그때 물결 같은 발자국이 찍혔을 것이다.
사구(砂丘)를 넘어온 회오리바람이 모래밭을 헤집는다.
짝을 잃은 수컷들이다.
-「바람의 性別」부분
첫댓글 일요일 아침에 들렸는데
약속이 있어 다 못 읽고 나갑니다.
다시 돌아와서 읽을께요^^
언니~~ 건강하시지요^^
새벽미사 다녀와 들어와 보니...
나도 몇 번에 나누어 읽고 또 읽고 시의 소재나 써내린 이미지가 좋아서,
홍해영 말대로 홍家네가 글을 잘 쓰나봅니다.
푸른소나무 늘 고운시간 되기를.
ㅎㅎㅎ 홍가네. 순대국 잘하는 곳은 있더이다. 이제 홍순 까지 왔으니 다음은 내 차례???
언니의 부지런함은 누구도 못따를 것입니다. 건강하게 잘 지내시고, 하루하루 행복한 날 만들어 가시길 기원합니다.
홍해영 차례가 될거야. 무슨 상이 되든 어디에 속하든, 평생을 따라다닐 영광이 홍해영에게 있기를 바라면서 감사한 마음 전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