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문, 신문...205원 50전에 사라진 돈의문
'서대문'이라고 부르는 문의 원래 이름은 돈의문(敦義門)이다.
4개의 대문 중 가장 늦게 지어졌고, 가장 먼저 헐렸으며, 유일하게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했다.
1396년(태조 5년) 사직동 고개에 건립됐다.
1413년(태종 13년) 풍수상 좋지 않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권신(權臣) 이숙번의 집 앞으로 옮기려 하자 자기 집이 시끄러워질까 우려한 이숙번은 인덕궁 앞 동네로 옮기자고 우겼고, 관철했다.
지금의 서울시교육청 근처(경희궁 서쪽 언덕)에 문이 세워졌다.
서전문(西箭門)이었다.
인덕궁은 상왕인 정종의 사저였다.
권신의 권세가 상왕을 넘어선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옮긴 문은 통행이 불편했다.
1422년(세종 4년) 헐어버리고 지금의 강북삼성병원과 덕수궁 방향의 정동길이 교차하는 곳에 옛날과 이름이 같은 돈의문이 세워졌다.
사람들은 '새로운 문'이라면서 '신문(新門)'이라고 적고, '새문'이라고 읽었다.
'새로 지은 문 안쪽', 지금의 세종로사거리와 서대문 사이 마을의 이름이 새문안이다.
‘새문안교회’나 ‘신문로(新門路)’ 같은 지명은 여기서 비롯됐다.
'새문'이라는 호칭이 '막을 색(塞)'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의 권신 이숙번은 돈의문 근처에 큰 집을 짓고 살았는데, 사람이 통행하고 소와 말이 오가므로 시끄럽다는 이유로 문을 막아버리고 통행을 금했다고 해서 색문(塞門)이라고 부르고 근처 마을을 색문동(塞門洞)이라고 했는데, 후에 새문, 새문동으로 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돈의문은 중국 사신과 개성·마포나루터 상인들이 드나들던 ‘교역의 문’이었다.
성문 밖에는 중국 사신을 맞은 모화문과 경기감영(현재 서대문역과 적십자병원)이 위치했다.
구한말 새로운 문물이 돈의문을 통해 전해졌다.
서양의 새로운 문화, 서구인들이 돈의문을 통해 외교의 거리, 공사관의 거리인 정동길을 오갔다.
풍파도 많았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왜군을 피해 의주로 피란 갈 때 돈의문을 이용했다.
1624년 반란을 일으킨 평안병사 이괄이 도성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곳도, 반란이 사실상 막을 내린 곳도 돈의문이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비롯한 자객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 도성에 들어온 곳도 돈의문이었다.
일제는 1915년 도로를 넓히며 돈의문을 허물었다.
돈의문은 서울의 첫 노면전차(서대문~청량리) 출발지였다.
당시 헐린 목재는 경매 끝에 205원 50전에 낙찰됐다.
철거 과정에서 돈의문의 편액만은 남아 창덕궁의 행각에 보관해 오다가 1992년에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수장고를 거쳐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됐다.
2014년부터 한양도성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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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고교 시절 <연려실기술>이었던가 정확하지 않지만, 이숙번과 색문동, 재주가 비상했지만 교만했던 이숙번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이숙번을 흥미롭게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