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만약 여기에 대응하는 감수성이 도덕에 대하여, 진실로 도덕에 대하여 열려 있지 못하다면, 거기에 아무리 집중된 혼의 활동이 있다하더라도 이것을 체험할 수 없다(색채의 본질, 2016, 100)."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통 사람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데, 그들은 왜 그런 범죄를 저지를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런 상황이 안타까웠기 때문에 이런 질문도 했을 것이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과 보통사람과의 차이가 질문이다. 질문을 바꾸면, 그들의 정신이 어떻기에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가이다. 정신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필자 역시 알기가 몹시 어려웠다.
우리는 현실에서 물질만 보지만, 그 이면에는 정신의 움직임, 이동이 있다. 먼저 말하면 그 움직임에서 둘의 차이점을 포착하였다.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인간은 세 가지 의식을 지닌다. 깨어있는 의식, 꿈꾸는 의식, 그리고 잠자는 의식(무의식)이다. 세 가지 의식 중에서 깨어있는 의식만 사고를 통해서 파악을 할 수가 있고, 꿈꾸는 의식은 꿈을 꾸는 상태와 같으나 반드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꿈과 다르다. 그리고 잠자는 의식은 무의식으로 현실의 깨어있는 의식상태에서 인간은 절대적으로 알지 못한다. (미래에 인간이 진화하면 가능하다고 슈타이너가 주장했음)
인간이 의지를 내어서 삶을 살아가는 주체는 무의식에 내재한 자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서 무의식에 내재한 자아를 만나야 한다. 요컨대 잠자는 의식에 내재한 자아를 만나야 하는데 만나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현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잠자는 의식에 내재한 자아를 만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꿈꾸는 의식을 통한 방법인 것이다. 문제는 꿈꾸는 의식이 꿈과 같이 흐릿해서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우리는 꿈꾸는 의식을 통해서 무의식에 내재한 자아를 만나야 한다. 꿈꾸는 의식은 감정으로 표출되므로, 우리는 감정을 통해서 잠자는 의식에 내재한 자아를 만날 수가 있다.
여기에서 알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세 가지 의식이 어떤 공간이 있어서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가 되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감정을 통해서 잠자는 의식에 접근할려면 온 몸으로 '사랑'과 같은 감정을 내어야 한다. 자아의 속성이 사랑이지만, 현실에서의 사랑과는 다르다. 요컨대 무의식에서의 사랑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사랑을 한다면, 무의식에서의 자아에게 도움이 된다. 우리는 현실에서 사랑을 통해서 무의식에 내재한 자아에게 접근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론은 우리는 현실에서 꿈꾸는 의식의 감정으로 자아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자신이 이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현실에서 갖는 감정에 따라서 자신의 삶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랑과 같은 감정, 열정, 존경과 같은 감정은 자아의 힘을 응축시키고 강하게 하므로 자신의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된다. 반면 분노, 우울, 불만과 같은 감정을 가지면 자아가 어려워지므로 자신의 삶도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흉악범들의 감정이 어떨 것인가에 대해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런 흉악범들의 감정을 '스스로' 어떻게 파악하는가가 질문이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빨강 속에 침잠하여 빨강과 하나가 되었다면, 빨강의 세계 전체가 동시에 신적인 분노의 실체라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신에게 기도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노랑색과 하나가 되었다면, 노랑색이 가운데로 모이는 느낌, 청색과 하나가 되었다면, 청색은 가장자리로 방사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감정은 혼의 활동으로 도덕적 감수성이 열려있어야 지각할 수 있다(색채의 본질. 2016).
그래서 필자가 실험해 보았다. 빨강색과 하나가 되어 보고, 노랑색, 그리고 청색과도 하나가 되어 보았다. 만약 위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면, 꿈꾸는 의식의 감정이 자아에 연결되어서 혼의 활동이 이루어졌다. 반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혼의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가 도덕적 감수성으로, 도덕적 감수성이 있어야 이런 감정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있는 점은, 혼의 활동이 자아의 활동이므로 꿈꾸는 의식의 감정이 잠자는 의식의 자아에 전달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도덕적 감수성이란 감정, 꿈꾸는 의식의 감정으로 무의식의 감정이 되는 것이다. 되풀이 하지만 현실에서의 감정과 무의식의 감정은 다르다. 짐작하기에 무의식의 감정은 '신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평소 궁금하게 생각한 흉악범들의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가. 물론 도덕적 감수성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꿈꾸는 의식의 감정에 '사람에 대한 감정', '아이들에 대한 감정'이 없다. 우리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나와 같은 존재로 나와 같이 귀하게 여기는 감정이 있다. 또 아이들에 대해서도, 아이들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가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에게는 이런 감정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사람을, 아이를 죽일 수가 있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사랑스럽게 생객한다면 그렇게 죽일 수가 없는 것이다.
꿈꾸는 의식이 꿈처럼 희미하므로, 또는 무의식의 감정이라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마 자신도 모를 것이다. 이것이 무의식에 내재하므로 현실 의식으로는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의식이 형성되는 시기는 태어나서 3살까지이다. 그래서 태어나서 3살 까지는 무조건 사랑해줘야 한다는 이론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만약 이 시기에 부정적인 감정이 형성되면, 아이 자신은 모르는 상태에서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늘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성찰해서 이런 상황을 파악해야 자신의 삶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점점 더 흉악한 범죄가 늘어나는 것은 인류가 정신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기 떄문이다. 특히 인간의 발달단계에서 정신을 배제하니, 아이들이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아이들의 정신이 발달하기가 어렵다. 전혀 과장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정신이 발달은 커녕 망가지고 있다. 정신의 발달단계는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번쨰는 육체가 발달하는 단계로 0-7세까지이고, 두 번째 단계는 에테르체가 탄생하여 자유로와 지는 단계인 7-14세 사이이다. 세 번째 단계는 14-21세 사이로 아스트랄체가 탄생하고 자아가 탄생하여 드디어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인간의 발달단계란 인간의 정신과학적 요소가 각각 발달, 자아의 탄생까지 이루어져서 성인이 되는 단계이다. 늘 되풀이 하지만 이런 단계를 무시하니 정신이 망가지는 것이다. 결과는 현실에서 상속의 자아로 삶을 살아 가게 된다. 상속의 자아는 스스로 판단하거나 의지를 내지 못한다. 외부의 상황에 꼭둑각시가 되어서 삶을 살아가는 상황, 현재 약물 중독, 흉악해 지는 범죄, 자살도 마찬가지이다. 자아가 온전하게 성장,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초등학교(7-14세)에서 만이라도 인간의 발달단계에 맞는 교육을 한다면, 그 절반은 구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