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으로 돌아갑시다 (2501)
200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 천종숙
바뀐 신발 / 천종숙
잠시 벗어둔 신발을 신는 순간부터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분명 내 신발이었는데
걸을 때마다 길이 덜커덕거렸다
닳아있는 신발 뒤축에서
타인의 길이 읽혔다
똑같은 길을 놓고 누가
내 길을 신고 가버린 것이다
늘 직선으로 오가던 길에서
궤도를 이탈해 보지 않은 내 신발과
휘어진 비탈길이거나 빗물 고인 질펀한 길도
거침없이 걸었을 타인의 신발은
기울기부터 달랐다
삶의 질곡에 따라
길의 가파름과 평탄함이
신발의 각도를 달리 했던 것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은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걷는 길,
나는 간신히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었다
[당선소감] '시는 내 삶의 절망이자 희망'
찾아와 주지 않는 행운을 사려고 꽃집에 갔다.
팔다리가 잘리고 몸통이 삭둑 잘린 행운들이 태연하게 옆구리에서 행운의 싹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뼈아픈 절망의 칼날이 몸통을 수천 번 지나가도 쑥쑥 자라나는 행운,싹은 자랄수록 비쌌다.
한번도 피워보지 못한 너무 큰 행운은 버거운 짐이었다.
행운을 누리고 싶은 간절함과 몇 장의 지폐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동안
행운은 서서히 시들어 갔다.
행운은 아무나 피워 올리는 게 아니었다.
꽃집을 나서며 행운을 꽃피우려던 가지 하나씩 잘라냈다.
머리를 자르고 팔다리를 잘라내고 나니 몸통만 남은 옆구리에서 뜻밖의 행운이 돋아나고 있었다.
시는 내 삶의 희망이며 절망이었다.
희망과 절망의 팽팽한 줄다리기에 지쳐 그만 줄을 놓아버리고 싶었을 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허탈감과 함께 포만감이 밀려들었다.
먼저 부족하고 모자라는 제게 희망의 줄을 잡게 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죽을 힘을 다 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의 뿌리를 내리게 해 주신 유병근 선생님,
언제나 힘이 되어 주시는 이선희 선생님,고맙습니다.
시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문우들에게도 작은 희망이 되고 싶다.
끝으로 말없이 나를 믿어 준 가족에게 이 벅찬 마음을 함께하고 싶다.
[심사평] 거침없는 사색, 제 맵시 잘 갖춰
시들이 조금씩 어둡다.
시대가 어둡다고 시가 어두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고,고통 속에서 희망을 읽어내는 변화의 징후를
시에서 엿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작품을 읽어 내렸다.
여섯 사람이 쓴 여섯 작품이 마지막까지 뽑는 이들의 손에 남았다.
'기억에서 봄을 검색하다',
'몸빼',
'유마경변상도',
'없다,해돋이 광장에는',
'결혼기념일',
그리고 '바뀐 신발'이 그것이다.
모두 남다른 수련 흔적과 작품 세공력을 숨기지 않은 작품이다.
게다가 주변의 구체적 일상에 충실하고자 한 점 또한 공통의 미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천종숙의 '바뀐 신발'을 당선작으로 미는 데에 뽑는 이들은 쉽게 동의했다.
신발은 흔한 글감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흔하지 않는 예각적 체험으로 되돌려 내는 눈매는 오랜 적공의 결과다.
첫 싯줄에서 마지막 싯줄까지 다소 둔탁하지만 거침없는 사색이 제 맵시를 잘 갖추었다.
함께 보낸 작품들의 수준이 가장 고른 점도 장점이었다.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시가 먼저 변해야 한다.
이제껏 이고 다닌 나이와 경력은 지금부터 잊어야 하리라.
신인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모험의 세계로 즐겨 나아가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 박태일· 최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