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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으로 이 작가를 무시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성 문단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청소년 문학판에서는 김려령, 잘 팔리고 잘 먹히는 작가다. 쓰고보니 서두부터 가히 도전적인 것 같아 스스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25일에 글을 쓰기로 해놓고 꼭 25일의 끄트머리에 손톱을 물어뜯어며 이책을 올릴까, 저책을 올릴까 하다 그래도 알모책방에서는 내가 청소년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통하니 꼭 청소년 글을 올려야겠지, 하는 맘으로 집어 들었는데 흠흠, 가히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갈팡질팡이다.
6월에 신간이 나왔는데 7월 중순이 되어서야 책을 집어들었다. 일종의 예의같은 것이었다. 청소년문학에 대한 예의. 그런데 창비의 계획인지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청소년'이라는 단어는 쏙 빠진 채 그저 '김려령의 첫 소설'이라고 씌어있어 또 한번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이 작품 이전에 나는 김려령의 작품 <<트렁크>>를 읽었다. 창비에서 나온 이 책은 청소년문학이 아닌 순수문학을 표방한 장편소설이었기에 요근래 나는 김려령하면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청소년소설에서 기성소설로의 변신을 꿰하는 작가?
횡설수설했는데 각설하고, 이 작품집 <<샹들리에>>에는 샹들리에는 없고 <고드름>,<그녀>,<미진이>,<아는 사람>, <만두>, <파란아이>, <이어폰> 등 가히 초라하고 힘없고, 우울한, 친구에게 따를 당하거나 가족에게 거부당한, 어둠에 내몰린 청소년들이 나온다. 샹들리에는 이를 테면 이런 어두운 상황들에 대비되는 메타포라고 해야할까? (청소년 소설이 맞을 것 같은데 그냥 '소설집'으로 나온 양장본이 하나요, 청소년소설로 분류되어 나온 판본이 또 하나있다. 창비에서 김려령의 위치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위치란 말인가. 신경숙끕? 워워, 자제하자!!!) 아니 그나마 <만두>의 주인공 정도라면 우리에게 힘을 주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서너편의 단편은 월간문예지나 계간지를 통해 이미 접한 상태라 마지막에 실린 중편 분량의 <이어폰>에 주목해서 독서를 하였다. 가히 읽고나서도, 아니 읽으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후루룩 휘리릭 책장을 넘기려 노력했다.
<이어폰>의 주인공 남중일은 엄마가 사준 비싸고 간지나는 이어폰을 끼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퇴근한 아빠가 방에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키보드를 내리쳐서 충격을 받은 중일이 아빠를 따라 거실로 나오다 발견하게 되는 건 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엄마, 엄마의 죽음이었다. 시작부터 꽤 섬뜩하다. 김려령만의 거칠고 속도감있는 호흡도 좋다. 그런데 왜 예전처럼 그 속도감이나 사건에 쉽게 따라가지 못하는지 나는 또 고개를 갸웃거린다. 현 세태를 파악하고 청소년들의 태도나 말투를 고스란히 재현한 것도 좋으나 어쩐지 숨막혀, 자꾸 헉헉대는 나를 본다. 보면서도 좀 더 여유있고 즐겁고 환하고 행복하고 해피한 건 없을까 쭝얼쭝얼.
허리가 아픈 중일의 엄마는 간이의자를 딛고 올라가 수납장에서 무거운 접시를 꺼내다 중일을 불렀을 것이다. 중일은 음악을 들으며 딴 세상에 가 있었을 터, 벽을 사이에 둔 채 모자는 각자의 시계 속을 헤매고 있었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저 세상으로 가버린 엄마를 떠올리면 중일은 자신을 짓누르는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오기가 힘겹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기위해 귀에 꽂고 다니는 이어폰,으로 빗어질 수 있는 사건사고와 잘 버무려졌다. 이러한 상황과 갈등을 잘 찝어내는 건 좋았는데 어쩐지, 내 술어가 빈약해 끝까지 가지 못하겠지만 웬지 씁쓸함은 지울 수 없다.
김려령의 톡톡 튀는 말투도 예전같지 않게 너무 가시돋히고 뾰족하다는 느낌에 요즘 나는 자주 김려령이 거북하다. 그의 글이 예전의 완득이처럼 세상을 따듯하게 보듬어 안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며 휘리릭 읽은 이 책을 다시 들고 찬찬히 들여다 보기를 희망해본다.
첫댓글 읽고 나서 몹시 아쉬웠던 책..
해피한 사공님, 열대야에 잠 못 이루셨어요? 글 올린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