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으로 돌아갑시다 (2502)
200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 정재영
붉고 향기로운 실탄 / 정재영
드티봉 숲길을 타다가 느닷없이 총을 겨누고 나오는
딱총나무에게 딱 걸려 발을 뗄 수가 없다
우듬지마다 한 클립씩 장전된 다크레트의 탄환들
그와글와글 불땀을 일으킨 잉걸 빛 열매를 따 네게 건넨다
실은 햇솜처럼 피어오르는 네 영혼을 향하여
붉게 무르익은 과육을 팡팡 쏘고 싶은 것이다
선홍빛에 조금 어둠이 밴 딱총나무 열매에 붙어
이놈들 보게,알락수염노린재 두 마리가 꽁지를 맞대고
저희들도 한창 실탄을 장전 중이다
딱총을 쏘듯 불같은 알을 낳고 싶은 것이다
그게 네 뺨에 딱총나무 붉은 과육 빛을 번지게 해서
갑자기 확 산색이 짙어지고
내 가슴에서 때 아닌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고...
막장 같은 초록에 갇히면 누구든 한 번쯤 쏘고 싶을 것이다
새처럼 여린 가슴에 붉고 향긋한 과육의 실탄을
딱총나무만이 총알을 장전하는 게 아니라고
딱다구리가 나무둥치에 화약을 넣고
여문 외로움을 딱딱 쪼아대는 해 설핏 기운 오후
멀리서 뻐꾸기 짝을 부르는 소리 딱총나무 열매 빛 목청
딱총나무의 초록이 슬어 놓은 잉걸 빛 알들이
겨누는 위험한 숲 내 손을 잡는다.
[당선소감] "치열한 삶 속 시 '당금질'은 계속 돼"
어느 날 갑자기시가 내게 온지 꼭 20년이 지났다.
시는 고향역의 대합실 벤치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잠에 빠진 노숙자의 등을 타고 내게 왔다.
시에서는 모름지기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이전에 시는
이미 그 단서를 가지고 내게 온 것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습작기의 내 의식을 지배해 온 것은 새우처럼 웅크린 노숙자의 그 등이었다.
그 시는 웅크렸던 등을 대고 잠 한 번 깊이 청할 수 있는 따뜻한 구들장이 되지 못한다.
다만, 나에게 있어 시는 남루한 생의 뜯어진 옷자락 사이로 언뜻 언뜻 내비치는
흰 살빛 같은 각성이 되었다.
20년 세월, 내 지각은 너무 느려터지고 아둔했던 것일까?
내게 주어진 단서는 자명한 것이었지만 내 앞에는 늘 왜곡과 착시의 갈림길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내 시에서 한 조각 살빛의 각성이 읽히고 삶의 결이 잡힐 때까지
나는 얼마나 더 내 무딤을 벼려야 하는가?
내 습작기는 지금부터가 새로운 시작이다.
생의 치열한 연소 속에서 내 시의 담금질과 매질은 계속될 것이다.
시와 삶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호작용만이 내 시의 방법론임을 잘 알기에
내 범상한 일상을 탓하기에 앞서 나는 앞으로 낯설고 거친 풍경을 찾아 모험도
불사하는 생의 에너지를 키우는 쪽으로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엎드려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빗나간 내 시의 안목을 바뤄 주시느라 노심초사
애쓰시고 심려가 많으신 박제천 선생님께 큰절 올린다.
직장 동료로서 늘 격려를 마지않았던 이영식, 황상순, 시인님 그리고
문학아카데미 시창작반 문우들과도 당선의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와 두 아이들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심사평] 역동적인 생명력 거대 물결 이뤄
장시간 600명에 가까운 이들의 시를 읽으면서도 지루한 줄 몰랐다.
문학의 위기나, 시의 죽음이니들 해도, 상당수의 투고작들이 저마다의 얼굴을 반듯하게 갖추고 있었고,
저마다의 매력적인 향기를 뿜고 있엇다. 전반적인 수준이 만족할 만 했다.
고른 수준을 보이는 이,앞으로의 창작 활동에 대한 신뢰감을 주는 이 등을 골라서 열다섯 명을 뽑았다.
모두 손색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래도 어쩌랴,서정적 진정성이,언어적 숙련도와 개성의 깊이 등을 기준으로 다시 다섯명을 뽑았다.
모두 수작들이었다. 그러나 한 편의 당선작을 위해 다섯명의 흠을 잡아보기로 했다.
김경미씨의 투고작들은 참신한 언어 감각이 돋보였다.
동시에 이 장점은 씨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했다.
젊은 언어 감각이 언어적 경박성으로까지 치달아 버린 것이다.
김명희씨는 사물과 일체되는 물활론적 감수성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산문적인 서술을 지양하고 보다 응축된 표현을 해야 하겠다는 주문이 따랐다.
김영건씨는 지나친 노련함과 산문성으로 트집 잡혔다.
하지만 위트가 시적 재능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그의 유쾌한 상상력은 돋보였다
정재영씨는 이들 중에서 가장 많은 시를 투고하였을 뿐 아니라 한결같이 높은 수준의 역작들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 당선작으로 정한 시 '붉고 향기로운 실탄'은 한마디로 역동적인 생명을 보여주는 시이다.
산문적인 서술로는 이룰 수 없는,말소리의 조직과 오감을 통해 서정을 주입하는 시이다.
불필요한 이인칭 청자,수사적 어법의 과용 등이 흠이 된다는 지적도 있긴 하였으나
이를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는 반대가 없었다.
한 편을 뽑는 일은 괴로웠다.
하지만 심사자 셋은 한동안 향기로운 시의 바다를 유영하고 나오는 달콤한 나른함을 나눌 수 있었다.
심사위원 김종해, 안도현, 신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