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들은 내면에 피지않은 꽃같은 것을 간직하고 싶어한다(청소년을 위한 교육예술, 2023, 141)."
필자의 사춘기 시절을 돌아보면, 감정은 -가슴 속에서- 들끊어서 주체가 안되는데, 주위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런 감정을 이해해 주거나 토닥여주는 사람이 없었다. 거의 캄캄한 암흑과 같았다. 이것이 필자가 겪은 사춘기 시절인데, 더 답답한 것은 이런 감정을 콕 집어서 뭐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위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버틸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었다는 생각은 하지만, '누구라도 이런 상황을 이해해주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안타까운 감정은 지금도 여전히 가슴 한 켠에 남아있다. 물론 당시 주위에 사람도, 책도 있었겠지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돌이켜 그 당시 어떤 감정이었을까하고 생각해 보아도 지금도 알지 못한다. 만약 그 감정을 이해한다면 치유가 가능하지만, 그 전에는 상처로 계속 남아 있는다. 이것이 또한 정신의 속성이다. 정신은 보이지 않아서 콕 집어서 말하지 못하지만, 누군가 그 감정을 콕 집어서 말해줘 내가 이해한다면 바로 치유가 되는 것이다. -빗나가지민 이것이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다- 그런데 그 감정을 콕집어서 말해 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루돌프 슈타이너', 필자가 슈타이너 책을 늘 읽고 공부하는 이유이다. 슈타이너의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상황을 자주 만나는데, 어쩌면 이렇게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정확히 말해 주는지 참 탄복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위 문장이다. '이 아이들은 내면에 피지않은 꽃같은 것을 간직하고 싶어한다'. 읽는 순간 참 기가 막힌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을 했을까. 그리고 그 당시 감정이 한 마디로 바로 정리가 되었다. 내면에 피지 않은 꽃을 간직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이를 살펴보면 첫째, 꽃은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름다운 존재이다. 만약 주위에서 비교하여 못난 상황이 된다면, 아이들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 괴리에 몹시 힘들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런 아이들에게 '너는 아름다운 존재야'라고 말해 준다면, 아이들의 감정은 안정되어서 희망을 가숨에 품을 수가 있을 것이다.
둘째 그러나 나는 그 꽃을 피워야 하는 존재이다. 요컨대 아이들의 꽃이 아직 피지 않았으므로 아이들은 꽃을 피워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꽃이 어떤 꽃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피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이다. 즉 아이들은 캄캄한 밤중에 거센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기분이다. 여기에 인간의 발달단계에 맞는 교육, 슈타이너의 주장은 '이상'을 필요로 하는 교육이 등장한다.
셋째, 그 방법이다. '남자아이에게는 진정한 이상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신화적 인물이나 상상의 인물도 괜찮으니 그림처럼 어떤 인물을 형상화해서 그런 인물을 지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내면의 꽃을 피우는 방법, 이런 인물을 본받으면 '너는 꽃을 피울수 있어'라고 알려주는 일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암흑속에서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여자아이에게는 좀더 우주적인 것 쪽으로 영웅이 행한 것, 영웅의 활동, 영웅을 통해 일어난 것, 즉 체험된 사실에 해당하는 것을 이야기해 줌으로써 이상에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 남자아이에게는 완벽한 인간 형상을, 특별하게 위대한 인물을 이야기 해줘서 좀더 지상적인 것 쪽으로 해주어야 한다. 남자와 여자의 그 속성이 다른 것에 유의를 해야 한다'(위 책, 146-147).
슈타이너는 또한 사춘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들의 특성도 자세히 말하고 있다. '남자아이들은 일종의 홀로 은거하기를 굉장히 자주 합니다. 사춘기에 가능하면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것은 남자아이에게 깊이 박힌 특성입니다. 문제는 이 나이의 남자아이가 혼자 있으려는 경향이 조금도 보이지 않으면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위 책, 133). 후일 성정체성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남자아이들이 건들거리는 것도 사춘기 아이들의 툭성이므로 이럴 경우 교사는 심하게 나무라지 말고 유머를 통해서 접근해야 한다.
여자아이들은 '특정한 의미에서 과감하게 행동합니다. 개인성을 강조하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현합니다. 극단적인 경우 허영심, 교태 등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외적으로 드러나면 발걸음과 자세가 달라집니다. 머리를 한껏 쳐들고 잘난척하는 등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위 책, 134-135). 그리고 '여자아이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춘기 소녀의 영혼 생활 깊은 곳에 완전히 무의식 상태에 놓여있는 수치심의 이면이라는 것이다'(위 책, 142). 이런 수치심 역시 영혼생활의 발달 과정이다. 당연히 아이들의 이런 발달과정을 교사가 파악해야 한다.
필자 역시 현장에서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았지만, 이와 같이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다. 다만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의 다른 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했고, 거기에 대해서 비교적 받아들이는 쪽으로 선택했다. 왜냐하면 필자의 생각은 교육이란 어차피 스스로 하는 것이므로 교사는 아이들이 흥미를 가지거나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이 안 받아들이면, 그것도 아이들 몫이라고 생각했고, 교사는 다만 열심히 노력할뿐이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 이유는 당시 사회 분위기도 교사를 믿지 않았고, 교사 역시 아이들의 보조자로 자신을 받아들인 때문이다.
여담으로 필자는 공부를 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떄마다 '문제가 어디에 있을까'란 생각을 했다. '머리가 나쁜가' 아니면 '노력이 부족한가' 등등. 슈타이너를 공부하면서 문제의 답을 알게 되었다. 물론 슈타이너의 책에서 찾았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내부와 외부가 바뀐다. 정신세계, 그 세계가 내부이다가 태어나면서 그 세계가 외부가 되는 것이다. 즉 '구' 속에 있다가 '구' 밖으로 나와 '구'를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태어난 인간은 정신세계는 잊게 되고, 물질세계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물질세계와 정신을 연결해 줘야 한다. 정신세계와 물질세계와 연결이 되어야 자신의 정신을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바깥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연결해 주면 아이들의 정신이 환호성을 지른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정신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므로 그렇다.
그런데 필자는 물질세계와 정신을 연결시켜 주지 못했다. 물론 교육으로 인하여 그렇게 되었고, 후일 필자가 이것을 알았을 때는 발달단계가 지나서 회복이 되지 않았다. 이것이 계속적으로 어려움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만약 연결이 되었다면 누구라도 천재가 될수가 있다는 사실, 정신이 이렇게 중요하다. 이를 슈타이너의 주장으로 말하면. '주체가 객체에서 연결점을 발견하도록 돕는 요소를 수업에 반드시 집어 넣어야 합니다'(위 책, 147). 이것이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연결해 주어야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교육을 할려고 하고 있고, 또 이런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은 내가 체험해야 이해하고 또 전달도 된다는 것이다 . 요컨대 문제는 이것이 정신이라는 데에 있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슈타이너가 늘 주장하기를 교사는 자신의 정신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가지고 이해할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교사의 가장 궁극적인 처방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이유인 것이다. 할 수없이 결론은 교사 자신이 자신의 정신을 파악하는 방법뿐이다. 자신의 정신을 탐구하면서 교육을 할 때 그나마 가장 교육이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덧붙이면 교육은 인간을 만드는, 인간을 조형하는 예슬이다. 어떻게 교육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도 하고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